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엘리사?”
리하르트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저를 불러내기 위해 창문을 깬 것 같았다.
다소 과격하고 황당한 행동이었지만, 어쩐지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리하르트는 웃음을 삼키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하지만 엘리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리하르트는 그제야 자신이 있는 방이 3층 높이임을 깨닫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일”
그러자 엘리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검지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해 보였다.
밤 시간이니, 조용히 하라는 뜻 같았다.
‘이미 요란하게 창문까지 깨 놓고…?’ 리하르트는 말과 행동이 다른 엘리 사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으나, 잠자코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엘리사는 리하르트를 조용히 시킨 뒤, 가져온 스케치북을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화단에 쪼그리고 앉아 무어라 적더니, 다시 그를 향해 들었다.
옆에 있던 앤이 엘리사의 스케치북을 따라 힘겹게 등불을 치켜들었다.
[자고 있었어?]
리하르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엘리사는 다음 페이지로 넘겨 또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저녁은 먹었어?]
사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문제와 엘리사에 대한 걱정으로 식욕이 없어 먹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사실대로 말했다간 그녀가 걱정할 것을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을 들은 엘리사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엘리사는 다시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적어 들었다.
[불편한 건 없고?]
불편한 건 그녀를 보지 못하는 마음뿐이었다.
리하르트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또 다른 말을 적어 그에게 보였다.
[내가 금방 별채에서 꺼내 줄게!
조금만 참아.]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엘리사의 표정은 결의에 차 있었다.
밤낮으로 모든 책과 기록을 뒤지는데도 정보가 없는 것을 보면 그리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엘리사를 보자 정말 일이 금방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 기분을 북돋아 주려는 그녀의 모습이 숨 막히게 사랑스러웠다.
리하르트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에 흡족해하던 엘리사는 또다시 스케치북에 쓰기 시작했다.
리하르트는 부른 배를 안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엘리사가 힘들어 보여 이제 그만했으면 했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잠시 기다리자, 엘리사가 다시 스케치북을 들었다.
[사랑이가 아빠 보고 싶대.]
엘리사는 제 진심을 배 속의 아이를 앞세우며 숨겼다. 솔직하게 진심을 꺼내기엔 어쩐지 부끄러웠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종이비행기를 가지고 창문가로 돌아왔다.
리하르트가 만든 바람은 비행기를 싣고 살랑살랑 내려왔다.
엘리사가 손바닥을 내밀자, 급하게 접은 듯한 작은 비행기가 엘리사의 손바닥 위에 정확히 안착했다.
엘리사는 제 손바닥 위에 앉은 종이비행기와 리하르트를 번갈아 보다, 조심스럽게 종이비행기를 펼쳤다.
쪽지엔 익숙한 필체로, 짤막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도 보고 싶어.]
자신이 아니라 아기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가슴이 쿵쿵,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자꾸만 슬쩍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한 채 배시시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하르트는 저를 향해 환하게 웃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런 너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새 그의 입가에도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아카로아의 북동쪽, 엔릴 해를 접하고 있는 조용한 바닷가에는 검은 돌로 만들어진 높고 거대한 탑이 있다.
지식을 탐구하고 진리를 찾는 이들이 모여 만든 탑이었다.
사람들은 이 탑을 ‘진리의 탑’이라 불렀다.
진리의 탑은 해안가의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밀물 때가 되면 바닷물이 차올라 탑과 육지를 이어 주는 다리가 잠겼다.
그 때문에 진리의 탑은 자의든 아니든 자유로운 출입이 불가했다.
파도 소리와 바닷바람 소리만이 가득한 이곳은 지식을 탐구하고 진리를 찾아가는 이들에게 적합한 장소였다.
‘이 적막함도 오랜만이네.’
아가일은 커피를 마시며 망망대해가 펼쳐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리하르트의 명을 받고 사흘 전, 이곳에 도착했다.
리하르트의 힘과 오염된 땅에 관련된 정보를 찾기 위해서였다.
진리의 탑은 그 이름에 걸맞게 세계의 갖은 지식들이 기록된 책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시중에 유통되지 않는 책은 물론, 드넓은 바다 너머 다른 대륙의 책부터 나무껍질에 글자를 새겨 만든 고대의 책까지 다양한 책들이 있었다.
그 수많은 책들 중에 적어도 한 권쯤은 오염된 땅과 그 힘에 관한 정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곳에 온 것이었다.
