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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74화 (74/164)

74화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엘리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째서

여기에

‘크리스티안이……?’

엘리사는 당황한 눈으로 크리스티안과 그 앞에 주저앉아 있는 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크리스티안은 리온이 묻힌 흙을 털며 눈앞의 아이를 싸늘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리온을 알아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다행이 아닌가.’

제 아들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얼마나 아둔한 자인가.

하지만 진실을 알 리 없는 크리스티안은 이쪽으로 다가오는 엘리사와 리온을 번갈아 보더니, 입매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러고는 표정을 오만상 구기며 리온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어이, 꼬마야. 부딪쳤으면 사과를 해야지? 그런 건 신전에서 안 가르쳐 주나?”

“데, 데동하미다……….”

“하필 흰 옷에 뭐야? 너 이게 얼마나 비싼 옷인지 알아? 네 목숨값의 수백 배는 되는 옷이다.”

크리스티안의 사나운 기세에 겁먹은 리온은 덜덜 떨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짜증스럽게 보던 크리스티안이 리온의 자그마한 발을 툭 찼다.

힘이 실린 타격은 아니었지만, 아이를 겁먹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리온은 바들바들 떨며 발을 웅크렸다.

“이래서 부모 없는 것들은 안 된다니까. 가정 교육이 안 되어 있어요, 가정 교육이.”

“……..”

“이런 멍청한 것들을 키워다 어디 쓰겠다고 그렇게 기부를 해 대는지……. 쯧.”

그렇게 말하는 크리스티안의 시선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엘리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말은 사실상 리온이 아닌, 고아인 엘리사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아가 사생아인 리하르트를 헐뜯는 말이기도 했다.

엘리사는 리온과 크리스티안의 사이를 막아서며 크리스티안을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 싸늘한 눈을 한 채 입만 웃으며 말했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전하.”

그런 엘리사의 모습에 크리스티안이 비아냥거렸다.

“아니, 이게 누구야. 이런 거지새끼들도 측은히 여기고 기부하시는 우리 루벨린 공작 부인 아니신가?”

엘리사는 크리스티안의 말에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얼마 전부터 루벨린에서 공개적으로 신전에 기부를 시작하자, 대외적인 시선을 신경 쓴 황실에서도 건국제를 맞아 기부를 하기로 한 것이다.

크리스티안은 아마 그 대외적인 이미지 선전을 위해 신전까지 행차한 것일 터였다.

이 귀찮은 일정이 크리스티안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고.

크리스티안은 엘리사의 배를 물끄러미 보다가 문득 생각난 듯 이죽거렸다.

“아, 참. 이런 험한 말은 태교에 안 좋다지? 내가 깜빡했네. 미안하군, 루벨린 공작 부인.”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럼 자리를 좀 비켜 주지? 감히 황태자의 옷에 흙칠을 해 내 체면을 상하게 한 이 아이를 단단히 꾸짖어야겠으니.”

“이번 일은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생각하던 엘리사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크게 걸고넘어질 일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리온의 잘못이 있었고, 무엇보다 여기서 크리스티안과 이야기를 이어 갈수록 리온이 상처받는 말이 쏟아질 것을 알아서였다.

리온이 상처받지 않고 이 상황이마무리되는 방향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내린 해결책이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아이를 용서해 주시고, 아이의 훈육은 제게 맡겨 주세요. 전하의 옷은 루벨린에서 책임지고 배상해 드리겠습니다.”

크리스티안은 남자에겐 막 대해도, 여자가 먼저 굽히고 들어가면 의외로 거기에 만족하고 물러나는 경향이 있었다.

‘신사적인 남자’ 라는 이미지의 본인에게 심취하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엘리사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자, 그녀의 예상대로 크리스티안의 기세가 한풀 누그러졌다.

크리스티안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하여간 천한 것들은 문제야.

멍청한 아비와 멍청한 어미가 만났으니 저런 덜떨어진 애들이 자꾸 태어나 나라를 어지럽히는 거지. 쯧.”

그 ‘멍청한 아비’가 저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크리스티안의 말에 엘리사는 기가 막혀 실소했다.

그때, 문득 리온이 떠올랐다.

‘하지만 엄마와의 추억이 있는 리온이 듣기엔 속상할 말인데.’

엘리사는 뒤늦게 제 뒤에 숨어 있는 리온의 안색을 살폈다.

울진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리온은 멀쩡했다.

다만, 이제는 크리스티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두 눈에 살기를 드리운 채.

