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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70화 (70/164)

70화

#9. 건국제

며칠 후, 늦은 아침.

엘리사는 옆자리가 허전한 것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보인 건, 햇빛이 드는 방을 배경으로 커프스단추를 채우고 있는 리하르트의 모습이었다.

무심한 눈을 하고 있는 그 얼굴 위로, 상반된 지난밤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땀으로 젖어 끈적이던 다부진 몸, 뜨겁게 저를 적시던 입술, 귓가에 울리던 나른하게 잠긴 낮은 목소리, 그리고… 오로지 저만을 갈구하듯 바라보던 붉은 눈동자까지.

그 기억을 떠올리자, 심장이 쿵쿵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역시 아침 태교로는 저 얼굴만 한 게 없지.’

엘리사는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만끽하며 그의 얼굴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때, 시선을 느끼고 돌아본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시선에 놀란 엘리사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와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이면,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

그런 엘리사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리하르트는 성큼 다가와 그녀의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좋은 아침, 엘리사.”

듣기 좋은 저음이 나직이 귓가에 울렸다.

엘리사는 슬그머니 피하던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응, 좋은 아침.”

“몸은 어때?”

엘리사는 그렇게 묻는 리하르트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그는 함께 밤을 보낸 이후엔 꼭 제 몸 상태를 살폈다. 일부러 느릿느릿 저를 애태우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그런 그가 얄밉긴 해도, 싫지 않았다.

“괜찮아.”

엘리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리하르트가 도와주었다.

엘리사는 겉옷을 걸친 리하르트를 슬쩍 쳐다보았다. 외출하려는 모양이었다.

“회의 가는 거야?”

“슬슬 건국제 준비를 해야 해서.”

“아, 건국제.”

그러고 보니 7월 초에 건국제가 있었다.

건국제는 신년제, 수확제와 더불어 제국의 큰 행사 중 하나였다.

특히나 건국제는 제국의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었기에 더욱 경건하고 뜻깊은 행사였다.

건국제가 이제 보름 남짓 남았으니, 귀족회의 수장인 그는 더욱 바빠질 터였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배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다녀올게, 사랑아.”

그러고는 엘리사의 배에 손을 얹은 채 잠자코 기다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사의 배를 슬쩍 쓰다듬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기다리던 리하르트는 내심 아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다녀올게.”

그의 손이 헝클어진 엘리사의 머리카락을 빗어 귀 뒤로 넘겼다. 조심스러운 손이 엘리사의 뺨에 닿았다.

엘리사는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밤마다 배 마사지를 시작한 이후부터 조금씩 스킨십이 늘더니, 함께 밤을 보내고서는 스킨십이 더욱 자연스러워졌다.

그런데 그 접촉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내려다보는 그의 다정한 눈빛이, 손길이 좋았다.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 따뜻한 거구나.’

그와 스킨십을 하면서 사람의 체온이 이렇게 따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생의 부모님은 이렇게 다정하게 만져 주지도, 안아 주지도 않았으니까.

맞닿은 온기가 얼마나 마음에 안정을 주는지도 처음으로 깨달았다.

엘리사는 그의 손길에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잘 다녀와.”

방을 나서는 리하르트를 배웅하고 창문가로 다가갔다.

잠시 기다리자 저택 밖으로 나와 마차에 오르는 리하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엘리사는 공작저의 거대한 철문을 나서는 마차를 바라보며 배에 손을 얹었다.

“아빠가 너랑 빨리 대화하고 싶나 봐, 아가야.”

그러나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아이는 반응이 없었다.

‘뭐, 때가 되면 반응이 오겠지.’

주치의는 한두 달 안으로 아기의 태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고, 아직 한 달도 안 지났으니 조급할 건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마님, 식사를 가져왔어요.”

“들어와.”

방으로 들어온 하녀들은 테이블 위에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앤은 엘리사에게 다가와 편지를 건넸다.

“좀 전에 황궁에서 온 초대장이에요, 마님.”

“고마워.”

엘리사는 앤에게서 황실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을 건네받아 펼쳤다.

초대장은 간단한 인사말과 건국제를 앞두고 티 파티를 준비했다는 내용, 그리고 파티의 드레스 코드를 알려 주는 것이 전부였다.

엘리사는 초대장을 미심쩍은 눈으로 요리조리 둘러보았으나, 별다른 것은 없었다.

