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먼저 마차에 태워 보내고 날아서 공작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당분간은 북쪽 별채에 머물며 엘리사와 거리를 두기로 했다.
방으로 돌아온 엘리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가 있는 별채 쪽을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그의 빈자리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리하르트…….’
그때, 배 속의 아이가 통통거리며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꼭 저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아빠는 저기 있지만, 자신은 엄마곁에 있으니 외로워하지 말라고.
엘리사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배를 어루만졌다.
“응, 엄마가 아빠를 구할 거야.”
그를 별채에서 데려오려면 그가 사용하던 불길한 힘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별채로 가기 전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오닉스는 숲 깊은 곳에 사는 몬스터들이야. 겁이 많은 성격이라, 늦가 을에 대륙 남단으로 이동할 때가 아니면 그곳에서 나오지 않지.’
그런 습성을 가진 몬스터들이 어째서 마을까지 온 거지?’
‘아마 숲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겠지.’
갑자기 사람이 사는 마을까지 온 겁이 많은 몬스터들, 그리고 평소와 다른 공격적인 성향.
그 두 가지를 조합해 본 엘리사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누군가가 오닉스들을 일부러 신전으로 끌어들인 거구나.’
대체 누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현재 제도 외곽에서 몬스터들의 침입을 막고 정리하는 일을 맡고 있는 건 리하르트였다.
자칫 잘못하면 리하르트에게 불똥이 튈 확률이 높았다.
‘숲에 무슨 일을 벌였다면, 숲에 그 증거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
생각을 마친 엘리사는 숲을 조사할 사람을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 설렁줄을 당겼다.
잠시 기다리자, 노크 소리와 함께 앤이 들어왔다.
엘리사는 건국제를 맞이하여 앤을 포함한 하녀들에게 건국제를 즐길수 있는 여가 시간과 용돈을 줬었다.
앤은 귀가하자마자 곧장 엘리사에게 달려온 것인지, 아직 외출복 차림이었다.
“마님!”
앤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와 엘리사의 상태부터 살폈다.
“괘, 괜찮으신 거죠? 몬스터들이 신전을 습격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응, 난 괜찮아.”
“다행이에요! 설마 하는 마음에 걱정이 돼서….”
엘리사는 먼저 제 걱정부터 하는 앤의 마음이 기특해서 웃었다.
그러다 앤이 손에 쥐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언뜻 보기엔 향수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건 뭐니? 쇼핑한 거야?”
“아, 이거요. 몬스터 퇴치제인데, 돌아오는 길에 광장 곳곳에서 팔고 있더라고요.”
“몬스터 퇴치제?”
“네. 몬스터들이 기피하는 향으로 만든 거래요. 혹시 몰라서 몇 개만 샀는데, 효과가 좋으면 대량으로 구매하면 어떨까 해서요. 물량이 많지 않아서 정말 어렵게 샀어요.”
엘리사는 미심쩍은 눈으로 몬스터퇴치제를 바라보았다.
비가 오면 우산을 팔고 해가 쨍한 날에 양산을 파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으나, 몬스터 퇴치제는 제대로 상용화가 되지 않은 물건이었다.
그저 사람들의 공포심을 이용해 아직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가짜 물건을 팔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앤, 네 마음은 기특하지만 이건 실제 효과가 없는 가짜일 거야. 때 마침 한몫 당기려는 사기꾼의 농간인 거지.”
“하, 하지만 그 상단에서는 황제폐하의 인증서를 보여 주던걸요.”
“황제의 인증서를 가지고 있었다.
고?”
앤의 말에 엘리사는 놀랐다.
황제의 이름을 사칭한 자는 사형에 처해진다.
그 때문에 아무리 사기꾼이라 해도 감히 황제의 이름을 사칭하는 자는 없었다.
즉, 앤이 몬스터 퇴치제를 사 온 상단에서 내걸었다는 황제의 인증서가 진짜라는 뜻이었다.
‘수상해.’
몬스터 퇴치제는 보편적으로 상용 화된 물품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치 상황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황제의 인증서를 받은 몬스터 퇴치제가 나타나다니. 상당히 미심쩍었다.
잠시 생각하던 엘리사는 앤에게 말했다.
“앤, 톰슨 경을 불러 줄래?”
*
다음 날, 황제는 모든 귀족들을 회의에 소집했다. 전날 몬스터들이 신전을 습격한 건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리하르트는 가급적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려 했으나, 어깨의 통증이나 상태가 불안정하진 않은 것 같아 그 부름에 응했다.
하지만 알현실에 도착한 순간, 황제가 귀족들을 소집한 ‘진짜 목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루벨린 공, 짐은 공에게 제도 외곽의 치안에 관한 일을 일임했었다.
그대를, 루벨린을 믿었기에 그리한 것이었지.”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리하르트에게로 모였다.
“한데, 공이 내 믿음을 저버리고 치안을 정비하는 일에 소홀히 한 바람에 이런 애석한 참사가 일어났다.”
“…….”
“이번 일에 관한 책임을 루벨린 공작에게 묻겠다.”