그와 동시에 아이의 작은 손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 불꽃을 바라보는 엘리사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크리스티안이 제 아들을 알아보지는 못해도, 이 불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아챌 터였다.

“안 돼, 리온!”

엘리사는 황급히 리온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이 그 불에 다칠 수도 있다는 것을 계산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그리고 제 손을 확인할 틈도 없이 크리스티안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크리스티안은 눈치채지 못한 듯 엘리사와 리온을 시큰둥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안도했다. 그때 리온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아내, 누나……. 리온 때무네 아프게 해서.”

“아냐, 괜찮아. 아프지 않.”

무심코 그렇게 말하던 엘리사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불에 됐으니 따가울 법도 하건만, 손에는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

화상을 입었을 거라 생각했던 손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저 물기가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뭐지……?’

그에 의문이 든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계셨군요, 황태자 전하.”

고개를 들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에이든이 보였다.

성큼 가까이 다가온 에이든은 곁눈질로 엘리사와 리온, 크리스티안 사이의 분위기를 읽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기다리고 있지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미리 언질을 받았으면 기다렸을 텐데.”

“뭐, 덕분에 신전이 어떤지 둘러보고 좋았습니다. 다만 신전 안 아이들은 좀 더 엄하게 훈육하셔야겠더군요.”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에이든은 리온의 행동을 지적하는 크리스티안의 말을 자연스럽게 넘기고는, 그를 데리고 멀어졌다.

엘리사는 멀어지는 크리스티안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리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리온은 그제야 훌쩍훌쩍 울음을 터트렸다.

부모를 욕하는 크리스티안의 말에 분노를 앞세우긴 했어도, 상처를 받지 않은 건 아니었나 보다.

엘리사는 그런 리온을 가만히 끌어 안았다.

“리온, 아까 그 사람이 한 말은 다 잊어버려. 그 사람이야말로 멍청해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우웅….”

“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는 불을 사용하면 안 돼. 알았지?”

“미아내요. 잘못해써….”

리온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그리고 엘리사를 살며시 끌어 안았다.

엘리사는 그런 리온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래. 다음부터는 안 그러면 되는 거야.”

리온은 엘리사에게 안긴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리온이 갑자기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엘리사의 등 뒤를 가리켰다.

“어, 아조씨다!”

뒤돌아보니 익숙한 인영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햇빛 아래에서 찬란히 빛나는 외모를 가진 장신의 남자.

리하르트였다.

그를 본 엘리사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오늘 회의는 일찍 끝났어?”

“응. 이제 준비는 거의 다 끝났거든.”

리하르트는 반색이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리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그마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들어오면서 보니 크리스티안이 이곳에 온 것 같던데.”

“아, 응. 좀 전에 마주쳤어. 다행히 눈치는 못 했지만.”

“아조씨!”

리온은 리하르트의 다리에 매달리고 싶은 듯 주위를 빙빙 돌았지만, 선뜻 그에게 매달리지 못했다. 손에 묻은 진흙 때문이었다.

리온이 조금 전 크리스티안에게 진흙을 묻혔던 기억 때문에 주저하는 걸 눈치챈 엘리사는 리온을 우물가로 데려갔다.

“손 씻자, 리온.”

“내가 할게.”

성큼 다가온 리하르트는 우물물을 푸려는 엘리사에게서 두레박을 가져갔다.

그리고 우물물을 퍼 올려 리온의 손을 씻겨 주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씻어, 꼬맹이.”

“우웅. 이러케?”

엘리사는 리온의 손과 얼굴을 씻겨주는 리하르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러고 있으니 꼭 아빠 같네..’

아이를 만지는 손길이 조심스럽고 어설프긴 해도, 그 나름의 애정이 묻어났다.

그의 다정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때, 새로 물을 뜬 리하르트가 엘리사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모습을 멍하니 감상하고 있던 엘리사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화들짝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네 손에도 묻었어. 씻겨 줄게.”

“아……. 고마워.”

리하르트는 배가 부른 엘리사가 불편하게 몸을 숙이지 않아도 되도록 두레박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다른 손으로 엘리사의 손을 씻겼다.

차가운 물속에서 저를 어루만지는 커다란 손의 온기가 어쩐지 부끄러웠다.

엘리사는 머리를 살짝 숙인 채 제 손을 씻기는 데 열중인 리하르트를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마찬가지로 엘리사를 내려다보던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아.’

햇빛을 머금은 붉은 눈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에 두근두근, 다시 심장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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