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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72화 (72/164)

72화

“아스나 백작, 괜찮으면 우리 집에 잠깐 들렀다 가겠나?”

“다시는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퇴짜를 놓을 때는 언제고?”

“며칠 전에 아주 귀한 와인이 들어왔거든. 우리가 미우나 고우나 친구 사이 아닌가? 귀한 술, 맛이나 좀 보여 줄까 하고.”

“마음은 고맙지만 이번엔 안 되겠어. 곧 출산일이라, 장모님께서 와 계시거든. 술 냄새 풍기면서 들어갔다간 아주 미운털이 박힐 거야.”

“아, 이런.”

두 귀족은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며 멀어졌다.

리하르트는 조금 전, 그들이 남기고 간 이야기를 떠올렸다.

‘장모라.’

리하르트에겐 장모님이 없었다. 로엔그린 자작 부인은 일찍이 세상을 하직했으니까.

하지만 장모라고 생각했던 그녀도 사실 그의 장모가 아니었다.

그의 ‘진짜 장모는 신분도, 생사도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어느덧 본궁 입구에 도착한 리하르트는 곧장 마차에 오르려 했다.

그때, 리하르트를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

“각하, 애런 경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 소식에 마차에 오르던 리하르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때마침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

아카로아 교외의 한적한 공동묘지.

녹음이 우거진 한여름의 공동묘지는 추모하는 이들이 두고 간 오색의 꽃다발 덕분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보다는,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애런은 한 묘지 앞에 꽃다발을 내려놓고 그 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스산한 바람과 함께 그의 곁으로 인기척이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그쪽을 보자, 어느새 성큼 다가온 리하르트가 있었다.

“가족인가?”

“가족 같은 친우입니다. 이십 년 전 북쪽 협곡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곳에서 전사했지요. 제도에 올 때마다 들르곤 합니다.”

이십 년 전 북쪽 협곡 사건 때 출정한 자라면 성기사단 소속일 확률이 높았다.

“자랑스러운 친우를 두었군.”

리하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짧게나마 묵념을 했다. 순국한 영웅에 대한 예의였다.

그런 리하르트의 모습을 지켜보던 애런은 리하르트의 묵념이 끝나자 먼저 말문을 열었다.

“마님께서 회임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루벨린의 후계가 생겼다는 소식은 그 작은 시골 마을까지도 들려오더군요.”

“…….”

“경하드립니다. 선대께서도 하늘에서 기뻐하실 겁니다.”

애런의 말에 리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작년 겨울, 알버트의 장례를 치른 후 그에게 절대 후사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던 제 말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애런의 축하에는 조롱 어린 기색이 없었고, 저 역시 그 축하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그의 축하에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치는 것이 아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대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하문하십시오.”

“로엔그린 자작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마님께서 혼인하시기 전 본적을 두셨던 가문이지요.”

“아니, 다시 묻겠다.”

리하르트는 자신의 질문을 정정했다.

“선대는 엘리사를 어디서 데려왔지?”

그 물음에 애런은 리하르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리하르트는 이미 엘리사가 로엔그린 가문의 사람이 아님을 알아채고 제게 묻고 있었다.

“송구하지만, 저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당시 가장 가까이서 보좌한 보좌관이 모른다?”

“선대께선 어딘가로 홀연히 가셨다가 의식을 잃은 마님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저는 명에 따라 적당한 가문으로 마님의 신분을 위장했을 뿐입니다.”

“동행한 기사도 없었나?”

“저와 기사 몇이 신목의 숲까지 동행했습니다만, 각하께선 주로 홀로 다니셨습니다.”

리하르트의 눈썹 한쪽이 치켜 올라갔다.

신목의 숲은 이 세계가 생겨날 때부터 있었다는 신화 속의 나무 ‘신목이 있다고 전해지는 숲으로 아렌시아 제국의 서남단, 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에 왜 간 거지?”

“당시 각하께선 신목의 숲에서 현자를 찾고 계셨습니다.”

“현자?”

“에스더 가문의 선조 중 하나가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신목과 하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책에서는 그를 현자라고 부르더군요.”

“하지만 그 신목도, 현자도 그저 신화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 실존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리하르트는 헛웃음을 삼켰다.

엘리사가 루벨린에 온 시기라면 리하르트가 가문에 들어온 지 2년 남짓 지났을 시점이었다.

‘아들은 죽고, 어디서 굴러먹다 온 것인지도 모를 손자가 가문을 이을 상황이 되니 허황된 신화라도 좋은 건가.’

