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엘리사는 멍하니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놀란 가슴이 쿵, 쿵,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귓가에 제 심장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렸다.
부부 관계를 할 때는 이보다 더 짙은 입맞춤도 했다.
그런데, 왜.
이 가벼운 입맞춤에 이다지도 심장이 뛰는 걸까.
엘리사는 그 영문을 모른 채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가슴께의 옷깃을 꼬옥 틀어쥐었다.
저를 씹어 먹을 듯 위험한 그의 눈빛이 미친 듯이 팔딱거리는 제 심장을 꿰뚫어 볼까 겁이 났다.
그에게 이 소리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해.’
엘리사는 제게서 떨어지지 않는 그의 집요한 눈빛에 입술만 달싹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
무슨 뜻이냐 물으려던 찰나, 배 속에서 통! 움직임이 느껴졌다.
엘리사가 하려던 말을 갑자기 멈추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리하르트가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엘리사?”
“사랑이가 움직였어.”
엘리사는 재빨리 리하르트의 손을 끌어 제 배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엔 물방울이 터지듯 약하게 느껴지던 태동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었다.
덕분에 엘리사는 요즘 태동하는 아이와 이야기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건국제 준비로 바빴던 리하르트는 아직 태동을 느끼지 못한 상태였다.
배 속의 아이는 리하르트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그가 있는 아침과 밤에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심 아이의 태동을 기다리는 리하르트를 알고 있는 엘리사는 어서 그에게도 이 경이로운 감정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리하르트가 배에 손을 올리자, 아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졌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얼떨떨해 하는 리하르트와 달리, 마음이 조급해진 엘리사는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바로 누우면 태동을 좀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사랑아, 이렇게 불러 봐.”
빨리.
엘리사는 배에 얹은 리하르트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채근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리하르트는 목을 가다듬고 아이의 태명을 불렀다.
“사랑아.”
하지만 잠시 기다려 봐도 아이는 반응이 없었다.
“흐음, 아빠랑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큰 기대가 없었던 리하르트보다, 엘리사가 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리하르트는 내심 아쉬운 마음을 숨기며 손을 떼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통!
배 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손을 떼려던 리하르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자 이번엔 배가 꿀렁이며 움직였다. 그 움직임을 느낀 리하르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반응을 눈치챈 엘리사가 씩웃으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사랑아, 아빠가 네 인사를 엄청 많이 기다렸어.”
아이는 엘리사의 말에 대답하듯 또 한 번 배를 찼다. 정확히 리하르트가 손을 얹고 있는 부위였다.
리하르트는 멍하니 엘리사의 배를 쳐다보았다.
‘아기…….’
그제야 실감이 났다.
이 작은 배 속에, 엘리사와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
자신이 이 작은 아이의 아빠가 된다는 것이.
지금까지는 아이의 존재가 실감 나지 않았다. 그저 엘리사와 자신을 이어 주는 연결고리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훌쩍 자란 아이가 자신의 존재감을 뽐냈다.
제 손가락 마디보다 작은 손과 발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고.
아이의 존재를 느낀 순간,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자신이 만들어 낸 생명의 무게만큼, 딱 그 책임감만큼.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뭉클한 감정이 심장을 짓눌렀다.
“뭐 해? 아빠도 인사해야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어 있는 리하르트의 반응을 구경하던 엘리사가 속삭였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말대로 배 가까이에 대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 사랑아.”
늘 아무렇지 않게, 습관적으로 부르던 태명이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빠야.”
스스로를 ‘아빠’라고 칭하는 것도.
아이는 그의 부름에 한 박자 늦게 꿀렁거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잠시 꼬물거리다 잠잠해졌다.
리하르트는 아이의 움직임이 멎고도 한동안 멍하니 엘리사의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런 그의 반응에 안도하며 웃었다.
그가 원작과 달리 아이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지금까지 그의 행동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심 아이의 존재를 실감하게 된 그의 마음이 바뀌면 어쩌나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반응을 보니 그런 걱정은 접어 둬도 될 것 같았다.
“아기랑 인사해 보니 기분이 어때?”
“…….”
“리하르트?”
대답이 없는 그의 반응에 의아해하던 찰나, 리하르트가 엘리사를 끌어 안았다.
“고마워, 엘리사.”
난생처음 느껴 보는 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엘리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평생 경험하지 못했을 감정이니까.
갑작스러운 그의 포옹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는 이내 씩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가족’의 의미를 실감하게 된 밤이었다.
*
사용인들도 잠든 늦은 밤, 다이온 후작이 귀가했다.
막 잠들려던 미카엘라는 마차 소리를 듣고 1층 로비로 내려왔다.
그 모습을 본 다이온 후작이 알은 체를 했다.
