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올리비아는 이른 아침부터 에이든을 찾았다.
며칠 전, 그가 부탁했던 물건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성하께서 부탁하신 물건이에요.”
“이렇게 급히 구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부인.”
에이든은 올리비아가 건네는 작은 약병을 건네받았다.
친자 검사를 할 수 있는 시약으로, 시중에선 상당히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물건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물었다.
“그런데 그건 어디에 쓰시려고요?”
“간곡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 주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올리비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든은 그런 올리비아에게 물었다.
“기도를 올리시겠습니까?”
“아니에요. 가뜩이나 이번 일로 바쁘실 텐데요. 기도는 다음에 올릴게요.”
올리비아는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은 부상자들을 돌보는 에이든을 배려해 곧장 신전을 나섰다.
올리비아를 배웅하고 별관으로 돌아온 에이든은 테이블에 시약을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의 사람이라면 마법을 사용하지는 못해도, 누구나 체내에 일정량의 마나를 가지고 있다.
시약은 주위 생명체의 마나를 빨아들이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마나는 제각각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과 정반대의 마나를 만나면 서로를 밀어내며 굳어졌다.
반대로, 가장 유사한 성질을 가진 마나와 섞이면 푸르게 변하며 융합되었다.
친자 검사 시약은 바로 이러한 특징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에이든은 테이블위의 책을 펼쳤다. 책엔 긴 금발 머리가 곱게 껴있었다.
일전에 챙겨 두었던 엘리사의 머리카락이었다.
에이든은 평평한 접시에 엘리사의 머리카락과 자신의 머리카락을 나란히 올려 두고 그 위에 시약을 떨어트렸다. 스포이트를 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 개의 머리카락 위에 시약을 떨어트린 에이든은 시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과를 보고 싶은 마음과, 보지 않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어떤 결과를 원하는지 스스로도 알수 없었다.
영겁과도 같은 찰나의 시간이 흘렀다.
시약은 아직 굳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시약이 서서히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에이든의 눈빛이 흔들렸다.
문득, 언젠가 율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첫째는 딸이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을 닮은 딸’이왕이면 자신의 평범한 갈색 머리 보다는 금발이었으면 좋겠다며 환하게 웃던 율리아의 모습 위로 엘리사의 모습이 겹쳐졌다.
딸아이는 그녀의 바람대로 그의 금발을 닮았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그녀의 싱그러운 녹안을 닮았다.
아이는 그들의 모습을 꼭 반씩 간직한 채 태어났다.
두 사람이 바랐던 대로,
“아아….”
어느덧 진한 푸른빛으로 변한 시약을 바라보는 에이든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딸아이가 저와 그를 반씩 닮았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채 죽어 갔던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사실에 에이든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
리하르트는 건국제 이후 일주일에 두 번씩 에이든을 만나고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일시적이나마 자기 몸속의 불길한 힘을 정화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그 목적으로 신전을 방문했다.
“자주 뵙는군요, 공작 각하.”
신전에 들어서자, 마침 근처를 지나고 있던 신관 하나가 리하르트의 얼굴을 알아보고 알은체했다.
리하르트의 힘에 관련된 이야기는 엘리사와 아가일, 톰슨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에이든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신관들은 그가 그저 신전에 자주 기부하러 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리하르트는 그에게 살짝 묵례를 하고 잠시 기다렸다.
신전 출입문 쪽을 바라보는 모습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신관은 그런 리하르트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기다리시는 분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가 묻기가 무섭게, 신전 출입문쪽에서 엘리사가 등장했다.
신관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엘리 사에게 웃으며 묵례를 하고 멀어졌다.
리하르트는 신전의 계단을 올라오느라 부쩍 가빠진 숨을 내쉬는 엘리 사를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몸이 무거워진 엘리사가 움직이는 것이 걱정되어 따라오지 말라고 했지만, 엘리사는 정화를 한 직후면 그의 곁에 있어도 될 것 같아 기어이 따라온 것이었다.
엘리사는 제게 바람을 불어 보내는 리하르트에게 괜찮다는 웃어 보였다.
그런 엘리사를 물끄러미 보던 리하르트는 돌아서 에이든이 있는 별관으로 향했다.
그의 뒤를 엘리사가 따랐다.
“어, 아조씨다!”
별관에 도착하자, 마침 화단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던 리온이 리하르트를 발견하고는 에이든의 방으로 쪼르르 들어가 그를 불러냈다.