‘로제랑 황후가 나를 이렇게 순순히 초대할 리가 없는데.’

황후는 그렇다 쳐도, 로제는 불과 얼마 전에 저와 대립했었다.

물론 사적인 일이니 대놓고 초대장을 안 보내거나 할 순 없겠지만, 편지 사이에 불길한 의미의 타로 카드를 끼워 보낸다든가 하는 악의는 보일 줄 알았건만, 의외였다.

“흐음…….”

초대장을 바라보는 엘리사의 눈매가 갸름해졌다.

*

며칠 후, 황궁에서 티 파티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황궁의 후원에는 황후와 황태자비의 초대장을 받고 온 귀족 영애들과 귀부인들이 하나둘 도착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분홍색 계열의 드레스를 입거나 머리 장식 혹은 소품을 들고 있었다.

도착한 이들은 기다리고 있는 황후와 로제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두 분의 초대를 받게 되어 영광이에요, 황후 폐하. 황태자비 전하.”

“나야말로 이리 와 주어서 고마워요, 헤덴 백작 부인.”

로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테이블 위의 시계로 향했다.

티 파티가 시작되는 2시가 되기 10분 전.

초대받은 귀부인과 영애들 대부분이 도착한 이 시점에도 엘리사는 아직 황궁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티 파티 시간을 3시라고 알려 줬으니까.”

로제는 째깍째깍 빠르게 지나가는 초침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드레스 코드 역시 분홍색이 아닌 노란색으로 알려 주었다.

마찬가지로 올리비아에게도 드레스코드를 파란색으로 알려 주고, 시간은 정시로 알려 주었다.

태생은 황족이나, 지금은 후작 부인인 그녀를 확실히 눌러 제 아래에 두고픈 황후의 계략이었다.

‘엘리사 그 계집애, 당황하는 표정이 볼만하겠어.’

올리비아에겐 정시를, 엘리사에겐 한 시간 뒤를 알려 준 것도 로제의 계략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 다른 코드의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면 관심이 분산될 테니까.

‘주인공은 마지막에 혼자서 등장해야지.’

로제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엘리사의 얼굴을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어느덧 티 파티의 시작까지 5분이 남은 시간.

잠시 자리를 비운 귀족 영애 하나를 제외하면 올리비아와 엘리사의 자리만이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로제는 자신의 측근인 메릴 자작부인을 보며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녀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그 신호를 이해한 메릴 자작 부인 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루벨린 공작 부인께선 못 오시나요?”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벨테인 후작 부인께서도 안 보이시고.”

“혹시 폐하와 전하 두 분께 쌓인 감정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시는 건…… 흠흠.”

엘리사와 올리비아에 대해 수군거리던 귀부인들과 영애들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황실과 루벨린 공작가, 그리고 벨테인 후작가는 공공연하게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황후와 로제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에서 엘리사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로제는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리가요. 루벨린 공작 부인이 꼭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주셨답니다. 난 공작 부인을 믿어요.”

로제의 말에 귀부인들과 영애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 어쩜. 전하께선 이리도 마음이 여리실까.”

“전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공작 부인은 너무 믿지 마셔요.”

“맞아요. 루벨린이잖아요.”

그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황후도 이 상황이 즐거운 듯 한마디 거들었다.

“태자비가 마음이 참 여리지. 그런 점이 참 좋다가도, 또 가끔은 걱정이 되어서.”

“여러모로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폐하. 염려하시는 일이 없도록 처신하겠습니다.”

로제의 대답에 귀부인들과 영애들은 또 한 번 로제를 치켜세우고, 엘리사를 은근슬쩍 헐뜯었다.

로제는 엘리사에 대해 수군거리는 귀부인들과 영애들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전부 내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어.’

아주 만족스러운 티 파티였다.

엘리사는 이대로 늦게 올 것이고, 황태자비를 공공연하게 무시한 악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그녀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은 가련한 황태자비가 될 테지.

로제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2시까지 1분.

이제 곧 자신의 의도대로 티 파티가 시작될 터였다.

“그럼 이제…….”

로제가 티 파티를 시작하기 위해 운을 뗀 그 순간, 엘리사를 헐뜯던 귀부인들과 영애들이 모두 말을 멈췄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던 로제는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어떻게………?’

그 시선 끝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엘리사가 있었다.

엘리사는 놀라 눈을 깜빡이는 로제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핑!

그와 동시에 테이블 위의 시계가 정확히 2시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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