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84화 (84/164)

84화

#10. 잃어버린 것

“퐁퐁이는 친구 도롱이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도롱아, 우리 같이 보물을 찾으러 가자. 내가 보물 지도를 찾았어.”

그날 밤, 엘리사는 모처럼 리하르트의 품에 안겨 그가 읽어 주는 동화책 내용을 듣고 있었다.

건국제 이후 그와 함께 밤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지만, 그 사실에 반가워할 틈이 없었다.

지금 엘리사의 머릿속은 온통 에이 든에 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부인께서는 자신이 가족이라 믿었던 이들이 사실은 가족이 아니라면, ‘진짜’ 가족이 살아 있다면…….’

‘……그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시겠습니까.’

엘리사는 갑자기 생긴 아버지의 존재가 당황스럽고 얼떨떨했다.

에이든은 그런 엘리사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그저 지금까지 그래 왔듯 가끔씩 신전에 찾아와 주기만 해도 되니 부담 갖지 말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꺼낸 건 신성력이 나뉜 자신보다는 엘리사가 리하르트를 정화할 수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고, 단지 그뿐이라고 했다.

‘교황 성하가 내 아버지라니….’

엘리사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엘리사의 허리를 안고 있던 리하르트의 손이 움직여 엘리사의 손을 붙잡았다.

그 온기에 엘리사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그를 쳐다보았다.

리하르트는 걱정 어린 눈으로 엘리 사를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엘리사.”

“으응?”

“아까 신전에서 성하랑 무슨 얘기 했어?”

에이든과 대화한 이후부터 엘리사의 상태가 이상해졌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얘기해 줘.”

그는 잡은 제 손등을 가만가만 쓸며 저를 타일렀다.

아무래도 저가 심각한 고민이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단지 마음이 혼란스러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인데, 괜히 숨겨 그를 걱정시킨 것 같아 미안해졌다.

어차피 그에게 숨길 이유도, 숨길 생각도 없었다.

엘리사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리하르트, 있잖아………. 교황 성하가 내 아버지래.”

“뭐?”

“나한테 신성력이 있어서 너랑 같이 지내도 된다고 하신 거야. 그리고 내가 신성력을 잘 다루게 되면, 내가 네 힘을 정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대.”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잡고 있는 손을 펼쳐 그곳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손바닥에 한 방울씩 물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손바닥 가득 투명한 물이 고였다.

그 물을 멍하니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수렵제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아르덴 백작이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왔었어.”

“안셀이?”

리하르트는 안셀이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소르네티 별장에서 ‘엘리사 로엔그린’의 주치의를 만났던 것, 엘리사로엔그린은 이미 죽은 사람이며, 지금의 ‘엘리사 루벨린’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란 것까지.

“네가 충격받을까 봐 말하지 않았어. 그전에 네 ‘진짜’ 가족에 대한 정보도 찾고 싶었고.”

“……그랬구나.”

“내가 알아낸 건 알버트 루벨린이 신목의 숲에서 너를 데려왔다는 것, 그리고 신목의 숲 근방의 어느 마을에서도 네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것. 거기까지야.”

리하르트의 말에 엘리사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신목의 숲 근방의 어느 마을에서도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알버트가 자신을 신목의 숲에서 데려왔다니.

‘그럼 엘리사… 아니, ‘이 몸은 내가 빙의하기 전 12년 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지?’

사실 이미 지나간 과거고, ‘진짜 가족’을 찾았으니 이제 몰라도 상관은 없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12년간의 묘연한 행적이 의아하긴 했다.

엘리사가 ‘공백의 12년’에 의문을 품고 있던 그때, 리하르트가 물었다.

“네 기분은 어때?”

“내 기분?”

“진짜 아버지가 생긴 기분.”

예상치 못한 그의 물음에 엘리사는 눈을 깜빡이다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제겐 빙의 전 엘리사의 기억이 없으니, 부모에 대한 기억은 전생의 기억뿐이었다.

그리고 전생의 부모는 가족이라기엔 너무 멀고, 차갑고, 서로에게 상처만 주었던 이들이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가족을 그리워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아빠가 생겼다.

조금 차갑지만 올곧고, 다정하고, 존경스러운, 그런 아버지가.

하지만 아직은 그 존재가 낯설고 얼떨떨하기만 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좋은 분 같아.”

“…….”

“좀 더 알고 싶어. 아버지를.”

“그럼 내일 같이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가자.”

뜻밖의 제안에, 엘리사는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저조차도 낯설어하는 아버지를, 그는 온전히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제안이 싫지 않았다.

