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66화 (66/164)

66화

이윽고 마차가 신전 앞에 도착했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와 함께 신전으로 들어섰다.

때마침 지나가던 신관이 엘리사를 알아보고 반색을 띠며 다가왔다.

“또 찾아 주셨군요, 공작 부인.”

“안녕하세요, 실리카 신관님.”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아. 공작 각하세요.”

그 말에 리하르트를 알아본 신관은 엘리사를 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긴장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각하.”

“처음 뵙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나자, 엘리사가 물었다.

“혹시 리온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그 아이는 아마 동쪽 예배당에 있을 겁니다.”

“성하께서는요?”

“성하께선 서쪽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다.”

그때, 신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엘리사를 향해 도도도 뛰어왔다.

리하르트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붙잡았다.

금발 머리에 타오르는 태양처럼 반짝이는 적금안을 가진, 볼살이 통통한 어린아이.

엘리사는 아이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리온?”

“누나!”

리하르트는 아이를 의아한 눈으로 살폈다.

엘리사는 분명 리온이 크리스티안과 같은 적발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눈앞의 아이는 금발이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에게 물었다.

“적발이라고 하지 않았어?”

“아, 이건 가발이야. 누가 의심할까봐 성하께서 먼 친척 아이라고 일러두셨대.”

엘리사는 리하르트에게 귓속말로 속삭이고는, 리온의 조그마한 손을 붙잡았다.

“리온, 잘 지냈어? 말썽 피우진 않았지?”

“웅!”

엘리사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리온에게 리하르트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리온을 위해 싸 온 빵과 쿠키였다.

그것을 본 리온이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 리온의 모습을 빙긋 웃으며 바라보던 엘리사가 신관에게 말했다.

“그럼 저는 서쪽 예배당으로 가 볼게요, 신관님.”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아뇨, 이제 신전 지리는 다 외웠는걸요. 바쁘실 테니 괘념치 마세요.”

실리카 신관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서쪽 예배당 쪽으로 가려던 엘리사는 아차 싶어 제 뒤를 따라오는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리하르트, 넌 리온이랑 같이 휴게 실로 가 있어.”

“……난 같이 안 가고?”

“넌 리온을 만나고 싶어서 온 거잖아? 나는 성하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분명 엘리사에게 그렇게 핑계를 대며 그녀를 따라오긴 했었다.

결국 리하르트는 서쪽 예배당으로 향하는 엘리사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무언가가 바지 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리온이었다.

“리온이 방에 데려다주께.”

리하르트는 의외라는 듯 눈앞의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통 네댓 살 된 아이들은 리하르트를 보면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며 피하곤 했다. 그런데 눈앞의 이 녀석은 겁도 없이 제게 말을 거는 것이 신기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가는 게 빠를 것 같았지만, 리하르트는 순순히 리온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작은 발로 총총 걸어가는 아이의 보폭에 맞추는 건 꽤 답답한 일이었다.

리하르트는 결국 아이를 안아 들었다.

길 찾기에 열중이던 아이는 그제야 리하르트에게 물었다.

“아조씨는 누나랑 친구야?”

그 말에 리하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엘리사한텐 누나라더니.’

그러나 리온의 아빠인 크리스티안과 자신이 비슷한 연배인 것을 생각하면 아저씨라는 호칭이 맞긴 했다.

그보다 거슬리는 건, 엘리사와 자신의 사이를 ‘친구’라고 지칭한다는 점이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와의 사이를 정정했다.

“아니. 부부야.”

“부부가 모야?”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뜻이지.”

“그럼 아조씨는 누나랑 겨론해써?”

“그래. 엘리사는 나랑 결혼했어.”

“리온도 누나랑 겨론하 꼬야.”

얼씨구. 조그마한 게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리하르트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리사는 나랑 결혼했으니까 너랑은 결혼 못 해. 결혼은 한 사람이랑만 하는 거니까.”

그의 말에 리온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더니 이내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니야! 나랑도 할 수 이써! 아조씨 나빠!”

결국 리온이 와앙 울음을 터트렸다.

귓가에 쩌렁쩌렁 울리는 울음소리에 리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애들은 시끄럽군.’

