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다가오는 엘리사는 드레스 코드와 일치하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우윳빛 피부와 분홍색 드레스, 그리고 여름의 푸름을 담은 연둣빛 눈동자와 햇빛에 반짝이는 눈부신 금발이 어우러져 싱그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누가 봐도 이 티 파티의 주인공같은 모습이었다.
“제가 너무 아슬아슬하게 왔죠?”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엘리사의 옆에 올리비아도 함께 있었다.
황후가 알려 준 드레스 코드인 남색 드레스에, 원래 드레스 코드와 맞는 분홍색 숄을 두르고서.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황후와 로제는 적잖이 당황한 눈으로 엘리사와 올리비아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방긋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며칠 전, 로제가 보낸 초대장을 받은 엘리사는 할로스 백작가를 찾았다.
할로스 백작가는 발광석 사업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는 가문 중 하나로, 일전에 리하르트를 통해 협업을 제안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할로스 백작 부인은 가문의사업에 관심이 많고 실질적인 경영에도 손을 대고 있는 사람이었다.
할로스 백작 부인은 엘리사의 방문에 만면에 반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서 오세요, 공작 부인! 아유, 홑몸도 아니신데 여기까지. 그냥 저를 초대하셨으면 제가 공작저로 찾아뵈었을 텐데요.’
엘리사는 그녀가 고대하는 발광석사업 제안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준 후, 은근하게 물었다.
‘그나저나, 할로스 백작 부인도 황궁에서 온 티 파티 초대장을 받으셨죠?’
‘아, 네. 어제 오후에 받았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초대장의 내용을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정원에서 밥을 챙겨 주는 고양이가 있는데, 그 녀석이 초대장을 물어 가서 그만…….’
아아, 그러셨구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할로스 백작 부인은 흔쾌히 초대장을 아예 가져와 보여 주었다.
그녀로선 이제 막 동업자가 된 엘리사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을 외면하기보다는, 도와줌으로써 좋은 관계를 쌓는 것이 이득일 테니.
덕분에 엘리사는 할로스 백작 부인 이 받은 초대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드레스 코드는 분홍이고, 티 파티 시작은 2시라……….’
엘리사가 받은 초대장에 적힌 티파 티 시간은 3시, 드레스 코드는 노란색이었다.
엘리사는 비소를 지었다. 자신의 예상대로였다.
‘교묘하다고 해야 할지, 복수치고는 소심하다고 해야 할지.’
엘리사는 할로스 백작 부인의 초대장에서 본 티 파티 시간과 드레스코드를 숙지하고 그에 맞춰 티 파티에 참석했다.
그렇게 황궁 앞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렸을 때, 막 도착한 듯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벨테인 후작 부인?’
‘아, 루벨린 공작 부인.’
올리비아였다.
엘리사는 그녀를 보자마자 그녀가 왜 티 파티에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지 알아챘다.
올리비아는 남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처한 상황에 발을 동동구르고 있던 다른 귀족 영애가 말했다.
‘부인, 제가 서둘러 집에 가서 갈아입으실 만한 드레스를…..’
아니에요. 영애가 그런 수고로운 일을 하게 할 순 없죠.
엘리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자신의 숄을 벗어 올리비아에게 걸쳐 주었다.
‘이러면 되지 않을까요?’
엘리사의 숄은 공교롭게도 연분홍색이었기에, 올리비아가 그 숄을 걸치자 얼추 드레스 코드를 맞춘 것처럼 보였다.
올리비아는 엘리사의 기지에 놀란듯 쳐다보다, 이내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공작 부인.’
‘별말씀을요.’
엘리사는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올리비아를 도와준 건 물론 그녀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황후와 로제의 계략을 망쳐 역으로 한 방 먹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엘리사와 올리비아는 무사히 티 파티에 참석할 수 있었다.
태연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은 엘리 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시녀들 중에 전하와 제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이가 있는 것 같아요. 티 파티 시간과 드레스 코드를 다르게 적어 보냈더라고요.”
“그런….”
“불과 얼마 전에 따로 황궁으로 부르실 만큼 저를 신경 써 주시는 전하이신데, 다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봐요.”
초대장은 보통 시녀들이 작성했다.
하지만 황태자비의 총애를 받는 시녀라고 해도, 감히 황태자비의 이름으로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시녀는 없었다.
고로, 엘리사의 말은 로제의 계략을 폭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 망할 계집애가!’
엘리사가 모두의 앞에서 폭로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로제는 당황하여 재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귀부인들과 영애들은 놀란 눈으로 로제를 바라보고 있었고, 함께 일을 꾸민 황후 역시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음 여린 황태자비에서 순식간에 치졸한 계략을 꾸민 황태자비가 된 로제는 드레스를 꽉 움켜쥐며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시녀를 불렀다.
“아멜리. 공작 부인에게 보낼 초대장을 작성한 사람이 너였지?”
“네? 그렇습-”
아멜리라는 시녀가 제대로 대답하기도 전에, 짝!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아멜리의 뺨이 돌아갔다.
