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아….”
열기를 품은 듯 거세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 눈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배 속에 아이가 생기던 그날 밤, 꼭 지금과 같은 눈을 봤었다.
그 기억과 현재의 상황이 겹쳐지자, 그녀의 심장이 쿵쿵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그에게 잡힌 손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비틀었다.
“리하르 -”
그 순간,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더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끌어당겼다.
눈 깜짝할 틈도 없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놀라 커다래진 눈을 깜빡이던 엘리 사는 이윽고 그를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응?’
분명 입술이 닿았는데, 특유의 말캉한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엘리사는 의아해하며 눈을 떴다.
그러자 아직 잠들어 있는 리하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꿈이었다.
“여…”
허탈함에 탄식을 흘리는 엘리사의 눈에,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자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갑자기 왜 이렇게 얄미워 보일까.
‘남편 있어 봤자 쓸모가 없어! 아기만 소중하지? 네 아내는 몸이 달아 죽을 거 같은데!’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에 울컥 설움이 북받쳤다.
그런 엘리사의 속을 모르는 리하르트는 잠결에 엘리사를 품에 안으려 했다.
엘리사는 저를 끌어안으려는 리하르트의 팔을 있는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 때렸다.
하지만 제 주먹이 더 아팠다. 어쩐지 더욱 서러워졌다.
그 충격을 느낀 리하르트가 눈을 떴다.
“엘리사?”
“너 진짜 싫어.”
엘리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그에게 쏘아붙이고는, 그를 휙 등지고 누웠다.
‘잘 자다가 갑자기 왜?’
자다가 난데없이 얻어맞은 리하르트는 황망한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돌아누운 엘리사에게선 아무런 답도 들을 수 없었다.
*
‘도대체 왜………?’
이른 아침부터 점심때가 지난 지금까지 리하르트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의문이었다.
리하르트는 케이크를 먹고 있는 엘리사의 옆에 얌전히 앉아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너 진짜 싫어.’
갑자기 엘리사로부터 원인 모를 미움을 받게 된 리하르트는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처음엔 혼자서 생각해 봤다.
도대체 자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잘 못했을까. 무엇이 그녀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히 짚이는 부분이 없었다.
그다음엔 그녀에게 물어봤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엘리사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그렇게 대꾸하는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쌀쌀맞았다.
평소처럼 제게 웃어 주지도 않고, 시선조차 은근슬쩍 피하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뭘까.
고민하고 있던 그때, 엘리사가 먹고 있던 케이크의 마지막 조각이 그녀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리하르트의 몫으로 놓인 케이크 조각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리하르트는 애초에 그녀의 몫이었던 것처럼 제 몫의 케이크를 그녀의 앞에 밀어 주었다.
엘리사는 그제야 리하르트를 슬쩍 쳐다보고는,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엘리사.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 주면 안 될까.”
저는 이대로 그녀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무시당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동안 그녀의 마음에 그 응어리가 계속 남아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사는 아직 이야기해 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 왜 자꾸 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엘리사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목소리도 뾰족해졌다.
그것을 눈치챈 리하르트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입을 닫았다. 그녀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되었다.
‘저 바보.’
저도 모르게 까칠하게 대꾸하고 미안해진 엘리사는 케이크 조각을 먹기 좋게 잘라 그에게 내밀었다.
케이크 속에 숨긴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러자 리하르트가 의아한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조금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먹으면 맛없으니까 너도 먹어.”
리하르트는 군말 없이 그녀가 건네는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그 과정에서 작은 케이크 부스러기가 그의 입가에 묻었다.
그것을 본 엘리사는 무심코 그의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가, 입술을 핥으려던 그의 혀를 건드렸다.
그 뜨겁고 말캉한 감촉에 엘리사는 흠칫 놀라 손을 뗐다.
그 순간,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동자에 일순간 열기가 일었다.
‘아…….’
그 눈을 마주함과 동시에 엘리사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때였다.
“마님, 세틸 경이 오셨습니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검진을 하는 날이었다.
주치의의 방문에 두 사람 사이의미묘한 기류는 금세 사라졌다.
“들어와요.”
엘리사는 침대에 편하게 기대어 앉아 진찰을 받았다. 그 곁을 리하르트가 지켰다.
“한 주 사이에 배가 제법 나오셨네요.”