“황녀 전하. 아직 깨어 있으셨습니까?”
미카엘라는 훅 끼쳐 오는 술 냄새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빨개진 얼굴과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를 보니 어디서 진탕 마시고 온 모양이었다.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왜 이렇게 많이 드셨어요? 몸에도 안 좋은데.”
“내 속상한 일이 있어 좀 마셨소.”
“무슨 일이요?”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 전쟁 한번 나갔다 왔다고 기고만장해져서는, 사람을 무시하고 말이야.”
“누구 말씀하시는 거예요?”
“루벨린 공작 그놈 말이오. 그놈이 회의에서 나를 어찌나 무시하는지!”
다이온 후작은 이를 부득 갈며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논의할 가치가 없는 의제를 정리하고 본론으로 돌아오는 것도 의장의 의무가 아닙니까.’
‘뭐, 뭐요?’
황제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자는 제 의견을 ‘논의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저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그 눈빛이 아직까지도 선명해 이가 갈렸다.
다이온 후작이 언성을 높이며 리하르트를 욕했다.
“내가 나 좋자고 하는 얘기도 아니고, 예산이 좀 남았으니 이 제국의 빛이신 폐하를 좀 챙겨 드리자는데 그걸 그리 무시하고 거지새끼들만 챙기더이다.”
다이온 후작의 토로에 미카엘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카엘라는 리하르트가 처음 소공작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해도 그를 마음에 품었었다.
부황이 그와 결혼시키겠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는 내심 얼마나 들떴던가.
하지만 황제의 계략을 간파한 알버트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미한 자작가의 계집애를 데려다 리하르트와 결혼시켰고, 그 때문에 미카엘라는 리하르트에게 자신이 거절당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을 것 같던 리하르트가 엘리사와 곧잘지내는 모습을 보고서는 더욱 마음이 언짢아졌다.
리하르트와 결혼한 엘리사는 물론이고, 저 없이 잘 사는 리하르트 역시 못마땅했다.
그런데 남편이 부황을 위해 건의한 안건을 무시했다니, 영 마뜩잖았다.
미카엘라는 다이온 후작의 말에 맞장구치며 말했다.
“그치는 옛날부터 그랬죠. 제힘 하나 믿고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어요.
공작 부인 그 여자도 그렇고요.”
“그 계집도 그렇소?”
“둘이 아주 똑같다니까요. 수렵제때도 그렇고, 얼마 전 티 파티에서도 그렇고 누가 보면 그 여자가 황후인 줄 알았을 거예요.”
“쯧쯧, 주제를 모르는 무엄한 계집같으니. 옛말에 사람은 끼리끼리라더니, 그 말이 딱 맞아.”
“마음 많이 상하셨겠어요, 여보. 둘다 한번 호되게 당해 봐야 부끄러운 줄 알고 몸 사릴 텐데.”
“그러게 말이오.”
두 사람은 서로의 말에 맞장구치며 마음을 달랬다.
그때, 곁에 있던 집사가 다가왔다.
“각하, 오늘 낮에 마젠타 자작께서다녀가셨습니다.”
“또?”
마젠타 자작이라는 이름에 다이온 후작이 표정을 구겼다.
마젠타 자작은 그의 숙부였다.
그는 다이온 후작의 조부에게서 제 몫의 유산을 상속받아 사업을 벌였으나, 줄줄이 망하여 적자를 면치 못했다.
연이은 적자에도 사업에 미련을 못버린 것인지, 여러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사업 밑천을 빌려 달라 빌붙고 있었다.
다이온 후작에게도 석 달 전쯤 찾아왔었는데, 오늘 또 찾아온 모양이었다.
“예. 각하께서 시간이 되시는 날을 알려 달라며 만나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만나서 할 이야기는 뻔했다. 또 기가 막힌 사업 아이디어가 있으며, 이번엔 반드시 잘될 것이니 투자를 해 달라고 할 것이다.
“서신 보내지 말고 그냥 무시해.
누구를 적선가로 아나.”
시큰둥하게 대꾸한 후 미카엘라와 함께 곧장 침실로 올라가려던 다이 온 후작은 문득 석 달 전에 만났던 마젠타 자작과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전에 만든 물건이 참 괜찮은데, 요즘 치안이 좋아져서인지 잘 안 팔리더라고.’
마젠타 자작은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며 자신이 만든 사업 아이템을 소개했었다.
그 ‘아이템’을 떠올린 다이온 후작에게 번뜩이는 생각이 스쳤다.
‘그거면 그 건방진 놈에게 크게 한방 먹일 수 있겠어.’
다이온 후작은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집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숙부께 서신을 보내라.
내가 내일 만나자고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