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73화 (73/164)

73화

‘정말로, 내 배 속에서 아기가 자라고 있어…’

지금까지는 배 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임신 증상을 보이니까, 배가 조금씩 나오고 있으니까 아이가 자라고 있구나 막연히 생각했을 뿐.

습관처럼 아이에게 말을 하면서도 그저 혼잣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스스로를 ‘엄마’라고 지칭하는 것조차 낯설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그런 제게 잘 자라고 있다고 말하듯 아이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과 함께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내 아기.’

그제야 비로소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정말로 자신과 피가 이어진 가족이 생기는 것이다.

인사 같은 아기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그간의 고생이 눈 녹듯 잊히는 것 같았다.

아이를 가지며 겪게 된 불편함과 고통이 많았지만, 그 불편과 고통까지도 기껍게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엘리사는 다시 고요해진 자신의 배를 소중히 감싸며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마한테 인사해 줘서 고마워, 사랑아.”

아이는 반응이 없었지만, 더 이상 마음이 조급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아이의 발길질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가 될 테니까.

기꺼이 그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다.

‘리하르트도 같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방문이 열렸다.

“엘리사…?”

방으로 들어오던 리하르트는 눈물로 발갛게 물든 엘리사의 눈을 보고 멈칫했다.

가뜩이나 엘리사의 출생 문제로 심란하던 차에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앉아 있는 침대로 성큼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엘리사? 왜…….”

다급히 엘리사를 안고 눈물부터 닦아 주는데, 어째서인지 눈물이 맺힌 얼굴과 달리 엘리사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리하르트, 방금 태동이 느껴졌어.”

“뭐……?”

엘리사는 웃으며 그의 손을 끌어내려 제 배로 가져갔다.

“사랑아, 아빠한테도 인사해 줘. 아빠도 네가 반응해 주길 많이 기다렸단 말이야. 응?”

리하르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엘리사의 배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엘리사의 속삭임에도 불구하고 배에선 아무런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엘리사는 배 속 아이의 움직임에 집중하려 미간까지 찌푸려 가며 촉각을 곤두세웠으나, 마찬가지로 다른 반응이 없는 듯했다.

“으음, 아직 아빠한텐 인사하기가 부끄럽나 봐.”

엘리사는 아쉬운 기색을 비치며 제 배 위에 얹은 리하르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물고기 같은 게 배 속을 스윽 지나가는 느낌이 났어. 그래서 어? 했는데 다음엔 물방울이 터지는 소리 같은 게 나더라. 포로롱! 이렇게.”

“그래?”

“너무 신기하고, 무사히 잘 자라고 있어서 기특하고…… 그리고 사랑스러웠어.”

리하르트는 첫 태동의 감상을 종알거리는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눈물이 덜 마른 눈을 반짝이며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신이 나서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에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나도 궁금한데.”

“조금만 더 있으면 너도 느낄 수 있을 거야. 아직은 아기가 작아서 잘 안 느껴지는 거고.”

엘리사가 하품을 하며 말을 이었다.

엘리사가 졸린 것을 알아챈 리하르트는 협탁 서랍에서 마사지 크림을 꺼냈다.

그녀가 잠들기 전, 마사지를 해 줄 시간이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동그란 배에 크림을 조심스럽게 바르기 시작했다.

익숙한 손길을 느끼며 편하게 누워 있던 엘리사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말문을 열었다.

“있잖아, 리하르트.”

“응.”

“엄마’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몰라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겠지?”

오늘 출산을 앞두고 모친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귀부인의 이야기를 듣고서 든 생각이었다.

그 말에 리하르트의 손길이 일순 멈칫했으나, 이내 다시 엘리사의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넌 지금도 충분히 좋은 엄마야, 엘리사.”

“으음, 옆구리 찔러서 칭찬받는 기분인데.”

엘리사는 말을 그렇게 했지만, 그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 듯 흐흥 웃었다. 그러다 이내 무거운 눈꺼풀을 내려 놓았다.

이윽고 잠든 엘리사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배를 덮어 주고 그녀의 옆으로 가서 누웠다.

엘리사는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제 품에 안겨 잠든 엘리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품고 있고, 자신이 목숨보다 사랑하는 아내라는 사실이 중요할 뿐.

다만….

“엄마’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몰라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겠지?”

모친의 곁에서 ‘엄마’가 되어 가는 과정을 배우고 의지하며 엄마가 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엘리사는 이 낯선 변화를 혼자서 경험하고 받아들이며 엄마가 되어야 했다.

