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건국제 전날 밤, 엘리사는 내일의 일정에 대비하여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들었다.
리하르트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잠든 엘리사의 모습을 지켜보며 약한 바람을 일으켜 여름밤의 열기를 쫓아내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리하르트는 흠칫 놀라 엘리사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엘리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리하르트는 노크 소리가 또 한 번 울리기 전에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여미고 방문으로 향했다.
‘혹시 ‘그 일’인가.
방에 불을 켜 두긴 했지만, 이 늦은 밤에 사용인이 찾아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는 건 정말 급박한 일이라는뜻.
그 ‘급박한 일’에 대해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리하르트는 성큼 방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집사 그레이 슨이 서 있었다.
“혹시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아니. 무슨 일이지?”
“콜트 경에게서 서신이 왔습니다.”
콜트는 리하르트가 일주일 전, 신목의 숲으로 파견을 보낸 부하 중 하나였다.
그들에게서 소식이 오면 방에 불이 켜져 있을 땐 언제든 가져오라고 일러두었던 터였다.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각하.”
서신을 전한 그레이슨은 조용히 물러갔다.
방문을 닫고 테이블로 온 리하르트는 서둘러 서신을 펼쳐 보았다.
[하명하신 대로 숲 주변의 마을들을 뒤져 보았습니다.
그 당시에 마을에 살았던 금발과 녹안을 가진 소녀들은 아직 그 마을에 살고 있거나, 아니면 근처 마을로 시집을 가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죽은 소녀들도 꽤 있지만, 실종된 소녀는 없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펴보고 돌아가겠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즉, 엘리사의 흔적을 그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애런은 분명, 알버트 루벨린이 신목의 숲에서 엘리사를 데려왔다고 했는데.’
근처 마을이 아니라면, 그는 도대체 어디서 엘리사를 데려온 것일까.
리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내려놓았다.
결국 다시 원점이었다.
*
건국제 당일이 밝았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신전까지 데려다줄 호위를 톰슨을 포함하여 네 명의 기사만 대동하기로 했다.
신전 안에서는 무기를 소지할 수 없어 기사들은 보통 들어가지 않는데다, 모두가 신전으로 모이는데 기사단을 대동하고 가면 신전 앞이 복잡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건국제에 참가하는 귀족들은 가급적 호위 기사를 단출하게 대동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두 분.”
두 사람을 배웅하러 나온 그레이슨이 마차의 문을 닫았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리하르트는 언제나처럼 엘리사가 느끼는 마차의 진동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녀의 등과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채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쐬며 창밖을 구경하던 엘리사가 리하르트를 슬쩍 훔쳐보았다.
그는 급하게 검토해야 할 서류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서류를 읽는 그의 표정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심했다. 저를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눈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 위로, 며칠 전 제게 입을 맞추고 속삭이던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런 짓 아무나랑 안 해, 난’그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당시엔 리하르트가 아이의 태동을 처음으로 느꼈다는 기쁨에 젖어 잊어버렸지만, 그날 이후 내내 의미를 묻지 못한 그의 말이 생각났다.
‘당연한 소릴! 당연히 아무나랑 그런 짓 하면 안 되지! 엄연히 아내가 있는데!’
하지만 그는 단순히 그의 정절을 의심한 것 때문에 화가 났던 것 같진 않았다.
그 순간,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리하르트가 나를…….’
그 작은 가능성만으로도 가슴이 쿵쿵, 달음박질했다.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 다시 묻기엔 너무 늦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물어보기 무서워..’
만약 그 가능성이 제 망상일 뿐이라면.
자신이 그의 몸을 원했던 것처럼, 그저 본능적인 욕망일 뿐이라면.
그런 거라면, 내 마음은 어떨까.
‘아니, 왜 그 대답을 무서워하는 건데?’
제 감정에 의문을 가지던 그때, 서 서류를 검토하던 리하르트가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엘리사?”
“어……?”
불시에 마주친 그의 두 눈에, 엘리 사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제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할까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고 싶은 말 있어?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길래.”
“어……. 그게…….”