하지만 리하르트가 아는 그는 그런 허황된 것을 좇을 자가 아니었다.

“…왜 그를 찾은 거지?”

“그 이유는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선대의 곁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으나, 그분은 좀처럼 누군가를 믿는 분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선대는 그를 만났나?”

“그 또한 모르겠습니다. 다만, 의식이 없는 마님을 데려오신 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듯하던 애런이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답을 얻었다고.”

그 말은 곧, 엘리사가 알버트가 찾던 ‘답’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늘 엘리사를 금방이라도 버릴 수 있는 패인 것처럼, 아쉽지 않은 것처럼 대했지만 사실은 엘리사가 그에겐 중요한 패였던 것이다.

‘엘리사가 중요한 패인 이유는 알수 없지만.’

기껏 애런을 찾아왔으나, 엘리사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용건을 마친 리하르트는 애런에게 제안했다.

“당분간 제도에 머물 생각이라면 저택의 방을 준비하라 하지.”

“마음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도 마침 일이 있어 제도에 들른 것이라서요.”

애런은 예의를 갖추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혹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리하르트는 그런 애런을 뒤로한 채 돌아서 마차로 향했다.

원하던 정보는 알아내지 못했으나, 그래도 한 가지 확실히 얻은 건 있었다.

엘리사의 신분을 조작한 사람이 알버트고, 그는 진실을 알고 있다는것.

문제는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는 그가 이미 죽었다는 것이지만.

문득, 조금 전 황궁에서 들었던 귀족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마음은 고맙지만 이번엔 안 되겠어. 곧 출산일이라, 장모님께서 와 계시거든.’

만약 엘리사의 가족이 살아 있다면, 그녀에게 가족을 찾아 주고 싶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마차에 오른 리하르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한숨을 삼키다, 애런이 언급했던 단어를 떠올렸다.

‘신목의 숲..’

알버트는 그 근처에서 엘리사를 데려왔다. 그곳에 필시 단서가 있을 터였다.

공작저로 돌아온 리하르트는 믿을만한 부하들을 불러 지시했다.

“8년 전, 신목의 숲 인근 마을에 살던 금발과 녹안을 가진 여자아이가 있는지, 그런 아이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 와.”

*

그날 밤, 먼저 씻고 방으로 돌아온 엘리사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배 속의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사랑아, 아빠는 급하게 봐야 할 서류가 있어서 조금 늦는대.”

“…….”

“오늘은 아빠한테 무슨 책 읽어 달라고 할까? 『동그라미 마을의 세모』 이야기?”

“…….”

“음, 아니면… 『바다 왕국 삼형제의 모험』 이야기는 어때?”

침대 옆 협탁에는 리하르트와 엘리 사가 아이에게 읽어 주려고 골라다 놓은 동화책이 여러 권 있었다.

동화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배속의 아이에게 말을 걸던 엘리사는 이내 말을 멈췄다.

제대로 듣고 있는지 모를 아이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혼잣말처럼 느껴져 머쓱했다.

그때 문득, 책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단 걸 먹고 똑바로 누워 있으면 태동이 잘 느껴진다고 했는데. 그리고 엄마가 마른 체형일수록 더 잘느껴진다고도 했고.’

엘리사는 협탁 서랍에서 사탕을 꺼냈다. 한창 입덧할 때 넣어 두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침대에 똑바로 누워 배에 손을 얹었다.

“사랑아, 엄마 목소리가 들리면 움직여 봐.”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배 속에선 반응이 없었다.

엘리사는 아쉬웠지만, 동시에 혼자 너무 조급하게 아이를 재촉했던 것 같아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네가 움직이고 싶을 때 움직여도 돼. 엄마는 그냥, 네가 건강하게 잘 크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랬어.”

마찬가지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엘리사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사탕을 천천히 빨아 먹었다.

‘졸려…. 리하르트는 언제 오지?’

티 파티 참석으로 몸이 고되었는지, 슬슬 졸음이 몰려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하품하던 그 순간, 배 속에서 무언가가 스윽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어?”

난생처음 느껴 보는 생소한 느낌에 순식간에 졸음이 달아났다.

‘설마, 방금 그게……….’

엘리사가 놀란 눈을 깜빡이며 배를 만지는데, 그녀의 생각에 확신을 주듯 배 속에서 또 다른 느낌이 느껴졌다.

포로롱. 배 안에서 물방울이 터지는 듯한 아주 작은 느낌이었다.

“사랑아……?”

엘리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의 태명을 불렀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느낀 그것이 아이가 자신에게 건네는 인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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