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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64화 (64/164)

64화

‘역시 이 아이를 거두는 게 아니었어.’

에이든은 다급히 다가가 벽난로 속장작에 붙은 불을 껐다.

그제야 에이든의 등장을 알아챈 아이가 동그래진 눈으로 에이든을 돌아보았다.

에이든은 아이를 질책할 생각으로 아이의 손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리온. 불장난은 하면 안 된다고, 좀 전에 내가 말했잖니?”

에이든의 질책에 리온은 어리둥절하다가, 그의 표정이 굳어진 것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고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불장난 아닌데…….”

“불장난이 아니면 무엇이야.”

“추운 데서 자면 아야해요. 엄마도 그래서 아야해써요. 그래서 리온이가 불붙여써요.”

에이든은 그렇게 말하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는 불장난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따뜻하게 해 주려고 불을 붙인 것이었다.

그 순간, 엘리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직 작은 불꽃입니다. 장차 생명을 태우는 불꽃이 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온기를 나눠 주는 불꽃이 될 수도 있지요.’

그와 동시에 평생 그리운 얼굴이 떠올랐다.

항상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위해 애썼던, 그가 한평생을 사랑할 여자의 모습이.

아마 율리아였어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아이에겐 아무런 죄가 없다고.

그러니, 당신이 이 아이를 거두어 달라고.

‘너를 네 조부와 다른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나의 마지막 숙제인가 보구나.’

리온을 멍하니 바라보던 에이든은 제 눈치를 살피고 있는 아이의 작은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아이의 작은 손에 장작을 잡으며 묻은 나무껍질이 붙어 있었다.

에이든은 물의 능력으로 아이의 손을 씻어 내며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리온. 내가 잘 모르면서 너에게 화를 내었어. 날 위해 불을 지펴 줘서 고맙구나.”

그의 사과에 아이는 언제 주눅 들었었냐는 듯 헤헤 웃었다.

에이든은 그런 아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새 장작을 넣으며 물었다.

“그럼 다시 불을 지펴 볼까?”

“웅!”

아이는 곧잘 벽난로에 불을 붙였다.

에이든은 아이의 손에서 튀어 오른 작은 불꽃이 장작에 붙어 서서히 타오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불꽃이었다.

공작저로 돌아온 엘리사는 고민에 빠졌다.

‘로제가 리온을 죽이려 했다는 증거를 어떻게 찾지?’

본인이 직접 황가의 피를 이은 것으로 의심되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찾아 죽이지는 않을 테니, 분명 누군가에게 이 일을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가까운 수족들을 움직이면 금방 의심을 살 것이고, 귀족들에게 시킬 수는 없었을 터.

귀족들이 아무리 로제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직접 제 가문의 사병을 움직여 황손을 죽이는 일은 꺼릴 것이다.

‘자칫 잘못해서 발각되었다간, 황손을 죽이려 한 반역자가 될 테니.

그리고 애초에 그들은 로제의 사람이 아니라 레이모어의 사람들이니까.’

그렇다고 레이모어를 움직였을 리는 없다.

원작에서 레이모어는 어째서인지 자신의 딸이자 황태자비인 로제에게 무심했다고 나온다.

로제가 황손을 낳으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해 줄 것이 분명 함에도.

그 때문에 로제는 레이모어에게 의논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황손을 죽이려 하고, 그러다 오히려 리온의 능력을 발휘시키며 리온이 황손임을 밝히는 데 일조하고 만다.

결국 로제는 그 일로 황태자비에서 폐위되고, 레이모어는 그런 로제를 등진다.

‘그럼 로제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용병들뿐이네.’

길드의 용병들은 충성심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라, 돈을 보고 움직이는 자들이다.

‘돈을 보고 움직이는 자들이라면 역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도 쉽지.

돈으로 회유하면 되니까.’

엘리사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 가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가 직접 찾아가긴 너무 위험한데.’

수많은 길드 중 로제와 결탁한 길드가 어느 길드인지 알아내려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황손으로 추정되는 아이들을 처치하려는 용병들을 현장에서 잡는 것이다.

하지만 루벨린의 기사들을 움직이기엔 용병들에게 그들이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터였다.

보다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어쩌지.’

고민하던 그때, 이 일에 적합한 단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 일을 맡길 만큼 믿음직하고,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

엘리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용병 길드는 제도 외곽의 뒷골목에 있었다.

언뜻 보기엔 술집이나 여관처럼 보이는 건물이었으나, 드나드는 손님은 전부 길드의 용병들이었다.

여관 안은 술기운이 오른 용병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때였다.

콰앙!

갑자기 들려온 파열음과 함께 여관의 문이 부서지며 문지기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왁자지껄하던 여관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뭐, 뭐야?”

용병들은 당황한 눈으로 부서진 문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황손으로 의심되는 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나갔던 그들의 동료 중 하나가 겁에 질린 얼굴로 덜덜 떨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로, 검은 로브를 입은 장신의 남자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들어섰다.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낀 남자의 커다란 손이 로브의 후드를 넘겼다.

