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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65화 (65/164)

65화

며칠 후, 엘리사 앞으로 편지가 왔다. 로제가 보낸 편지였다.

편지는 만나고 싶으니 황궁으로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엘리사는 기다렸다는 듯 황궁으로 향했다.

황태자비궁에 도착하자, 시녀들이 엘리사를 접견실로 안내했다.

접견실은 화이트 계열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고, 곳곳에 금으로 만든 세공품들이 가득했다.

일반 귀족들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으나, 대륙에서 제일 값비싼 보석인 발광석으로 꾸며진 루벨린 저택의 접견실에서 생활하는 엘리사에겐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 접견실의 중앙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드레스와 장식들로 치장한 로제가 앉아 있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다가가 빙긋 웃으며 예를 갖추었다.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와요, 공작 부인.”

엘리사를 맞이하던 로제는 배를 감싸고 조심스럽게 앉는 엘리사를 보고는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이내 갈무리하고 웃으며 인사치레를 덧붙였다.

“몸도 무거울 텐데 이리 와 주어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전하께서 저를 불러 주신 건 처음이네요.”

“아렌시아에서 황실 다음으로 가는 여성이 바로 공작 부인 아닌가요.

오랜 전쟁으로 제국이 뒤숭숭한 이런 시기일수록, 서로 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맞대어야 한다 생각되어 불렀답니다.”

공공연하게 제게 적개심을 드러내던 로제가 저런 말을 하니 우스웠다.

엘리사는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로제의 인사치레를 받아쳤다.

“어머나. 제가 먼저 전하께 살갑게 다가갔어야 했는데, 이리 먼저 마음써 주시니 너무 기뻐요.”

“누가 먼저랄 것 있나요. 이제라도 서로 오해가 풀렸으면 된 거죠.”

로제는 아량이 넓은 황태자비 행세를 하며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그녀를 따라 찻잔을 내려다본 엘리 사는 입매를 비틀었다.

로제가 준비한 차는 임산부들에게 좋지 않은 홍차였다.

애초에 로제가 준비할 차는 영 못미더워 마실 생각도 없었지만, 악의가 분명한 로제의 행동을 보자 새삼 그녀가 가소롭게 느껴졌다.

“죄송해요, 전하. 제가 아직 입덧을 하고 있어서, 차나 쿠키는 먹지 못한답니다.”

사실 최근 들어 입덧 증상이 많이 완화되었지만, 엘리사는 그렇게 둘러대었다.

로제는 과장되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미안해요. 내가 부인을 배려 하지 못했네요.”

“아니에요. 전하의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엘리사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로제는 시녀를 불러 홍차와 쿠키를 치웠다.

시녀가 나가자, 로제가 다른 화두를 꺼냈다.

“참, 부인께서 가난한 아이들을 많이 도와주셨다는 미담을 들었어요.

황태자비로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군요.”

“아직 그리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아셨는지 쑥스럽네요. 그 미담이 그저 소문이 아니게 되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최근에는 부모 잃은 아이들도 도와주셨다죠?”

“네, 맞아요. 아직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은 인근 보육원으로 인도하고 있답니다.”

“그 보육원이 어디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공작 부인께서 좋은 일을 하셨으니, 장차 제국의 지어미가 될 사람으로서 그 뜻깊은 일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데.”

로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들은 엘리사는 드디어 본론이 나왔음을 알아챘다.

“음, 그건…….”

엘리사는 잠시 기억을 되짚는 척 뜸을 들이다가, 천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데 꼭 그 보육원을 후원하셔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제국의 보육원 어디든, 황태자비 전하의 후원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엘리사의 과장된 천진한 표정에, 로제는 그녀가 일부러 아이를 숨기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엘리사가 리온을 만난 그날, 로제가 푼 용병들은 리온의 주위를 맴돌며 아이를 조용히 처리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사가 리온을 데리고 마차에 타 버린 것이다. 용병들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뒤를 미행했다.

하지만 중간에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는 이곳저곳 들르며 그들의 미행을 교란했다.

그 탓에 결국 그들의 미행은 실패로 돌아갔다.

‘능구렁이 같은 계집애. 눈치챘구나.’

로제는 혹시나 엘리사가 미행을 따돌린 것이 우연이길 바라며 은근슬쩍 그녀를 떠본 것이었으나, 엘리사는 방금 전 로제의 언급으로 미행의 배후를 알아채 버렸다.

더 이상 속내를 숨길 필요가 없어진 로제는 언제 웃고 있었냐는 듯 표독스러운 표정을 드러내며 으름장을 놓았다.

“시치미 떼지 말고 말해. 그 아이 어디에 숨겼어?”

속내를 들킨 로제는 체통도 버리고 대뜸 말을 놓았다.

하지만 그런 로제의 앞에서도 엘리 사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 해사하게 웃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그 아이가 누군지 모르겠네요. 특별히 찾으시는 아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이 건방진 계집애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건방을 떨어? 내가 폐하께 가서 네가 한 짓을 고하면……!”

“폐하께 무엇을 고하시려고요? 제가 부모 잃은 아이를 거두어 안전한 곳에 인도한 것이 폐하께서 노하실 일인가요?”

엘리사의 물음에 로제는 말문이 막 혔다.

엘리사는 미행한 사람이 자신이 보낸 용병들인 것은 알아도, 리온의 정체는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제의 착각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듯 엘리사가 이어 말했다.

