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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78화 (78/164)

78화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여신께 바치는 에이든의 헌사와 신의 곁으로 돌아가 신의 아들이 된 초대 황제 및 초대 가주들에게 바치는 황제의 헌사가 이어졌다.

다음은 신전 아이들의 찬가가 이어졌다.

새하얀 법복을 입은 아이들이 열을 맞춰 노래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흔흔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엘리사는 문득 깨달았다.

‘리온은 역시 없구나.’

가발을 쓰고 있으니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에이든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리온을 별관에 머물게 조치한 듯했다.

성가대 아이들은 총 세 곡의 찬가를 부른 후, 옆문으로 퇴장했다.

다음 순서는 연극이었다.

잠시 무대를 정리하는 듯하더니, 전문 극단의 배우가 나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연극을 시작했다.

연극은 건국제에 걸맞게 건국에 기여한 네 가주의 영웅담을 담은 이야기였다.

“먼 과거, 이 땅이 마왕에게 지배를 받던 시기. 마왕의 치세에 마족들은 인간들을 무자비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그를 안타까워한 여신은 자신의 힘을 세 명의 아이에게 나누어 주며 명했다.”

세 명의 아이, 라는 단어가 나오자 무대 옆에서 세 명의 아이가 차례로 등장해 여신상 앞에 섰다.

아이들은 누구인지 알아보기 쉽게 루벨린을 상징하는 아이는 흑발 가발을, 세리어트를 상징하는 아이는 금발 가발을, 그리고 에스더를 상징하는 아이는 은색 가발을 쓰고 있었다.

“너희가 마왕을 몰아내고 평화를 찾아 이 땅의 가여운 인간들을 구해 주어라.”

아이들은 훌쩍 자라 마왕의 폭정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왕은 좀처럼 허점을 보이지 않았고, 세 가주는 점점 지쳐 가기 시작했다.

그때, 무대 한쪽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세 가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이로트를 상징하는 적발을 가진 남자였다.

“마지막으로 홍염의 힘을 이어받은 카이로트가 나타나 그들을 돕기로 했다.”

세 가주는 카이로트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힘을 합쳐 마왕을 무찌르고, 마족들을 오염된 땅에 전부 가두었다.

엘리사는 그 장면을 의구심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가 전부 다 진실일까?’

역사는 결국 승자의 기록이다.

현재 제국의 황제는 카이로트의 후손이니, 이 연극 역시 카이로트를 영웅으로 각색했을 확률이 높았다.

“이 땅에 처음으로 평화가 찾아왔다. 인간들은 기뻐했고, 네 가주를 추앙했다. 네 가주는 모두를 위한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했다.”

네 가주들 중 카이로트의 가주가 왕관을 썼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염된 땅에 갇혀 있던 마족들과 마물들이 오염된 땅에서 나와 인간들을 마구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오염된 땅에 갇힌 마족들은 힘을 되찾았고, 오염된 땅의 결계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세리 어트 가문의 초대 가주 아리에이 앞으로 나섰다.

“초대 왕, 록시온 카이로트를 사랑했던 세리어트의 가주 아리엔은 그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오염된 땅에 정화의 호수를 만들었고, 마족과 마물들은 잠잠해졌다.”

아리엔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음을 맞이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엘리사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죽어 가는 아리엔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어쩐지 가슴이 옥죄이는 듯 아팠다.

‘제네, 이드…….’

무심코 떠오른 이름을 되뇌던 엘리 사는 흠칫 놀랐다.

‘제네이드? 누구의 이름이지?’

문득 떠오른 낯선 이름에 의아해하던 그때,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아.”

엘리사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임신으로 인해 감정 이입을 깊게 한 모양이었다.

연극을 보고 있던 리하르트가 그런 엘리사의 기색을 느낀 것인지 그녀를 돌아보고 흠칫 놀랐다.

“엘리사?”

“아, 미안. 내가 너무 이입했나 봐.”

엘리사는 황급히 눈물을 닦아 내려 했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손이 더 빨랐다.

“저건 그냥 연극이야. 괜찮아.”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눈물을 닦아준 후,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여 주었다.

그의 온기를 느끼자, 가슴에 남아 있던 아릿한 슬픔이 금세 가셨다.

눈물을 추스른 엘리사는 다시 연극에 집중했다.

“세 가주는 아리에의 희생에 슬퍼하며 -”

나레이터가 말을 이어 가던 그때, 갑자기 신전의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그곳에 모였다.

성기사단장을 비롯한 성기사단이 다급히 신전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 피하셔야 합니다! 몬스터들이 신전 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날벼락과도 같은 소식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몬스터들은 보통 출입이 금지된 숲에 가야 볼 수 있었다.

이따금 아카로아 변두리의 숲길을 지날 때 출몰해 상단을 공격하곤 했지만, 마을에 쳐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몬스터들이 신전으로 몰려오고 있다니.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황제를 비롯한 모두가 믿기지 않는 듯 성기사단장을 바라보고 있던 그때, 그의 옆으로 황실 기사단장이 다급히 들이닥쳤다.