주치의는 엘리사의 배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짚었다.
엘리사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간 별다른 이상 증상을 느끼지 못했어도, 혹시라도 아기가 잘못되진 않았을까 걱정은 되었다.
그런 엘리사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듯 리하르트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잠시 후, 진찰을 마친 주치의가 미소 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기님의 심장이 아주 거세게 뛰고 있군요. 건강하게 자라고 계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혹시 태동은 느끼셨나요?”
“아니요, 아직.”
“이 시기쯤 되면 아주 예민하신 분들은 태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아직 태동을 느끼기엔 많이 이른 시기이니 걱정하실 것은 없고요.”
‘태동’이란 말에 엘리사는 눈을 깜빡였다.
서서히 배가 불러 오고는 있지만, 아직 실감 나지 않는 아이의 존재가 이제야 몸소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마 한 달 안으로 태동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처음엔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라서, 각하께서 느끼시려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고요.”
“…….”
“그동안 많이 말을 걸어 주세요.
혹시 태동을 느끼게 되시면 적극적으로 반응해 주시고요.”
엘리사는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치의는 임신 중기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은 임신 기간 중 가장 안정적인 시기이니,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하셔도 됩니다.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드시고, 근교에 소풍을 다녀오셔도 좋고요.”
“아하, 네.”
“그리고 부부 관계도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는 하셔도 됩니다. 마님께서 행복하게 지내시면 아기님께도 좋은 영향이 갈 테니까요.”
엘리사는 주치의의 이야기에 솔깃했으나, 제 옆에 있는 리하르트를 보고는 이내 시큰둥해졌다.
‘말해 주면 뭐 해. 얘 목석인데.’
그러면서도 그에게 잡힌 손은 빼지 않았다.
*
그날 밤, 엘리사는 평소 입던 잠옷을 입고 침실로 들어섰다.
어차피 효과도 없고 민망함만 안겨주는 옷을 더 입을 필요는 없었다.
리하르트는 언제나 그랬듯 엘리사의 배에 마사지 크림을 발라 주기 위해 그녀를 침대에 기대어 앉혔다.
그리고 크림을 펴 바르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를 어루만졌다. 세상 가장 소중한 것을 만지는 듯한 손길이었다.
‘간지러워.’
엘리사는 그 손길이 조금 간지럽긴해도 좋았다.
피부로 전해지는 그의 온기도, 부드럽게 제 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도, 대충하고 끝낼 수도 있는 일에 열중하는 그의 모습도.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리하르트가 전쟁에서 돌아온 직후, 매사에 무심한 그를 보며 언제나 그가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복해지길 바랐었다. 그의 아이를 가지고 달아나던 그 순간에도.
하지만 결국 그에게 그 평범한 행복’을 가져다준 사람은 저였다.
아기에게 열중하는 그의 모습을 볼때마다 새삼 그 사실이 실감 나 뿌듯했다.
“잘 자렴, 아가.”
태담을 마친 리하르트가 엘리사의 배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에 엘리사는 움찔 몸을 떨었다.
촉촉하고 뜨거운 입술이 맨피부에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에, 어쩐지 배안쪽이 뜨거워졌다.
덩달아 배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그의 손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졌다. 심장도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배 속의 아기에게 밤 인사를 한 리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엘리사의 시선은 그의 불그스름한 입술로 향해 있었다.
“그럼 이제 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리사가 그의 뺨을 감싸 쥐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무방비한 상태의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
예상치 못한 엘리사의 입맞춤에, 리하르트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엘리사는 어설프게 입술을 맞대었다가 천천히 떼어 내고 그를 바라보았다.
“………리하르트.”
탄식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이 마주친 순간, 얼어 있던 붉은 눈동자에 열기가 어렸다.
금방이라도 저를 집어삼킬 듯한 맹수의 눈빛이었다.
심장이 쿵, 쿵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흠칫 놀란 엘리사가 피할 틈도 없이, 리하르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 쥐며 그녀의 퇴로를 차단했다.
그에게 잡힌 엘리사는 속절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발광석의 빛을 머금은 붉은 눈동자도, 뺨을 감싸 쥔 그의 손도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온 얼굴이 불에 달궈지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도망가지 마.”
“…….”
“먼저 시작한 건 너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가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