“아니면, 루벨린 공작 부인이 감히 황손을 숨기려 한다고 고하실 건가요?”

엘리사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원작을 몰랐더라도 황실과 루벨린의 관계와 자신의 임신 소식, 그리고 광장을 돌아다니던 황궁의 기사들과 뜬금없이 아이들이 머무는 보육원에 관심을 보이는 로제의 행동에 연관성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추론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로제는 차마 계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너, 다 알면서……!”

“그럼 지금 당장 폐하께 가서 루벨린 공작가에서 황손을 전부 죽이려 한다고 거짓으로 고하세요.”

“하라면 못할 줄 알아?”

“그런데 폐하께 말씀드리면 뭐라고 하실까요?”

“뭐?”

“증거가 없는 건 둘째 치고, 루벨린 공작이 황손을 죽이려 한다는 걸 전하께서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물으시지 않을까요?”

황손을 찾고 있는 황궁의 기사들도 눈치채지 못한 것을, 황궁에만 있는 로제가 알고 있는 건 이상했다.

아이들 하나하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게 아니고서야.

황제의 앞에서 엘리사를 모함하면, 결국 스스로 저가 저지른 일을 밝히게 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고작 시골 촌뜨기 자작가의 계집주제에, 네 남편을 등에 업으니 너도 태생부터 존귀한 귀족이라도 된 것 같니? 감히 네까짓 게 나를 우롱해?”

로제는 악에 받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쥔 채 파들파들 떨었다.

무심한 얼굴로 그녀의 마지막 발악을 듣던 엘리사는 더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독기 어린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로제를 향해 가지고 온 계약서를 팔랑거렸다.

그것을 본 로제의 눈이 커졌다.

“그, 그걸 어떻게 네가……?”

계약서에 로제의 최측근인 시녀의자필 서명이 되어 있었다. 엘리사가 알아본 바로는 그 시녀는 얼마 전황태자비궁에서 나와 고향으로 갔다고 했다.

그 계약서는 로제가 임무를 성공한 용병들에게 계약금을 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시녀라면, 그것도 최측근이라면 꽤 이름 있는 귀족 가문의 귀족 영애이니 길드 측에서도 믿고 차명할 만했다.

그 계약서는 본디 길드 마스터의 수중에 있던 것이지만, 리하르트가 두 배의 금액을 보상으로 주고 받아왔다.

저것을 황제에게 보여 준다면, 부정 못 할 증거가 될 터였다.

엘리사는 사색이 되어 얼어 있는 로제를 향해 몸을 살짝 굽히고 조곤 조곤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죄 없는 아이들, 건드리지 마.”

아이들을 건드리면 언제든 황제에게 이 계약에 대해 보고할 수 있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아이들 일만 아니면 이 계약서가 황제의 손에 들어가는 일은 평생 없을 테니까.”

엘리사는 악에 받쳐 파들파들 떠는 로제를 물끄러미 보다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전하. 언제든 저와 의견을 나누시고 싶으시면 불러 주세요.”

처음 이 접견실에 들어왔을 때, 로제를 향해 환하게 웃던 그 모습 그대로, 엘리사는 로제를 뒤로한 채 유유히 접견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던 로제는 문이 닫힘과 동시에 제 분에 못 이겨 옆에 있던 쿠션을 집어 던졌다.

“아악!”

악에 받친 로제의 목소리가 고요한 접견실에 울려 퍼졌다.

*

오늘은 신전에 리온을 만나러 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그래서 엘리사는 아침부터 몹시 분주했다.

리온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빵과 쿠키를 바리바리 싸 들고 마차에 타려 는데, 리하르트가 엘리사를 붙잡았다.

“나도 같이 가, 엘리사.”

“신전에?”

“그 녀석, 나도 한번 봐야겠어.”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말하는 ‘그녀석’이 리온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리하르트도 리온이랑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어쩌면 리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한 엘리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넘어질세라 그녀를 조심조심 안아 들고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엘리사의 등과 허리에 쿠션을 잔뜩 끼웠다.

덕분에 엘리사는 마차의 진동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편한 자세로 앉아 있을 수도 있었다.

‘우리 남편, 점점 아빠다워지고 있네.’

엘리사는 저와 배 속의 아이를 배려해 주는 그의 모습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엘리사를 편하게 앉힌 리하르트가 물었다.

“그 녀석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 하다니?”

“지금이야 아직 어리고 뭘 모르니 괜찮지만, 조금 더 자라면 그 녀석도 알게 될 거야. 자신이 남들과 다른 힘을 가졌다는 거.”

엘리사는 그제야 그 질문의 뜻을 깨달았다.

저 역시 앞으로 리온을 어떻게 키울지 생각해 봤다.

하지만 아이의 미래에 정답이라는 건 없었다. 그 답을 자신이 정할 수도 없었다.

“리온이 스스로에 대해 알게 되면 그때 다시 물어보려고 해. 너는 어떻게 살고 싶으냐고.”

황제가 되어 제국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고, 힘을 숨긴 채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하면 그 또한 그럴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가문의 힘에 얽매여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불행하지 않나.

엘리사는 그 힘 때문에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했던 리하르트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날이 올 때까지는, 그냥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게 도와줄래.”

그 아이가 갈 수 있는 수많은 길을 보여 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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