로제는 싸늘한 눈으로 아멜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내 이름을 가지고 이런 짓을 꾸미다니. 내가 다 부끄럽구나.”
갑작스러운 소란에 귀부인들과 영애들 모두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로제는 엘리사를 돌아보며 사과했다.
“내가 아랫사람을 잡도리하지 않은 탓이에요. 미안해요, 공작 부인.”
그러고는 아멜리에게 명령했다.
“아멜리, 어서 공작 부인께 네 우매함을 사과드리렴.”
엘리사는 로제의 의도를 파악하고 조소했다.
로제는 아멜리에게 강경하게 나감으로써 기선을 제압하고, 동시에 자신의 죄를 모두 뒤집어씌우고 이 일에서 발을 빼려는 모양이었다.
‘그래, 네 짓임을 순순히 인정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
엘리사는 로제가 쏙 빠져나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아멜리에게 이번 일을 전부 뒤집어 씌우긴 했지만, 이미 눈치 빠른 귀부인들과 영애들은 이번 일이 로제의 짓임을 간파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일로 측근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며 사용인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반감을 샀을 터였다.
그것만으로도 수확은 충분했다.
엘리사는 제게 무릎 꿇으려는 아멜리를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미 이번 일을 용서했답니다. 영애도 저와 전하의 사이를 오해한 것 같으니, 앞으로 전하와 제가 돈독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 주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요?”
무릎을 꿇으려던 아멜리는 멈칫하며 로제의 안색을 살폈다.
로제는 심사가 뒤틀린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저 상냥하고 다정한 공작 부인 행세를 하는 엘리사가 영 마뜩잖았다.
“공작 부인께선 역시 아량이 넓으시군요.”
로제는 언뜻 듣기엔 감사의 인사로 들리는 말을 건넸으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기류에 눈치를 살피던 귀부인 중 하나가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 그나저나 아스나 백작 부인께선 참석하지 못하신 건가요?”
금세 감정을 갈무리한 로제가 대답했다.
“아스나 백작 부인은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아서 몸조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답신이 왔답니다.”
“아, 그래서 밀라이트 백작 대부인께서 제도에 올라오셨던 거군요.”
밀라이트 백작 대부인은 아스나 백작 부인의 모친이었다.
일반적으로 출산을 앞둔 산모는 그 누구보다 모친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것을 의지하곤 했다.
출산 경험이 있는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도 하고, ‘엄마’가 되는 순간을 앞두고서야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엘리사는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
엘리사에게 ‘엄마’는 가족보다는 타인에 가까운 존재였다.
전생의 엄마는 사랑보다는 상처를 남겼고, 이번 생의 엄마는 기억에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엄마의 마음이 어떤 건지 잘 몰라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어.’
이 아이만은, 엄마의 사랑을 모르는 외로운 아이로 키우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게 다짐하는 엘리사의 손이 자신의 배를 애틋하게 감싸고 있었다.
*
오늘의 귀족회의 논의 주제는 ‘남은 예산을 어떻게 쓸 것이냐는 것이었다.
회의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건 황제의 측근이자 사위인 다 이온 후작이었다.
“다른 행사도 아니고 건국제입니다. 어찌 보면 제국에서 가장 역사깊고 큰, 기념할 만한 행사인 것이지요. 그런 행사라면 마땅히 제국의 근본이신 폐하께 그간의 은혜에 감사하며 선물을……….”
하지만 이 회의의 중심은 제국 유일 공작가의 수장이자, 귀족회의 수장인 리하르트였다.
“후작의 말대로 건국제는 이 제국을 이루는 모두에게 뜻깊은 날입니다. 하여, 남은 건국제 예산은 제도의 모두가 건국제를 즐길 수 있도록 축제 음식을 준비하는 데 쓰일 겁니다.”
리하르트는 다이온 후작의 말을 더 들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말을 자르고 자신의 의견을 공표했다.
그러자 다이온 후작이 펄쩍 뛰었다.
“아니,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무슨 회의를 매번 이렇게 일방적으로……!”
리하르트는 그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대꾸했다.
“논의할 가치가 없는 의제를 정리하고 본론으로 돌아오는 것도 의장의 의무가 아닙니까.”
“뭐, 뭐요?”
리하르트의 말은 곧, 다이온 후작의 의견은 논의할 가치가 없는 의견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의견을 묵살당한 다이온 후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는 입을 벙긋거렸으나,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리하르트는 그의 반박을 기다리지 않고 회의를 정리했다.
“오늘 회의는 이걸로 끝내죠.”
황제파 귀족들은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눈치였으나, 리하르트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다이온 후작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으나, 결국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한 채 퇴장했다.
그 틈으로 리하르트도 회의장을 나왔다. 그 뒤를 보좌관 아가일이 따랐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창밖을 바라보며 마차로 향하는 리하르트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늦었군.’
황궁의 티 파티에 참석한 엘리사가 걱정되어 데리러 가려 했으나, 회의가 너무 늦게 끝난 탓에 그럴 수 없게 되어서였다.
황후와 황태자비의 사이에서 별일은 없었는지, 서둘러 그녀의 무사한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차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때, 앞에서 걸어가는 귀족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