아가일은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곳에 다신 돌아올 일 없을 줄 알았는데.’
그에게 진리의 탑은 고향이자,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아가일이 여섯 살이 되던 해, 그가 또래 아이들보다 학습 능력이 뛰어난 것을 알게 된 그의 모친은 이 탑에 그를 버렸다.
머리가 좋으니 이곳에 있으면 공부를 하고 밥을 얻어먹으며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모친이 간과한 점이 하나 있으니,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부모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진리의 탑에는 부모가 두고 간 아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오로지 학문에 몰두하는 학자들에게는 그 아이들을 전부 키울 능력도, 재력도 없었다.
그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아이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했다.
성적이 우수한 아이는 탑에 남고, 성적이 저조한 아이는 제도나 근방의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아가일은 또래 아이들보다 준수한 성적을 거두어 탑에 남았으나, 외롭게 자랐다.
정을 붙일 곳은 못 되었으니까.
학문에 미친 학자들도, 매달 친구들이 바뀌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나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아가일은 시험에서 일부러 저조한 성적을 받고 탑을 나왔다. 그리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루벨린 공작가였다.
그곳에서 아가일은 처음으로 공부 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에게 루벨린은 춥지만 시끌벅적 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제2의 고향 같은 곳이 되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이곳에 거부감은 안 드는군.’
아가일은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탑에 돌아왔음에도 크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 제 모습에 신기해했다.
이제 돌아갈 곳이 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이 책도 아닌가.’
빌려 온 책들을 앉은 자리에서 빠르게 훑어본 아가일은 책을 덮었다.
어제 빌려 온 책에도 원하는 정보는 없었다.
탑에 도착한 후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며 오염된 땅과 리하르트의 힘에 관한 정보를 찾아 헤맸으나, 아직 작은 단서조차 찾지 못한 상태였다.
아가일은 책들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탑의 도서관은 탑의 하단과 상단, 총 두 곳에 있었다.
아가일은 탑 상단에 있는 도서관으로 왔다.
도서관 중앙은 탑의 지붕까지 천장이 뚫려 있었는데, 유리로 만든 지붕으로 햇빛이 그대로 내리쬐어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가일은 도서관 위로 올라가기에 앞서 층별 안내문을 살폈다.
총 11층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은 층마다 분류가 나뉘어 있어 층별 안내문을 잘 살펴보고 올라가야 했다.
층별 안내문을 읽어 본 아가일은 미간을 찡그렸다.
‘하필 11층….’
오늘 그가 찾는 자료는 제일 위층인 11층에 있었다.
원하는 책이 있으면 11층에 대기 중인 사서에게 도서용 도르래를 이용하여 책을 내려 달라고 하면 되지만, 아가일이 살펴봐야 할 책은 방대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직접 계단을 올랐다.
“공부만 하는 골방 늙은이들 운동좀 시키려고 탑에 도서관을 만들었나….”
아가일은 구시렁거리며 11층에 올랐다.
11층은 꼭대기 층인 만큼 두어 명의 사서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었다.
아가일은 묵례하는 사서들을 지나쳐 책장들 사이로 들어섰다.
인적이 드문 층이어서인지, 꽂혀 있는 책마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신화와 역사…….”
한동안 중얼거리며 책장 사이를 헤매던 아가일은 마침내 자신이 찾던 분류의 책들이 꽂힌 책장을 발견했다.
그 책장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건 ‘신의 힘’에 대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아렌시아의 건국 신화 속 여신은 네 가주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아마 그것과 관련된 내용일 터였다.
‘새로운 정보가 있으려나.’
하지만 책의 내용은 아가일이 익히 알고 있는 기존의 신화 내용이었다.
아가일은 책을 도로 꽂아 넣고 다른 책을 살폈다.
그때, 안쪽의 다른 책장이 눈에 띄었다.
그 책장은 가로로 길게 세워져 있는 다른 책장들과 달리 세로로 세워져 있었다.
아가일은 무심코 그 책장 앞으로 다가가 훑어보았다.
그중 왼쪽 구석에 꽂혀 있는 책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책등에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데도, 아가일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 책을 꺼냈다.
그러자 표지에 제목이 드러났다.
『최초의 왕, 제네이드』
무심코 책장을 넘기던 아가일의 눈빛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