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는 이 내 눈을 감고 그를 받아들였다.
뜨겁고 촉촉한 입술이 부드럽게, 그러나 집요하게 숨을 얽어 온다.
그의 숨결이 너무도 달콤해서,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모든 감각이 마치 꿈결처럼 느껴졌다.
리하르트는 입술을 맞댄 채로 엘리 사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 아찔한 감촉에 엘리사가 숨을 멈추며 흠칫 몸을 떨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배가 그에게 닿았다.
그 순간,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의 배 속에 자라고 있는 두 사람의 소중한 아이가.
리하르트는 임신 기간에 남편과의 가벼운 접촉조차 극도로 꺼리는 사람도 있다던 책의 내용을 떠올리고는, 그녀에게서 입술을 뗐다.
“…리하르트?”
엘리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촉촉하게 젖어 든 눈가와 잔뜩 흐트러진 얼굴을 보니 곧장 다시 그녀를 탐하고 싶은 욕망이 그를 충동질했다.
하지만 한순간의 욕망에 끌려 그녀를 안을 순 없었다. 그건 한 번으로 족했다.
리하르트는 가까스로 제 욕망을 억누르며 말했다.
“네가 싫으면……… 그만할게.”
엘리사는 그의 의중을 몰라 눈만 깜빡거렸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제 눈가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가락이 가히 유혹적이었다. 모순이었다.
제 몸에 차오른 이 열기를 달래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엘리사는 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하고 싶어.”
절박한 엘리사의 목소리에 리하르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엘리사는 그의 반응을 보고서야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닫고 얼굴을 붉혔지만,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잠깐이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하니, 전날은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이 술술 나왔다.
“요즘…… 어제 봤던 그 책 내용처럼 막 이상한 꿈도 자꾸 꾸고 괴로워.”
자신의 솔직한 말에 부끄러워진 엘리사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를 덧붙였다.
“그리고 아기의 발달에도 좋다고 하니까…….”
그녀의 말에 리하르트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그러나 부끄러움에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 엘리사는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아아, 그래? 그럼 하루로는 안 되겠네.”
거칠게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어 헤치는 그의 눈엔 여전히 열기가 어려 있었으나, 중얼거리듯 대꾸하는 목소리는 묘하게 서늘했다.
그에 엘리사가 의문을 품으려던 찰나, 리하르트가 입술을 겹쳐 왔다.
이윽고 그의 상의가 침대 밖으로 떨어졌다.
곧이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엘리사를 집어삼켰다.
*
리하르트는 제 품 안에서 뒤척거리는 엘리사의 움직임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어느덧 방 안에 아침 햇살이 성큼 들어와 있었으나, 엘리사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리하르트는 속 편히 잠든 엘리사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요즘……… 어제 봤던 그 책 내용처럼 막 이상한 꿈도 자꾸 꾸고 괴로워’
‘……,’
‘그리고 아기의 발달에도 좋다고 하니까…..’
뭐만 하면 아기, 아기.
제게서 달아나려 한 이유도 아기 때문이었고, 입덧으로 고생할 때도 아기는 건강하니 괜찮다며 웃었다.
가끔 두통이 심할 때도 약을 먹으면 아기에게 안 좋을 거라며 끙끙앓기만 했다.
그리고 어제도.
그녀가 자신을 원하는 건 결국 임신 호르몬 때문이었다.
그녀를 품에 안은 제 몸은 본능에 충실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공허해졌다.
그녀가 자신이 아니라, 제 몸만 원한다는 걸 알기에.
‘넌 언제쯤 나를 아기 아빠가 아니라 사랑하는 남자로 봐 줄까.’
이젠 덜컥 생겨 버린 아이에게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다 아직 존재감조차 미미할 정도로 조그마한 아이에게 질투하는 제 모습에 자조했다.
‘누굴 탓해. 내 탓이지…….’
그때, 엘리사가 뒤척거리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온기가 맞닿자, 본능이 꿈틀거렸다.
리하르트는 고통스러운 한숨을 삼켰다.
그동안 제 욕망을 꾹꾹 억눌렀던건 엘리사에게 제 욕망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녀와 배 속의 아기를 위해서였다.
한 번 시작하면, 터져 버린 제 욕망을 멈출 수 없을 것을 알았으니까.
그 욕심이 약한 그녀와 아기를 다치게 할까 봐 겁났으니까.
어제는 그녀의 유혹에 못 이겨 넘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가까스로 한번에서 멈췄다.
욕망이 채워지긴커녕, 제 욕심의 반의반도 못 채우니 오히려 괴로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와 스치듯 접촉할 때마다 인내심을 끌어모아야 했다.
그런 제 속도 모른 채 곤히 잠들어 있는 말간 얼굴이 얄미웠다.
그때였다.
“으응…”
긴 속눈썹을 드리운 엘리사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더니, 이내 눈을 떴다.
아침 햇살을 머금어 반짝이는 연둣빛 싱그러운 눈동자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엘리사는 아직 덜 가신 잠기운을 덜어 내듯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쳐다보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이불 밑으로 숨어 들었다.
그러면서도 눈만은 이불 밖으로 빼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보며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당겨 내렸다.
지난밤, 대뜸 제 입술을 훔쳐 간게 누군데 이제 와 부끄러워하는지.
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보다 더 우스운 건…….
“잘 잤어, 리하르트?”
