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똑똑. 계세여?”
리온의 목소리였다.
귀여운 목소리에 엘리사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똑똑 노크 소리를 입으로 말하는 것도 귀여웠고, 저가 가르쳐 준 대로 어딘가 들어가기 전에 노크를 하고 물어보는 것도 기특했다.
“들어와, 리온.”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고 리온이 들어왔다.
엘리사를 발견한 리온의 조그마한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누나!”
리온은 도도도 뛰어와 엘리사에게 찰싹 붙었다.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꼭 좋아서 어쩔 줄 몰라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았다.
엘리사는 그런 아이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하얀 찹쌀떡 같은 리온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자주 보는데 그렇게 반가워?”
“히히.”
리온은 엘리사를 올려다보며 히죽거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누나한테 보여 줄 거 이써!”
“응? 뭔데?”
“일로 와 바.”
리온이 밖으로 나가자며 엘리사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에이든과 이야기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엘리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에이든과 리하르트를 쳐다보자, 에이든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하르트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와.”
엘리사는 못 이기는 척 리온을 따라 방을 나갔다. 방엔 리하르트와 에이든,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
에이든은 엘리사가 나가고도 엘리 사가 나간 문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엘리사가 부담을 느낄까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애틋한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엘리사는 성하… 아니, 장인어 른을 많이 닮았습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에이든의 시선이 리하르트에게로 향했다.
“자신이 가진 힘을 정확히 알고, 그 힘으로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지켜 주려고 하죠.”
“…….”
“엘리사는 그런 아버지를 좋아하고 존경하니 금방 마음을 열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무뚝뚝했으나, 에이든은 사위가 저를 안심시키려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다려야지요. 이십 년이 그리 짧은 세월은 아니니까요.”
*
해 질 녘의 늦은 오후, 황태자궁에선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선뜻 이야기를 나누지도, 음식을 먹지도 못한 채 크리스티안의 눈치만 살폈다.
크리스티안은 만면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채 와인이 든 잔만 빙빙돌리고 있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그의 측근, 블레넘 백작 영식이 슬그머니 분위기를 전환하려 말문을 연 그때였다.
“전 -”
부르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리스티안은 빙빙 돌리고 있던 와인 잔을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집어 던졌다.
쨍그랑!
은으로 된 와인 잔이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어이쿠!”
그 소란에 귀족들은 모두 화들짝놀라 펄쩍 뛰었다.
“루벨린, 루벨린, 루벨린! 하여간 입만 열면 재수 없는 그 이름이 나와!”
크리스티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들은 귀족들은 그제야 크리스티안의 심기를 거스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오늘 낮, 크리스티안은 최측근들과 황궁의 기사들을 이끌고 건국제 때 몬스터들이 습격했었던 아카로아 외곽 지역으로 향했다.
뒤늦게나마 황태자가 두려움에 떠는 제국민들을 위해 몬스터 토벌에 나섰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이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그의 방문을 떨떠름해했다.
‘건국제 당일 날 루벨린 공작가의 기사님들이 오셔서 정리를 해 주고 가셔서…….’
황실 측도 루벨린 공작가에서 사람을 보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멀끔히 정리가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결국 몬스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돌아 나오는 길에는 영웅 놀이를 하며 놀고 있는 아이들과 마주쳤다.
‘내가 루벨린 공작님 할 거야!’
‘아냐, 내가 할 거야!’
아이들은 서로 리하르트 역할을 하겠다며 싸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크리스티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리하르트…….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린 크리스티안은 어금니를 으득 물었다.
귀족들은 황급히 크리스티안의 비위를 맞추었다.
“저, 전하. 그것들 말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암요! 무지몽매한 것들이라 전하께서 안 보이는 곳에서 이 제국과 저들을 위해 얼마나 힘쓰고 계신지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시어 몬스터들을 퇴치하러 가시지 않으셨습니까?”
귀족 영식들이 앞다투어 크리스티안의 비위를 맞추자, 언짢은 기색이 역력하던 크리스티안의 표정이 어느 정도 누그러들었다.
크리스티안은 언젠가 부황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의 마음을 가라 앉혔다.
“……폐하께선 말씀하셨지. 황제는 나서는 사람이 아니라, 명령하는 사람이라고.”
“폐하께서 백번 옳으신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서서 싸우는 건 루벨린 공작에게 명하실 일이지요.”
영식들이 제 편을 들자, 들끓던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리하르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기가 뒤틀렸다.
