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신전의 일을 해결하고 공작저로 돌아온 엘리사는 목욕을 마치고 작전을 개시했다.
엘리사는 시중드는 하녀들을 모두 내보낸 후, 욕실 한쪽에 준비해 두었던 옷을 꺼냈다.
‘휴, 드디어 이걸 입는구나.’
엘리사가 꺼낸 옷은 어깨가 얇은 끈으로 된 슬립이었다.
크고 편한 잠옷들과 달리, 슬립은 찰싹 달라붙어 몸의 굴곡을 완연히 드러내는 디자인이었다.
게다가 원단이 얇아 언뜻언뜻 실루엣과 피부색까지 비쳤다.
‘아네스 부티크의 이번 여름 야심작! 뜨거운 여름밤을 약속한다는 바로 그 잠옷!’
오늘 이걸 사려고 며칠 전, 직접 부티크까지 간 것이었다.
다른 옷들은 공작저로 불러 제품을 구매하면 되지만, 이 잠옷은 하녀들 앞에서 당당하게 구매하기가 민망했으니까.
그런데 입고 보니 문제가 있었다.
‘으음, 배가 너무 부각되는 거 같은데.’
드레스를 입었을 때는 아직 크게 티 나지 않았지만, 얇은 슬립을 입자 일주일 사이에 부쩍 나온 배가 도드라져 보였다.
생각했던 요염한 느낌이 안 살았다.
‘아내의 배가 나오면 남편들도 마음이 식는다던데……. 리하르트도 그럴까?’
엘리사는 언젠가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찌 됐든 이제 와 돌이킬순 없었다.
엘리사는 슬립 위에 베드 가운을 걸치고 침실로 왔다. 그러나 선뜻 방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막상 이런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설생각을 하니, 알버트가 억지로 합방을 시켰던 그때보다 더 긴장되었다.
엘리사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 잡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리하르트는 내 남편이고, 이건 부부 사이의 자연스러운 일이야.”
몇 차례 심호흡을 한 후,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쭈뼛쭈뼛 방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 위에 놓인 발광석의 은은한 빛이 방을 밝히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늘 그랬듯이 소파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며 엘리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 그의 가운 사이로 언뜻 보이는 완만한 가슴 근육에 선명한 음영이 드리워 있었다.
엘리사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엘리사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리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사에게 다가왔다.
“침대로 갈까.”
“자, 잠시만. 이것 좀 벗고……”
엘리사는 저를 부축하려는 그에게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베드 가운을 벗었다. 안에 입은 얇은 슬립 차림이 드러났다.
그러자 무심코 엘리사를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새로 산 옷이야?”
“으응. 별로야……?”
머뭇거리며 그의 반응을 살피는 엘리사의 모습에 리하르트는 흠칫했다.
얼마 전, 그녀의 옷이 별로라며 거짓말을 했다가 그녀를 울렸던 기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서럽게 울던 엘리사의 모습만 떠올리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세상 제일 몹쓸 놈이 된 것 같은 죄책감도 들었었다.
두 번 다시는 저 눈에서 서러운 눈물을 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의 선이 다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엘리사의 모습이 진심으로 예뻤다.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말해 버릴만큼.
“아니, 예뻐. 잘 어울려.”
바라던 말을 들었지만, 엘리사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옆구리 찔러 절 받기잖아.’
그런 엘리사의 마음을 모르는 리하르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예쁜데, 옷이 좀…… 얇은 거 같아서.”
“이제 여름이니까 더워서 샀어.”
엘리사는 슬립을 산 진짜 목적을 숨긴 채 그럴싸한 변명을 둘러댔다.
절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벗은 가운을 다시 그녀의 어깨에 도로 걸쳐 주었다.
“그래도 아직은 밤에 쌀쌀하니까.”
엘리사는 답답해서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말을 또 그대로 믿냐, 이 바보야!’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이쯤 되면 하네스를 가진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엘리사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다.
작전은 이대로 끝이 아니었다.
엘리사는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리하르트는 매일 밤 잠들기 전, 그녀의 배를 크림으로 마사지해 주고 아기와 태담을 나누곤 했다.
이제 아기와의 이야기를 나눌 차례였다.
엘리사는 제 배에 조심조심 크림을 펴 바르는 리하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어설프게나마 그를 유혹해 볼 심산이었다.
‘나를 봐. 나를 보라고!’
그렇게 그에게 마음의 신호를 보내고 있던 그때, 그 신호를 들은 것인지 리하르트가 시선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은은한 발광석의 빛을 머금은 붉은색 눈동자가 몹시도 유혹적으로 반짝였다.
“리하르 -”
하지만 엘리사가 그를 부르려는 순간, 리하르트가 곧장 다시 시선을 내려 그녀의 배를 바라보았다.
