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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75화 (75/164)

75화

“누나 배가 커.”

그때, 먼저 손을 씻고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리온이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엘리사의 배를 살짝 찌르며 물었다.

“응가 이써?”

히죽 웃으며 묻는 리온의 말에 엘리사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리온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아가가 네 말 들으면 속상해서 울겠다.”

“아가?”

“응, 아기. 누나 배 속엔 아기가 있어.”

리온은 며칠 전, 신전에 세례를 받으러 왔던 갓난아기를 떠올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고 아기 아니야. 아기는 리온처럼 생겨써.”

“맞아, 아기는 리온처럼 생겼지. 아직은 누나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거야. 백 밤 정도 자고 나면 리온처럼 뿅 나타날 거야.”

정확히는 백 일보다 더 기다려야 하지만, 엘리사는 리온이 알아듣기 쉽도록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오옹. 나두 아기 가꼬 싶다.”

“아기 생기면 뭐 하게?”

“맨날 가치 놀 거야.”

아이다운 발상이었다.

귀여운 생각에 미소를 짓던 엘리사는 리온의 다음 말에 웃음을 멈췄다.

“아기는 어떠케 가져?”

아이의 순수한 물음에, 엘리사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동시에 리하르트의 귀 끝도 붉어졌다.

당황한 두 사람이 할 말을 잃고 대답하지 않자, 리온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누나?”

차마 저 순수한 눈빛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 음. 그러니까, 아기는 어떻게 가지냐면…. 사랑하는 사람이랑 뽀뽀하면 생기는 거야.”

“사랑이 모야?”

“사랑은 리온이 빵을 좋아하는 것보다 더 많이 좋아하는 걸 사랑이라고 해.”

리온은 엘리사와 리하르트를 번갈아 보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다시 엘리사에게 물었다.

“구롬 누나는 아조씨 사랑해?”

“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엘리사의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귀 끝을 붉히며 시선을 외면하고 있던 리하르트가 리온의 질문을 듣고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리온의 질문에 난감해하던 엘리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아, 안 사랑해도 뽀뽀하면 아기가 생겨.”

“오옹.”

“그러니까 아무나하고 뽀뽀하면 안돼. 알았지?”

엘리사는 말이 나온 김에 성교육차원으로 주의를 주었다.

지금에 와서는 아이의 존재가 소중하고 기쁘지만, 처음에 예기치 못하게 생긴 아이의 존재가 무섭고 겁이 났었다.

리하르트 역시 그랬으리라.

엘리사는 리온이, 그리고 리온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일을 겪지 않길 바랐다.

“우웅, 아라떠.”

리온은 자세한 이유는 이해하지 못했어도 ‘아무나 뽀뽀하면 안 된다.

는 의미는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엘리사는 눈치채지 못한 채 리온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아이의 손을 잡고 화단으로 데려갔다.

“이리 와 봐, 리온. 잡초가 뭔지 알려 줄게.”

“웅!”

엘리사는 리온과 함께 화단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다 문득 리하르트를 떠올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리하르트, 너도 와서 잡초 골라 줄래?”

“…난 됐어.”

엘리사는 쌀쌀맞은 대답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 같으면 군말 없이 제 옆에와 앉았을 텐데,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이고 잡초야?”

리온의 목소리에 엘리사는 다시 리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꽃이야. 봐 봐, 싹 모양이 이렇게 나지? 이렇게 생긴 건 꽃이니까 뽑으면 안 돼.”

리하르트는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 리온에게 이야기하는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배를 압박하지 않기 위해 무릎을 아래로 내리고 발꿈치를 들어 몸을 지탱하는 자세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하르트는 결국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엘리사의 허리를 지탱해 안았다.

“뒤로 넘어지겠어.”

“아……. 고마워, 리하르트.”

엘리사는 환하게 웃으며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그 미소에 리하르트의 표정이 본능적으로 풀어졌으나, 금세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면서도 엘리사를 안은 팔은 풀지 않았다.

엘리사는 리온에게 다시 잡초와 꽃을 구분해 알려 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리온이 겨우 잡초를 구분하기 시작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단 앞에서 뭐 하고 계십니까?”

에이든의 목소리였다.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앗, 성하.”

“잡초 뽀바요! 이만큼 뽀바써요.”