잠시 진땀을 흘리던 엘리사가 적당한 이야깃거리를 생각해 냈다.
“그, 그러고 보니 내가 건국제에 참석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 넌 건국제에 참석한 적 있어?”
“공작가에 들어온 그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석했었지.”
“어땠어?”
“지루해.”
그의 직설적인 후기에 엘리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건국제가 어떤 행사인지 바로 이해가 되는 대답이었다. 그다웠다.
리하르트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엘리사의 배에 손을 얹었다.
아이의 태동을 처음 느낀 그날 이후, 그는 엘리사의 곁에 있을 때면 습관처럼 배에 손을 올리곤 했다.
“혹시라도 배가 당기거나 피곤하면 참지 말고 바로 이야기해.”
“걱정 마. 우리 아기는 아빠 닮아서 아주 튼튼하거든.”
엘리사의 말에 동의하듯, 배 속의 아이가 통통 배를 찼다.
그것을 느낀 엘리사와 리하르트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마차가 신전 앞에 도착했다.
“각하, 마님. 도착했습니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신전 앞엔 이미 많은 귀족 가문의 마차들이 도착해 있었다.
가문의 문양이 각양각색으로 그려진 마차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가문이 하나 있었다.
‘다이온 후작가?’
다이온 후작과 미카엘라는 기껏해야 호위를 넷 거느린 다른 귀족들과 달리, 기사단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가뜩이나 북적거리는 신전 앞에 기사단을 거느리고 나타난 건 민폐나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리하르트는 다이온 후작의 뻔질거리는 얼굴을 보고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부인, 그리고 공작 각하.”
올리비아였다.
그녀 역시 엘리사, 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건국제에 걸맞은 흰색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옆엔 아직 미소년이라는 말이 더 가까운 남자가 마찬가지로 흰 예복을 입고 서 있었다.
남자는 엘리사와 리하르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예의를 갖추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 부인. 공작 각하. 세드릭 벨테인이라고 합니다.”
“아, 소후작님이시군요. 익히 듣던 대로 미남이시네요.”
“하하, 제국 제일 미남을 남편으로 두신 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끄럽네요……….”
엘리사가 웃으며 인사치레를 하자, 그런 엘리사를 멍하니 보던 세드릭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리하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어머니께 많이 들었습니다. 어머니와 제 동생이 신세를 많이 졌다고요.”
“어머, 아니에요. 제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텐데요.”
“언제 한번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괜찮으신 날 저희 저택으로 모시지요.”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좋다고 대답하기 전에 화두를 돌렸다.
“소후작도 이제 슬슬 혼처를 정해야 하지 않나? 이쯤이면 혼담이 꽤 들어오고 있을 텐데.”
남의 여자 눈독 들이지 말고 네 짝 찾아가라는 의미였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어 좀 더 그녀를 단단히 감싸 안으며 세드릭을 경계했다.
마치 새끼를 보호하는 짐승처럼.
올리비아와 세드릭을 바라보느라 리하르트의 표정을 못 보고 있는 엘리사만 그 서늘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올리비아가 재미있다.
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 부인이 인기가 많아서 각하께서 속 좀 끓이시겠네요.”
“네?”
“농담이에요. 이제 시간이 되었으니 들어갈까요?”
다섯 사람은 차례로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중앙 예배당은 신전의 중심이 되는 건물인 만큼 그 규모가 웅장했다.
각 유리창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와 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장엄함을 더했다.
빛이 모여드는 거대한 예배당 앞쪽에는 강단이 있고, 그 가운데에 여신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앞은 이미 먼저 도착한 귀족들과 신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자리로 가서 건국제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이윽고, 강단 옆문에서 등장한 에이든이 강단 위에 올라섰다.
곧이어 닫혀 있던 신전의 문이 열리고, 빛과 함께 예복을 갖춰 입은 황제가 들어섰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귀족들이 일제히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리하르트와 엘리사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성큼성큼 걸어가 강단 위에 올라섰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해 준 선대께 무한한 영광을 돌리고 앞으로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함이오.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 주길 바라오.”
건국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