“며칠 새 배가 좀 나온 거 같아.”
그러고는 다시 그녀의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배 속의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맛있는 거 많이 먹었냐는 둥, 엄마랑 잘 있었냐는 둥.
엘리사는 그런 리하르트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이 눈치 없는 바보 멍청아!’
평소 같으면 커다란 손으로 조심조심 배를 문지르는 그의 모습을 몽글몽글한 마음으로 바라보았겠지만, 오늘의 엘리사는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좀 더 직접적으로 신호를 보내 볼까.’
엘리사는 오늘 낮, 자신이 읽었던 임신 관련 서적을 가져왔다.
밤마다 그가 읽어 주는 태교 동화를 듣거나, 혹은 임신 관련 서적을 같이 읽으며 아이에 대해 공부했었기에 리하르트는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오늘 자신이 읽었던 부분을 슬쩍 펼쳐 그의 손에 얹어 놓았다.
[대부분의 여성은 임신 이후 성욕이 떨어지지만 간혹 없던 성욕이 치솟기도 한다. 이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성욕이 있던 사람을 성욕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고, 그 반대로 작용하기도 한다.
“남자들도 아내가 배가 나오면 마음이 식는 사람들이 많대. 그래서 이 부분이 안 맞으면 힘들다고 하던데…….”
그렇다던데, 넌 어떠냐.
엘리사는 넌지시 말하며 그를 떠보았다.
하지만 그 말에 대한 리하르트의 반응은…….
“그래?”
………그게 전부였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한 리하르트의 태도에, 엘리사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채 책을 덮었다.
“…나 이제 잘래. 피곤해.”
그러고는 혼자 먼저 침대에 누웠다.
잠시 후, 제 속도 모르는 얄미운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잘 자.”
그를 향한 야속한 마음이 꽁하게 응어리져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으나, 피곤했던 탓인지 잠이 쏟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사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등지고 누워 있던 엘리사는 자세가 불편했던지, 다시 그를 보고 돌아누웠다.
세상모르게 잠든 엘리사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입에서 참았던 괴로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넌 뭘 믿고 이렇게 예뻐서.”
사실, 슬립 차림의 그녀를 본 순간부터 참기 힘든 열망에 사로잡혔다.
평소에도 늘 느끼고 있었으나, 애써 외면해 왔던 충동적인 감정에.
무방비한 불그스름한 입술을 씹어 삼키고, 밤새 그녀의 새하얀 피부에 제 흔적을 온통 남기고 싶은 위험한 열망이 그를 충동질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죄책감이 들었다.
제 아이를 임신하고 힘들어하는 그녀를 탐하고픈 제 모습이 꼭 짐승같았다.
그래서 매일 밤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숨겨 왔다. 오늘 밤도 마찬가지였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보드라운 우윳빛 뺨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이 모습을 보고 어떻게 마음이 식지?’
임신한 아내를 보면 마음이 식는다는 남자들의 이야기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저 역시 그녀가 걱정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를 볼 때마다 감정이 차올라서 괴로웠다.
오히려 제 아이를 품고 있는 그녀를 볼 때면, 그녀가 정말 자신의 아내가 되었다는 묘한 고양감이 들어 더욱 열망이 커졌다.
그녀를 울리고 싶고,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온전히 제 것이란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위험한 열망이 저를 흔들 때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배에 손을 얹으며 되새겼다.
그녀의 배 속에 자신과 그녀의 아이가 자라고 있으며, 자신이 그녀를 지켜 줘야 한다는 것을.
“으응…….”
그러나 그의 속을 알 리 없는 엘리사는 따뜻한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부드러운 살결을 맞대어 왔다.
그런 엘리사의 행동에 리하르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아.”
괴로운 탄식을 내뱉으며 엘리사를 안고 있던 리하르트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욕실로 향했다.
*
아직 어스름이 남아 있는 새벽, 엘리사는 문득 잠에서 깼다.
시야가 흐릿하던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아직 잠들어 있는 리하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살짝 흐트러진 머리칼을 제외하면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아름다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역시 아침 태교에 좋은 얼굴…….’
그 얼굴을 보자, 지난밤 그에게 느꼈던 야속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의 얼굴을 감상하던 엘리사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비현실적이던 그 얼굴을 직접 만지니 그제야 조금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그의 뺨을 어루만지던 엘리 사의 손이 그의 입술을 스쳤다. 그러자 그 말캉한 입술이 움찔거렸다.
‘헉.’
화들짝 놀란 엘리사가 다급히 손을 떼려던 그때, 커다란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감겨 있던 리하르트의 눈이 떠지며 선연한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