막상 아이를 울리고 나자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문득 제 안주머니에 있는 과일 맛 사탕을 떠올리고는 꺼내 아이에게 내밀었다.

엘리사가 한창 입덧을 할 때 습관처럼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그만 울고 이거 먹어. 사탕 좋아하지, 꼬맹이?”

“사탕…?”

예상대로 리온은 사탕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사탕 껍질은 까지 못했다.

그것을 본 리하르트는 아이를 안지 않은 손으로 손쉽게 사탕을 까 주었다.

리온은 리하르트가 건네는 사탕을 받아 제 입에 넣었다. 달콤한 포도 맛이 퍼졌다.

“마시다!”

아이는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히죽 웃었다.

‘단순하긴.’

리하르트는 그런 리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가 어른이 되면 또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다.”

물론 엘리사보다는 아니겠지만.

리온의 안내를 받으며 휴게실에 도착한 리하르트는 아이를 내려 주었다.

그러자 리온은 벽난로 쪽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리하르트는 무심한 눈으로 아이를 지켜보다가 흠칫 놀랐다.

아이의 손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그에 놀란 리하르트는 성큼 다가가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불장난하면 성하께 혼날 텐데.”

“아니야! 누나 따뜻하게 해 주려고 하눈 고야. 성하는 리온이 잘한다고 칭찬해 조써.”

리하르트는 그제야 리온이 벽난로에 불을 지피려고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가문의 힘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만, 자신의 힘을 모르는 사람은 그 힘을 다룰 수 없었다.

가문의 힘이 처음으로 발현되는 경우는 보통 가문에서 자신의 힘을 알고 배우며 자라, 스스로 힘을 구현할 수 있게 되는 경우였다.

하지만 드물게 다른 경우가 있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때, 혹은 그에 버금가는 간절함을 느꼈을 때 힘이 발현되며 자신의 힘을 알게 되는 경우였다.

리하르트는 알버트가 자신을 죽이려 보낸 자객들에게 쫓기다 자신의 힘을 알게 되었다.

리온 역시 사생아로 태어나 자신의 힘을 모르고 자랐을 테니, 절박한 순간에 힘이 발현된 것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엘리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아이를 보니까 네가 생각나서 외면할 수가 없었어.’

이제 초여름에 접어들어 벽난로의 열기는 필요하지 않았지만, 작은 불꽃을 꺼트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 불붙이기에 열중인 리온의 손주위로 약한 바람이 모여들었다.

그 바람은 작은 불꽃이 장작에 잘옮겨붙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윽고, 장작에 불씨가 옮겨붙었다.

그것을 본 아이가 박수를 치며 웃었다.

“아조씨, 이거 바! 리온이 불부쳐 써!”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

*

엘리사가 서쪽 예배당으로 들어섰을 때, 막 예배가 끝난 것인지 에이 든만이 남아 있었다.

에이든은 홀로 예배당 중앙에 서서 여신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사는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 인기척을 눈치챈 듯,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이 자리를 빌려 공작 부인께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에이든은 항상 그랬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신을 모시나, 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 말에 엘리사는 흠칫 놀랐다.

무신론자인 사람에겐 당연한 말이었으나, 모든 제국민을 대표해 신을 모시고 있는 교황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신의 권위를 이용해 제가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만을 지키고 있을 뿐이지요. 불경하게도.”

율리아가 죽은 그날부터, 그는 신을 저버렸다.

그의 신은 눈앞의 여신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였다. 그의 정의는 그녀가 생전에 남긴 말들이었다.

“그런 제 이기심이 부인의 호의보다 낫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에이든은 여신상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려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제가 잃은 순수함을 부인에게서 찾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기대하지 않았다.

속내가 보이는 그들의 호의는 곧장 거절했고, 다시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 아이에겐 그런 순수함을 기대했을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녀에겐 자신이 가지지 못한 힘이 있었다.

자신의 빛을 잃지 않으면서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지켜 줄 수 있는 힘이.

그 힘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저를, 신전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엘리사는 에이든의 말에 놀라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엘리사의 환한 미소에, 마침내 에이든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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