다이온 후작은 황제가 리하르트를 몰아세우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이 많은 귀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잘못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분명 루벨린의 명성에 크게 금이 가는 일일 터였다.
그러나 리하르트는 예의 무심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게 책임을 물으시기 전에, 폐하께서 봐 주셔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황제는 의아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톰슨.”
리하르트는 대답 대신 근처에 대기 중이던 톰슨을 나직이 불렀다.
그러자 톰슨이 무언가가 든 상자를 가져와 황제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상자를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성인 여자의 주먹 크기 정도 되는 알이었다.
“동쪽 숲 깊은 곳에 사는 오닉스라는 조류형 몬스터의 알입니다. 초겨울이면 남쪽으로 날아가 겨울을 보내고 오긴 하지만, 평소엔 숲을 벗어나지 않는 녀석들이죠.”
“그 몬스터의 습성은 알겠어. 그런데 이 알을 왜 가져온 거지? 이번 사태와 관련이 있나?”
“네. 이 알이 신전 근처의 풀숲에서 발견되었으니까요. 오닉스들은 자신들의 알을 찾으러 평소 오지 않는 마을까지 온 겁니다.”
그 말은 즉, 누군가가 몬스터의 알을 일부러 신전 근처에 숨겨 놓았다는 뜻이었다.
리하르트의 말에 귀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의심에 못을 박듯, 리하르트가 결론을 덧붙였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번 일을 꾸민 것이죠.”
리하르트의 말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 일이 그저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리하르트에게 한 방 먹일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건만, 기대가 어그러지자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황제는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런 짓을 꾸민단 말인가?”
“그런 일을 벌여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자가 현재로서는 딱 한 명 있죠.”
“그게 누구지?”
“이번 몬스터 출몰로 가장 큰 이득을 남기고 있는 마젠타 자작입니다.”
리하르트의 입에서 ‘마젠타’ 라는 이름이 나오자, 다이온 후작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는 몬스터들을 신전으로 끌어들여 공포감을 조성했습니다. 자신이 발명한 몬스터 퇴치제를 팔기 위해서.”
“…….”
“변방에 사는 가난한 평민들보다는 기본적으로 재산이 많은 귀족들을 노리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 될 테니, 귀족들이 제도 변방의 신전까지오는 건국제야말로 절호의 기회였겠죠.”
제도 안쪽에 사는 귀족들의 거주지를 몬스터들이 습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건국제 전날, 마젠타 자작이 대량의 상마차를 빌렸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그 전날 비가 꽤 내렸으니, 마차 바퀴에 묻은 진흙의 성분을 조사하면 목적지가 동쪽 숲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귀족들은 이 자리에 없는 마젠타 자작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마젠타 자작? 그자가 누구지?”
“제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감히 황제 폐하와 우리를 위험에 빠트리다니!”
마젠타 자작가는 작위가 낮아 귀족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데다, 줄줄이 사업을 말아먹는 바람에 귀족들 사이에서도 큰 영향력이 없어 모르는 이가 많았다.
그때, 누군가가 이야기를 꺼냈다.
“아, 혹시…… 다이온 후작의 숙부가 아닌가?”
다이온 후작의 숙부라는 이야기를 들은 귀족들은 언제 분개했냐는 듯 황제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다이온 후작은 황제의 사위였으니까.
적막 속에서, 제 발이 저린 다이온 후작이 다급히 황제의 앞으로 나섰다.
“폐하, 공작은 지금 지나친 비약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상황이 우연히 맞물렸을 뿐입니다. 몬스터들의 공포로부터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숙부에게 이런 모함을 하다니요?”
“비약이라.”
잠자코 후작의 말을 듣고 있던 리하르트가 이죽거렸다.
“지금부터 ‘진짜 비약’을 해 보죠.”
리하르트는 다이온 후작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사업이 연이어 망한 마젠타 자작에게 이런 일을 벌일 돈이 어디서 났을까요?”
“……”
“그 돈이 왜 마침, 다이온 후작을 만난 직후에 생겼을까요?”
리하르트가 자신을 배후로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다이온 후작이 펄쩍 뛰었다.
“지,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요?”
“설마 그 돈을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고 빌려주진 않았을 테니까.”
“난 몰랐소! 그저 사업에 쓸 돈이 필요하다고만……!”
리하르트는 다이온 후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을 본 다이온 후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젠타 자작이 그 돈을 어디에 얼마나 사용했는지 내역이 적혀 있는 장부입니다. 다이온 후작에게도 똑같은 내용의 장부가 있을 겁니다.”
“폐, 폐하! 저 장부는 거짓입니다.
저를 모함하기 위해 조작한 것입니다!”
사색이 된 다이온 후작은 황제의 앞에 엎어졌다.
그 순간,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루벨린의 기사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얼굴에 포대를 뒤집어씌운 누군가를 데려와 리하르트의 앞에 무릎 꿇렸다.
황제는 물론, 다른 귀족들의 시선까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집중되었다.
다이온 후작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리하르트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톰슨이 남자의 얼굴에 씌워져 있던 포대를 벗겼다.
포대에 가려져 있던 얼굴은, 다름아닌 마젠타 자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