난생처음 겪는 변화가 두렵고 무서울 텐데도,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말갛게 웃으며 묻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쓰렸다.

엘리사를 위해 자신이 다른 건 다해 줄 수 있어도, 엄마를 대신해 줄 수는 없으니.

리하르트는 곤히 잠든 엘리사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더 잘할게, 엘리사.”

그리고 엘리사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잘 자.”

***

건국제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엘리사는 건국제를 맞이하여 기부할 재화와 물건들을 가지고 신전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엘리사는 신전으로 들어서기 전, 톰슨에게 지시를 내렸다.

“재화와 물건들은 신관님들의 지시대로 옮겨다 놓고, 나머지 마차는 저택으로 돌려보내세요. 호위 부대만 대기하고요.”

“넵. 마님의 지엄하신 명을 받듭니다.”

“아니면 경들도 신전에서 기도를 드려도 좋고요.”

“오, 그것도 괜찮겠네요.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님.”

톰슨은 넉살 좋게 씩 웃으며 엘리 사를 먼저 신전 안으로 안내하고는, 돌아서 기사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엘리사는 그들을 뒤로한 채 신전안으로 들어섰다.

신전은 건국제 맞이로 분주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건국제는 신년제와 수확제를 포함한 아렌시아 3대 국가 행사 중 유일하게 신전에서 진행하는 행사였기 때문이었다.

엘리사는 제일 먼저 리온을 찾았다.

‘리온은 지금쯤….’

이 시간이면, 아이들의 예배는 끝나고 각자 맡은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리온은 아직 네 살이라 일을 할 수 없으니, 에이든이 거처하는 신전안쪽 별관에서 혼자 놀고 있을 터였다.

엘리사는 이제 익숙해진 길을 따라 안쪽 별관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화단 앞에 자그마하고 익숙한 형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귀여워’가뜩이나 작은 아이가 몸을 웅크리고 있으니 더욱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저기서 뭐 하는 거지?’

엘리사는 인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가 리온의 행동을 살폈다.

아이는 화단에 웅크리고 앉아 맨손으로 열심히 흙을 파고 있었다.

“리온?”

엘리사의 목소리에, 흙 파기에 열중이던 리온이 놀란 눈으로 엘리사를 올려다보았다.

그 커다란 눈은 금세 반색으로 물들었다.

“누나!”

아이의 이마와 뺨에 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어 꼬질꼬질했다.

그런 리온의 얼굴을 본 엘리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꺼내 아이의 꼬질꼬질한 얼굴을 닦으며 물었다.

“어휴, 얼굴에 흙이 다 묻었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잡초 뽀바!”

리온은 지금까지 뽑은 잡초를 자랑스럽게 치켜들었다.

아이의 손에 들린 ‘잡초’를 본 엘리사는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꽃으로 보이는 풀이 많아 보이는데…….”

“응?”

“아니야. 네가 즐거우면 됐어.”

성하를 도우려는 마음이 중요한 거지, 암.

엘리사는 리온이 뽑아 버린 ‘잡초’가 부디 에이든이 아끼는 꽃이 아니 길 빌며 리온의 얼굴을 마저 닦았다.

“리온, 우리 잡초 뽑기는 그만하고 손 씻을까? 얼굴에 이게 뭐야. 까마귀도 아니고.”

“까악이?”

“그래. 까악이가 너 더럽다고 친구 하자고 하겠다. 그전에 얼른 씻자.”

엘리사는 리온을 근처에 있는 우물로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리온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건지 히죽 웃으며 엘리사의 손을 피했다.

“아니야, 씻기 시러. 까악이랑 친구 하 꺼야.”

“뭐?”

“까악! 까악!”

리온은 까마귀를 소환하기라도 할 기세로 까마귀 흉내를 내며 도망갔다.

엘리사는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리며 리온의 뒤를 쫓아갔다.

“리온, 이리 와!”

리온은 까르르 웃으며 엘리사를 해 별관 바깥쪽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막 모서리를 돌던 그때였다.

“아야!”

쫓아오는 엘리사를 돌아보며 정신없이 달리던 리온은 모서리 너머에서 등장한 누군가에게 부딪혀 뒤로 넘어졌다.

“리온, 괜찮-”

서둘러 리온에게 다가가려던 엘리 사는 리온과 부딪힌 상대의 얼굴을 보고 놀라 걸음을 멈췄다.

“아이씨, 이 쥐방울만 한 건 또 뭐야?”

리온의 앞에, 잔뜩 얼굴을 찌푸린 크리스티안이 서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