리온은 잔뜩 뽑아 둔 잡초를 자랑스럽게 치켜들었다.

하지만 리온의 등 뒤로 멀쩡한 꽃까지 다 뽑혀 있는 엉망진창의 화단을 본 에이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것을 눈치챈 엘리사는 리온이 혼나진 않을까 긴장했다.

그러나 에이든은 언제나 그랬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래, 무슨 일이든 시행착오가 필요한 법이지.”

“시행차고?”

“잘했구나, 리온. 네가 속아 낸 덕에 남은 꽃들이 튼튼하게 자라겠어.”

에이든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리온이 배시시 웃었다. 옆에 있던 엘리사도 저가 칭찬을 들은 듯 씩 웃었다.

“황태자 전하께선 돌아가셨나요?”

“네, 마침 배웅해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오래 앉아 있었던 탓인지 다리가 저렸다.

“저희도 슬슬 돌아가야겠네요.”

“더 있다가 가셔도 됩니다. 리온도 그걸 바라는 것 같고요.”

“아니에요. 건국제 준비로 신전이 가장 바쁠 때인데 계속 있을 순 없죠. 오늘은 애초에 기부만 하러 온 것이기도 하고요.”

“부인께서 베푸신 은혜는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게 먼저 전해질 겁니다.”

“네. 꼭 그렇게 되도록 힘써 주세요.”

엘리사는 에이든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리온에게 손을 흔들었다.

“또 올게, 리온.”

리하르트 역시 에이든에게 살짝 묵례했다.

“누나, 안녕. 아조씨도 안녕.”

리온은 멀어지는 두 사람을 향해 고사리 같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 움직임을 따라 손에 묻어 있던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것을 본 에이든이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리온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손부터 씻어야겠구나.”

에이든은 두 손으로 리온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에서 물이 차올라 리온의 손을 씻어 내렸다.

그 광경을 멀뚱히 바라보던 리온이 무언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까 누나 손에서도 물 나와써요.”

“물?”

에이든은 의아한 눈으로 리온을 쳐다보다, 우물 옆의 잔디가 젖어 있던 것을 기억해 내고 리온의 말을 이해했다.

엘리사가 리온이랑 같이 손을 씻으며 물장난이라도 친 모양이었다.

“신기했겠구나. 다음엔 누나한테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 달라고 하렴.”

“응.”

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깨끗해진 손을 털었다.

에이든은 그런 리온을 데리고 별관안으로 향했다.

*

그날 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온 엘리사는 평소처럼 리하르트에게 안겨 그가 읽어 주는 동화책을 듣고 있었다.

부드러운 중저음은 언제나 그랬듯 감미로웠으나, 엘리사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평소와 묘하게 다른 리하르트 때문에.

엘리사는 갸름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살폈다.

‘삐진 거 같은데.’

예를 들면 평소보다 적어진 말수라 든가-그래도 먼저 말을 걸면 싫은 내색 없이 대답하긴 했다. 식사 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피하고 있는 시선이라든가.

게다가 평소엔 나름대로 구연동화를 하며 읽던 동화책을 지금은 영혼없이 읽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가 쳐다보고 있는데 이쪽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다.

식사 때는 긴가민가했으나, 지금까지 지켜보니 확실히 알겠다.

그는 삐졌다.

저랑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할 만큼 아주 단단히.

‘대체 왜?’

신전에 다녀온 이후부터 쭉 저 상태인 것 같은데, 정확히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제 시선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리하르트를 빤히 바라보던 엘리사가 마침내 그를 불렀다.

“리하르트, 혹시 삐졌어?”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제야 시선이 돌아온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니.”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은 어쩐지 상처받은 눈이었다.

엘리사는 다시 시선을 동화책으로 돌리려는 그의 뺨을 붙잡아 저를 마주 보게 만들었다.

“아니긴, 얼굴에 ‘나 삐졌음. 이라고 다 쓰여 있는데.”

“…….”

“내가 뭔가 섭섭하게 했어?”

그 물음에,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엘리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자코 그의 대답을 다렸다.

그 순간, 리하르트의 손이 그의 뺨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얽었다.

동시에 훅 다가온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엘리사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자, 리하르트는 입술을 떼고 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런 짓 아무나랑 안 해, 난.”

금방이라도 다시 저를 집어삼킬 듯 열기가 일렁이는 눈으로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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