리하르트를 맞이하러 나온 에이든은 멀리서 따라오는 엘리사를 발견하고 시선을 멈췄다.
엘리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일순 동요했으나, 이내 차분히 가라앉았다.
“…오늘은 공작 부인께서도 함께 오셨군요.”
에이든과 눈이 마주친 엘리사는 미소 띤 표정으로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누나!”
리하르트와 에이든은 서로 비슷한 감정을 담은 눈으로 엘리사를 바라보다, 엘리사에게 달려가는 리온의 모습을 보고는 돌아섰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방으로 들어선 리하르트는 웃옷을 벗었다.
에이든은 리하르트의 상태를 살폈다.
왼쪽 등에 검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정화를 시키면 사그라들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그간 별문제는 없으셨습니까?”
“없었습니다.”
“통증은 좀 어떻습니까?”
“정화를 한 직후에 사라졌다가, 날이 지날수록 통증이 생깁니다. 물론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공작 부인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시겠군요. 가뜩이나 마음 편히 가지셔야 할 시기에.”
“제 불찰이죠.”
“최대한 몸을 사리셔야 했습니다.
처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니.”
언뜻 듣기엔 걱정으로 들리는 말이었으나,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의 어투가 묘하게 리하르트를 질책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윽고 정화를 마친 에이든이 리하르트에게 당부했다.
“이 문제가 해결이 되면 절대 부인의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태교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고요.”
리하르트는 의아한 눈으로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에이든이 저를 못마땅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의아했으나, 리하르트는 그저 제 기분 탓이려니 넘겼다.
정화 작업을 마친 두 사람은 별관건물을 나왔다.
별관 앞에서 리온과 놀고 있던 엘리사는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다가왔다.
“리하르트, 괜찮아?”
걱정 어린 눈이 그를 올려다본다.
“응. 괜찮아.”
리하르트는 그렇게 대답하며 바람에 헝클어진 엘리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그 손길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다정함이 묻어났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엘리사 역시 그의 앞에 있을 때 제일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이든이 엘리사에게 제안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걸으시겠습니까?”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 리하르트.”
리하르트는 정화의 힘이 남아 있는 이 귀한 시간에 짧게나마 엘리사와 떨어지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상대가 에이든이니 별수 없었다.
엘리사는 에이든을 따라 정원 쪽으로 향했다.
리하르트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햇빛 아래 반짝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묘하게 닮아 있었다.
*
신전의 정원은 루벨린 공작저의 뒤뜰에 비하면 규모가 작고 수수했지만, 노을이 드리운 작은 정원은 특유의 따스한 분위기가 있었다.
에이든은 엘리사를 나무 그늘 쪽으로 인도했다.
해 질 녘이라고 해도 여름의 볕은 제법 따가웠다.
엘리사의 보폭에 맞춰 걷던 에이든이 물었다.
“부인께서는 신성력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엘리사는 갑자기 신성력에 대해 묻는 에이든의 질문이 의아했으나, 알고 있는 대로 대답했다.
“잘은 모르지만, 성하께서 계신 세리어트 가문의 힘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럼 그 힘이 가문의 피를 이은 자들에게만 발현된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에이든은 한 화단 앞에 멈춰 섰다.
“이 꽃들에게 물을 주고 싶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엘리사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에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엘리사는 그의 말대로 손을 화단으로 뻗었다.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켜고 눈을 감았다.
‘이 꽃들에게 물을 주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뜬 순간, 아무것도 없던 손바닥에 맑은 물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제 손에 고인 물이 화단으로 흐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옆에서 에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성력은 보유자 주위의 위험한 기운을 본능적으로 정화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힘이라면 공작 각하의 곁에서 지내셔도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듯 차분한 목소리였다.
엘리사는 다시 에이든을 돌아보았다.
그 역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의 단정하지만,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눈으로.
엘리사는 짐작하고 있던 것을 물었다.
“…이 힘, 성하와 관련이 있나요?”
그렇게 묻는 엘리사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에이든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자신이 가족이라 믿었던 이들이 사실은 가족이 아니라면, ‘진짜’ 가족이 살아 있다면……….”
그는 말끝을 흐리며 말을 멈췄다.
그의 눈빛이 여러 감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두려움과, 죄책감과, 애틋함이 섞인눈.
엘리사가 그를 만난 이후, 그가 이렇게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에이든은 흔들리는 감정을 제어하듯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이십 년 만에 찾게 된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를 바라보는 엘리사의 연둣빛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