칠흑 같은 흑발과 핏빛의 적안을 가진, 흡사 악마를 닮은 수려한 남자.

리하르트는 서늘한 눈으로 여관 안을 훑어보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이곳의 책임자를 만나고 싶은데.”

그는 일행 하나 없는 단신이었지만, 평소 거칠고 사납기로 유명한 용병들도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평생 온갖 거친 일을 하며 살아온 용병들은 동물적인 직감으로 눈앞의사내가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될 위험인자임을 눈치챘다.

그에게선 최상위권 포식자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 기세에 눌린 용병들은 뭐라 말하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렸다.

하지만 길드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덤벼들었다.

“어디서 굴러들어 온 건방진 놈이 감히 마스터를 만난다 만다 지껄여?”

리하르트는 검을 들고 제게 다가오는 신입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제게 기어 오는 걸 바라보는 듯한 눈이었다.

“이 건방진 놈이!”

그 눈빛에 기분이 상한 신입은 다짜고짜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살짝 몸을 트는 것으로 그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신입의 복부를 걷어찼다.

“커헉!”

신입은 그 충격으로 꼴사납게 뒤로 나동그라졌다.

“이, 이 미친!”

그가 떨어트린 검을 다시 주워 들려 했으나, 리하르트가 더 빨랐다.

성큼 다가온 리하르트는 용병의 검을 발로 쳐 내고 그의 손등을 지그시 눌러 밟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신입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신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리하르트가 시선을 들어 용병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세 번 말하지 않는다. 책임자 데려와.”

서로 눈치를 살피던 용병들 중 하나가 허둥지둥 돌아서 여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리하르트는 그제야 신입의 손에서 발을 뗐다.

사실 그는 이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티안의 아들이 어찌 되든 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굳이 따지자면 황가의 힘을 가진 크리스티안의 아들이 죽는 쪽이 루벨린에는 이득이었다.

하지만 엘리사의 간절한 뜻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를 보니까 네가 생각나서 외면할 수가 없었어.’

그녀가 저 아닌 다른 이에게 마음을 쓴다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저 때문에 마음 쓰인다는 건 싫지 않았다.

일상 속에서도 문득 떠올릴 만큼 그녀가 저를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늦은 밤에 이 수고로운 일에 나선 것이었다.

그때 여관 안쪽으로 들어갔었던 용병 하나가 돌아왔다.

“마스터께서 안으로 드시란다……

요.”

처음엔 호기롭게 말을 시작했던 용병은 끝에 가서는 리하르트의 눈빛에 눌려 말끝을 흐렸다.

리하르트는 그의 안내를 받고 여관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간 걸어가자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다. 그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꺾으니 긴 복도가 펼쳐졌다.

그 끝에 방 하나가 있었다.

평범한 여관방이었다.

그곳에 마른 체형에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남자가 궐련을 입에 물고 앉아 있었다.

그 주위를 그의 부하들로 보이는 용병 넷이 에워싸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궐련을 보고 설핏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그들의 존재에 개의치 않는 듯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남자를 마주 보았다.

남자는 다소 위험하다 여길 수 있는 상황에도 개의치 않는 리하르트를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네 녀석이 나를 만나고자 했다지?”

“그대가 길드 마스터인가?”

길드 마스터는 궐련의 연기를 한 모금 머금었다 내뱉고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그래. 용건이 뭐지?”

“황태자비의 명을 받고 제도에 퍼져 있는 너희 길드원들에게서 당장 명을 거둬라.”

“갑자기 그게 무슨-”

“그 아이들 중 한 명이라도 죽었다간 너희 모두 죽는다.”

리하르트의 말에 길드 마스터는 물고 있던 궐련을 떨어트렸다.

통상적으로 길드에서는 의뢰인의 이름이나 신분을 언급하지 않고 암호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침입자가 황태자비가 이 길드에 의뢰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니.

게다가 의뢰 내용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동요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하에게 궐련을 건네며 말했다.

“황태자비 전하의 명령이라니,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왼쪽 부하 중 하나가 단검을 꺼내 리하르트를 향해 던졌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제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단검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에 길드 마스터가 의아함을 느끼던 그때.

와장창!

옆의 창문이 깨지며 강한 바람이 방 안으로 몰아쳤다.

“크윽!”

바람은 길드 마스터와 그의 부하들까지도 구석으로 밀어붙일 만큼 강력했다.

바람이 멎은 후 그들이 겨우 눈을 떴을 때, 방 안의 모든 가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들 사이에 놓인 테이블은 넘어진채였고, 그 테이블에 부하가 던진 단검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그 가운데, 리하르트만이 처음과 같은 자세로 긴 다리를 꼰 채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길드 마스터와 부하들은 그제야 리하르트의 정체를 알아챘다.

“루, 루벨린 공작………?”

무심한 눈으로 길드 마스터와 부하들을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하는데.”

아직 약한 바람이 길드 마스터와 부하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마치 언제든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듯이.

길드 마스터와 부하들은 잔뜩 몸을 움츠린 채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리하르트는 주위에 감도는 바람을 흩트리며 덧붙였다.

“이건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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