전쟁 영웅 소리가 이제 좀 잠잠해 지나 했더니, 또 이번 일을 계기로 백성들이 그를 영웅으로 인식하게 되지 않았나.
‘뭔가 그놈의 콧대를 눌러 줄 만한 일이 없나.’
생각에 잠긴 크리스티안의 손가락이 톡톡, 탁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그럼 금요일에 또 올게요.”
엘리사는 신전을 나서기 전, 에이 든에게 말했다.
에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사와 리하르트를 배웅했다.
“그래, 그럼 그때 보자꾸나.”
하지만 신전 밖까지 두 사람을 배웅할 순 없었다.
에이든은 적어도 당분간은 엘리사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자 했다.
이십여 년 만에 세리어트의 힘을 이어받은 후계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제국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 자명했다.
귀족들은 자신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가문이 하나 더 등장한다는데 반감을 가질 것이고, 특히나 세리어트 가문을 약화시킨 장본인인 황제는 더욱 그럴 터였다.
에이든은 엘리사가 출산을 하고 몸을 추스를 때까지만이라도 이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그에겐 가문이나 복수보다 이십여 년 만에 겨우 찾은 딸아이가 더 소중했다.
그러니 신전의 이들에게도 당분간은 비밀에 부쳐야 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리하르트는 에이든에게 가벼운 목례를 한 후, 엘리사를 데리고 신전을 나섰다.
에이든은 두 사람이 신전을 나가고도 한동안 그 자리에서 지켜보다가 돌아섰다.
막 별관에 들어서려 할 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하.”
뒤돌아보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올리비아가 보였다. 오늘은 그녀의 딸 리제도 함께였다.
에이든은 미소 띤 얼굴로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부인. 그리고 오늘은 영애께서도 오셨군요.”
“네. 오늘은 우리 아가씨께서 성하께 볼일이 있으셔서 온 거거든요.”
올리비아의 말에 에이든은 의아한 눈으로 리제를 바라보았다.
리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품에 안고 있던 것을 에이든에게 내밀었다.
길쭉하게 생긴 꽃병이었다.
리제의 의도를 몰라 어리둥절하던 에이든은 꽃병이 움직일 때 나는 짤랑짤랑 소리를 듣고 그 꽃병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이거…… 기부하고 싶어요.”
“내일이 우리 아가씨 생일이신데, 생일을 기념해서 무얼 하고 싶냐고 물으니 기부를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올리비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설명을 들은 에이든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제 나름대로 열심히 모았을 용돈을 기부하겠다는 꼬마 아가씨의 마음씨가 기특하고 어여뻤다.
“정말 제가 받아도 되겠습니까?”
에이든이 리제와 눈높이를 맞추고 앉으며 묻자, 리제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은 흔쾌히 꽃병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영애. 영애의 마음은 꼭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쓰일겁니다.”
에이든의 말에 리제는 뿌듯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에이든은 그런 리제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올리비아를 돌아보았다.
“선물을 하나 사려고 하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선물이요? 누구에게 주시려고요?
저는 아닐 테고.”
“………일전에 도움을 받은 분이 있어 마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영애께도 선물을 사 드려야겠군요.”
“혹시…… 그 사람이 루벨린 공작부인인가요?”
올리비아가 묻자, 에이든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정답을 맞힌 모양이었다.
올리비아는 의외라는 듯 그런 에이 든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알기로, 그가 누군가를 위해 직접 선물을 고르는 건 율리아이후 처음이었다.
올리비아는 그것이 의아했으나, 흔쾌히 그의 부탁을 들어주마 나섰다.
“성하의 부탁이신데, 기꺼이 도와드려야지요.”
*
리하르트와 엘리사가 탄 마차가 공작저로 들어섰다.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추고, 리하르트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엘리사를 조심스레 안아 내렸다.
대기 중이던 기사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집사는 인사했다.
“다녀오셨습니까, 각하. 마님.”
“그동안 별일은 없었나?”
“예. 두 분,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때 마차 소리가 들리더니 또 한번 공작저의 거대한 철문이 열렸다.
리하르트와 엘리사의 시선이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공작저로 들어온 건 당연히 루벨린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였다.
마차는 리하르트와 엘리사가 타고 온 마차 옆에 멈춰 섰다.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리고, 사람이 내렸다.
“다녀왔습니다, 각하. 마님.”
진리의 탑에 갔었던 아가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