“폐하, 황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우왕좌왕 신전을 나서기 시작했다.

“엘리사, 나가자.”

리하르트는 서로 밀치고 나가기 바쁜 사람들에게서 엘리사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단단한 그의 몸은 엘리사를 완벽히 보호하는 방패가 되어 주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안고 신전 밖으로 나왔다.

신전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신전 주변은 이미 몬스터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꺄악!”

“살려 주세요!”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은 신전 근처 빈민촌 사람들의 비명이 곳곳에서 들려왔으나, 각 가문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주인과 함께 자리를 떠나기 바빴다.

황제와 크리스티안, 황후와 로제는 다이온 후작 휘하의 기사들에게 호위를 받으며 마차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빈민촌의 사람 하나가 크리스티안의 앞길을 트고 있는 기사를 붙잡고 도움을 요청했다.

“도도와주세요! 아이가 집 안에…!”

“이게 미쳤나! 내가 살아야 이 제국이 살 거 아냐? 네 새끼는 네가 구해!”

크리스티안은 기사를 붙잡는 여자를 밀어내고 재빨리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황실 가족들을 태우자마자 곧장 출발했다. 다이온 후작가의 기사들이 그 뒤를 엄호하며 따랐다.

남겨진 여자는 집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몬스터들이 부수고 있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순간, 성기사단이 그녀를 막아서고 대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사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각하! 마님!”

몬스터들의 체액이 묻은 검을 쥔 톰슨과 루벨린의 기사들이 다가왔다. 몬스터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던 듯했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이쪽에 병력이 그리 많지 않아 금방 뚫릴 겁니다.”

“……알았다.”

리하르트는 서둘러 엘리사를 마차로 데려가려 했다.

그 순간, 엘리사가 리하르트의 팔을 붙잡았다.

“리하르트, 저 사람들을 구해 줘.”

간절한 목소리였다.

“너는 할 수 있잖아.”

“…….”

“성기사단으로는 부족해. 이대로 가면, 저 사람들은 ……….”

말끝을 흐리는 엘리사의 두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 눈빛에 리하르트는 잠시 흔들렸으나,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겐 네 안전이 먼저야.”

“나한텐 톰슨 경이 있잖아. 난 먼저 마을로 갈게. 네가 여기서 막아주면 마을 안까지는 몬스터들이 오지 못할 거야.”

“마님은 저희가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톰슨이 엘리사의 말에 동조했다.

엘리사와 톰슨을 번갈아 보던 리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엘리사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마님의 분부대로.”

바라던 그의 대답에 엘리사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감싸쥐었다.

“조심해.”

리하르트는 톰슨에게 엘리사를 맡기고 돌아서 몬스터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몇 발짝 떼기도 전에, 근처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머리 위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느껴졌다.

리하르트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새 형태의 몬스터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오닉스? 저 녀석들은 숲에서 벗어나지 않는 녀석들인데…’

그때, 뒤에서 톰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오닉스가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엘리사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 발톱이 엘리사를 공격하려는 순간, 톰슨이 재빠르게 엘리사를 감싸고 넘어졌다.

다른 기사들은 2차 공격에 대비해 검을 하늘 위로 치켜들며 엘리사를 보호했다.

“엘리사.”

그 광경을 목격한 리하르트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위를 올려다보자, 족히 대여섯 마리는 되어 보이는 오닉스들이 공격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피어올라 그를 잠식했다.

그에게서 무서운 속도로 뻗어 나간 검은 기운은 순식간에 오닉스 무리를 집어삼켰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고마워요, 톰슨 경.”

톰슨은 엘리사의 상태를 살폈다.

엘리사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톰슨이 보호해 준 덕에 아기에게도 큰 무리가 가진 않은 듯했다.

톰슨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던 그때, 엘리사의 시야에 리하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리하르트?”

검은 기운에 잠식된 그의 모습이.

그에게서 뻗어 나간 검은 힘은 오닉스들을 땅으로 떨어트렸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왜인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엘리사는 이 불길함의 이유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그에게 다가섰다.

“리하르트, 안 돼!”

엘리사의 목소리를 들은 리하르트가 멈칫했다. 그의 힘도 잠시 주춤했다.

엘리사는 다급히 다가가 그를 끌어 안았다.

“난 괜찮아.”

엘리사의 온기가 닿자, 그에게서 뻗어 나오던 검은 힘이 사라졌다.

대신 등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큭….”

리하르트는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때마침 사람들에게 밀려 뒤늦게 신전 밖으로 나온 에이든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보인 건, 검은 힘을 사용하고 있는 리하르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힘을 잠재우는 엘리사의 모습도.

엘리사가 리하르트를 끌어안는 순간, 엘리사에게 새어 나온 희미한 빛이 리하르트에게 스며들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검은 힘이 사그라들었다.

그것을 본 에이든의 눈빛이 흔들렸다.

‘방금 그건…….’

엘리사에게서 나온 그 빛은 분명, 신성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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