“응, 좋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엘리사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

다음 날, 중앙 예배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나온 에이든은 습관적으로 신전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그를 보좌하는 신관이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성하, 혹시 오시기로 한 손님이라도 있으십니까? 오늘 내내 출입구 쪽을 바라보시는 듯한데…….”

그의 예리한 물음에 에이든이 흠칫했다.

에이든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닙니다. 이만 별관으로 돌아가지요.”

신관은 그러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꽤 오랜 시간 에이든을 보좌했지만, 그가 누군가를 특별히 기다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모두에게 부드럽고 인자했지만, 동시에 모두에게 평등하게 무심했다.

최근에 그가 맡아 키우고 있는 리온을 제외하면.

신관이 에이든을 따라서 돌아서려던 그때, 출입구 쪽에 낯익은 얼굴이 등장했다.

“오, 루벨린 공작 부인께서 오셨군요.”

그 이름을 들은 에이든의 눈이 커졌다.

출입구 쪽을 돌아보자, 신관의 말대로 엘리사와 리하르트가 신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에이든과 눈이 마주친 엘리사는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그의 앞까지 다가와 섰다.

신관은 엘리사가 마냥 반가운지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부인. 요즘 부쩍 자주 뵙는 것 같아 기쁘군요.”

“안녕하세요, 실리카 신관님. 저도 신관님을 자주 뵈니 좋네요.”

“오늘은 어쩐 일로 찾아 주셨습니까?”

“아, 오늘은…….”

엘리사는 말끝을 흐리며 맞은편의 에이든을 바라보았다.

아직 두 사람의 사이를 공표하기엔 일렀다. 무엇보다, ‘아버지’라는 호칭이 어색하기도 했다.

“성하를 뵈려고 왔어요.”

“아하? 그럼 성하께서 기다리시던 분이….”

“실리카 신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시겠습니까?”

“아, 네. 그럼 세 분, 천천히 이야기 나누십시오.”

에이든은 신관의 말을 자르고 그를 먼저 돌려보냈다. 그리고 엘리사와 리하르트를 별관으로 데려갔다.

별관의 휴게실에 도착한 리하르트는 엘리사와 함께 에이든의 맞은편에 앉으며 엘리사의 기색을 살폈다.

그가 아는 엘리사는 누구와 만나는 주눅 들지 않고 곧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엘리사는 몹시 초조해 보였다.

평소와 달리 저렇게 초조해한다는 건, 엘리사가 그만큼 에이든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리하르트는 선뜻 말문을 열지 못하는 엘리사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며 먼저 운을 뗐다.

“정식으로 인사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장인어른, 어제 그냥 그렇게 돌아간 게 마음에 걸려서요.”

“아뇨, 괜찮습니다. 충분히 급작스럽고 당황스러울 만한 이야기였으니까요.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감사하군요.”

잠시 리하르트에게 대답한 에이든의 시선은 다시 엘리사에게로 향했다.

오늘 엘리사를 마주한 이후 줄곧 그랬듯이.

엘리사 역시 그런 그를 빤히 마주보고 있었다.

그런 엘리사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이든이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마, 말씀 편하게 하셔도 돼요.

성…… 아, 아니. 아… 버지.”

엘리사는 답지 않게 잔뜩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아버지’라는 호칭 역시 입에 붙지 않았다.

‘아버지 호칭을 어색해하는 거, 티많이 났겠지. 상처받으시려나…….’

엘리사는 제 실수에 입술을 꾹 깨물며 에이든의 기색을 살폈다.

하지만 에이든의 눈빛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누그러져 있었다.

“호칭은 부담 가질 필요 없단다.

네가 부르고 싶은 때에, 네가 원하는 호칭으로 부르면 돼.”

그의 다정한 말에서 최대한 자신을 배려해 주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런 그의 배려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이 편해지자, 긴장으로 잔뜩 굳어 있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엘리사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조금 전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저는 열두 살 이전의 기억이 없어요. 마차 사고를 당했고, 의식을 되찾았을 땐 루벨린 공작성에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 이이와 결혼을 했고, 줄곧 거기서 살았죠.”

엘리사의 이야기를 듣던 에이든의미간이 일그러졌다.

“..…사고를 당했다고?”

“선대께서 마차 사고라고 했지만, 아닐 수도 있습니다.”

리하르트는 에이든에게 알버트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엘리사의 출생의 비밀을 조사하며 자신이 알아낸 사실들을 이야기했다.

에이든은 그 이야기들을 들으면서도 엘리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엘리사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무사히, 건강하게 살아 있어 줘서 고맙구나.”

“저도 이제라도 만나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엘리사가 그를 안심시키듯 웃어 보이던 그때, 문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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