눈꼬리를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배시시 웃는 그녀의 미소에, 언제 그랬냐는 듯 흐물흐물 풀어지는 제 모습이었다.
야속한 마음은 태양 앞의 눈처럼 녹아내렸다. 그 자리에 다시 그녀를 향한 감정이 차올랐다.
‘내가 널 어떻게 이겨.’
네가 몇 번이고 상처 준대도, 나는 다시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텐데.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주며 물었다.
“응. 너는?”
“나도 잘 잤어.”
“몸은 어때? 배가 당기거나 하진 않아?”
오늘도 어김없이 잘난 그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던 엘리사는 그제야 제 몸을 살폈다.
근육통으로 온몸이 뻐근하긴 하지만, 배가 불편하진 않았다.
“응, 괜찮아.”
그렇게 대답함과 동시에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민망한 정적 속에서 엘리사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배고픈 거 빼고.”
그에 리하르트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설렁줄을 두 번 당겼다. 식사를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그의 웃음에 민망해진 엘리사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쭉거렸다.
“우리 아기가 배고픈 거야.”
“그래. 네가 아니라 이 녀석이 배고픈 거지.”
리하르트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하며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
제 배 위에 얹은 그의 큰 손을 만지작거리던 엘리사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그를 돌아보았다.
“리하르트, 우리 아기 태명 지어주는 게 어때?”
“태명?”
“배 속에 있을 때만 부르는 아기 이름을 말하는 거야. 건강하게 태어 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넌 뭐라고 짓고 싶은데?”
“으음……”
엘리사는 고운 미간을 찡그리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리하르트를 슬쩍 쳐다보고, 제 배 위에 얹힌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배를 보호하듯 덮은 그의 커다란 손이 따뜻하고 듬직했다.
거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와 자신을 지켜 줄 것 같은 단단한 손이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세상 가장 안전한 곳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원작의 리하르트는 배 속의 아이를 끔찍이 싫어하며 아이가 죽길 바랐었다. 심지어는 저 손으로 아이를 죽이려고 했었다.
지금의 리하르트는 원작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도, 그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엘리사는 그의 손을 꼭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사랑이라고 지으면 좋겠어.”
원작이랑은 다르게, 엄마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건강하게 행복하게 자랐으면 좋겠어.
“사랑이?”
“이름만큼 많이 사랑받고 건강하게 태어나란 의미야. 어때?”
“좋은 것 같아. 그렇게 하자.”
리하르트는 흔쾌히 그러마고 대답했다.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님, 각하. 식사를 가져왔어요.”
방으로 들어온 앤과 하녀들은 테이블에 가져온 음식들을 세팅하고 나갔다.
테이블에 다양한 음식들이 가득 차 려져 있었다.
평소엔 아침을 간소하게 먹는 편이었지만, 엘리사의 입덧 증상이 완화된 직후 리하르트가 매일 아침도 거나하게 차리라고 지시한 탓이었다.
“맛있겠다…….”
리하르트는 차려진 음식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엘리사를 보고 피식 웃었다.
“덜어 줄게.”
리하르트는 접시에 음식들을 덜어 엘리사의 앞에 놓아주었다.
배가 많이 고팠던 건지, 엘리사는 그가 접시를 내려놓자마자 포크를 들고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리하르트는 제 앞에 음식만 덜어 놓고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귀여워’작은 입을 부지런히 오물거리며 음식을 먹는 그녀의 모습이 마냥 사랑스러웠다.
그러다 사레가 들린 것인지, 엘리 사가 콜록거렸다. 그 기침 소리에 리하르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엘리사, 괜찮아?”
리하르트가 재빨리 엘리사의 등을 두드리며 주스를 건넸다.
엘리사는 주스를 마시고도 한동안 콜록거리다 겨우 기침을 멈췄다.
“고마워.”
“천천히 먹어. 체하겠어.”
엘리사의 등을 쓸어 주던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다시 식사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했다.
그때, 엘리사의 눈에 리하르트의 접시가 보였다.
그의 접시에 담긴 음식들은 아직 덜어 놓은 상태 그대로였고, 포크도 제자리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리하르트, 넌 왜 안 먹어?”
“배가 안 고파서 이따가 먹으려고.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먹어.”
“지금도 먹고 이따가 또 먹으면 되잖아? 많이 먹어야 체력이 늘지.”
“체력?”
리하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엘리사와 함께 식사를 할 때마다 그녀를 지켜보느라 대충 먹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톰슨을 비롯한 루벨린 기사들의 말에 의하면 제 체력은 괴물같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무슨 근거로 제 체력을 걱정하는 걸까.
“그러니까 어젯밤에도……… 합!”
퍽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간까지 좁히며 심각하게 이야기하던 엘리사는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제 입을 막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네가 식사를 제대로 안 하는 것 같으니까 걱정돼서….”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리는 엘리사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리하르트는 그녀가 생략한 뒷말이 무슨 뜻이 바로 이해했다.
엘리사는 지난밤, 자신이 한 번만에 자자고 그녀를 재운 것이 제 체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엉뚱한 오해를 받은 리하르트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참았는지는 모르고.’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리하르트는 제 눈치를 살피며 식사하는 엘리사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녀가 포크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하르트……?”
“부인의 오해를 풀어 드려야겠어.”
이대로는 좀 억울해서.
리하르트는 그렇게 덧붙이며 곧장 침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