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리하르트와 엘리사는 아가일과 함께 응접실로 올라왔다.
리하르트는 아가일에게 물었다.
“알아낸 정보가 있나?”
아가일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정보가 있을 법한 책은 전부 뒤져 봤지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몇몇 책은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리하르트와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아가일을 쳐다보았다.
아가일은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맞겠군요.”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아가일은 진리의 탑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찾고자 하는 책이 있는 11층까지 올라갔고, 책장 깊은 곳까지 들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잃은 그를 발견한 건 주위에 있던 탑의 사서들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들이 물었으나, 아가일은 대답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하다가 이곳에 쓰러져 있게 된 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기억의 일부를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래도 고대의 서를 읽으신 것 같군요.’
아가일의 상태를 살펴본 사서들은 ‘고대의 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단어를 듣자, 아가일이 진리의 탑에 있을 당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진리의 탑 어딘가에 고대의 서가 있다.
고대의 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따금 탑의 불특정한 위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와 위치 또한 불규칙해서, 평생을 이 탑에서 살아도 고대의 서를 보지 못한 채 죽는 학자들도 많았다.
고대의 서는 발견하기도 어려웠지만, 그것을 발견해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읽더라도 책에 대한 기억이 지워졌다.
학자들은 고대의 서에 적힌 정보를 감당할 수 없는 자가 읽었을 때, 고대의 서에 걸린 보호 마법이 그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라 추측했다.
이야기를 들은 엘리사가 그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 책이 있다니 신기하네요. 알아선 안 될 이야기를 왜 책으로 만들어 놓은 걸까요? 책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정보를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글쎄요……. 자세한 건 책을 만든 당사자만이 알겠지만, 아마 일반인들이 알아선 안 될 이야기가 적혀 있는 게 아닐까요.”
위험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진실이.
설명을 마친 아가일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고 계셨을 텐데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가져오지 못해 송구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그 힘에 대한 정보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해결책은 찾은 것 같거든요.”
“해결책이요?”
아가일의 의아한 눈빛에, 엘리사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힘을 정화하기 위해 신성력을 다루는 법을 배우겠다고 했다.
그 속에 에이든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려는 속마음이 내포되어 있음을 에이든도 모르지 않았다.
오늘이 바로 엘리사가 신전에 오는 날이었다.
엘리사는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쯤 신전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으니, 엘리 사가 오려면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에이든은 정오 기도를 드리러 가기 전, 테이블에 앉아 제 손에 쥔 작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고급스러운 벨벳으로 만든 상자에는 진주 장식의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며칠 전, 올리비아와 함께 장신구가게에 가서 사 온 것이었다.
자신이 고르고, 올리비아가 승인한 물건이니 분명 엘리사에게 잘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선뜻 엘리사에게 주기가 망설여졌다.
‘그 아이가 부담스러워하진 않을까.’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사랑이 같을 순 없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감정에 취해 엘리사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하지만 엘리사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에이든이 엘리사에게 머리핀을 주느냐 마느냐로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때,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왔다.
에이든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
그는 상자 안에 머리핀을 내려놓고 정오 기도를 드리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가 방을 나가고 잠시 후,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계세여?”
방 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방문이 열리고 리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온은 곧장 방으로 들어오려다, 무언가 생각난 듯 그 자리에 우뚝섰다.
그러고는 발로 바닥을 탁탁 두드려 신발에 묻은 흙을 털었다. 에이든에게 배운 것이었다.
요즘 리온은 화단을 관리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예쁜 꽃을 보는 것도 좋았고, 향긋한 꽃향기를 맡는 것도 좋았다. 꽃에 붙은 곤충들을 가지고 노는 것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보다 더 관심을 쏟고 있는 건 얼마 전에 난 새싹들이었다.
건국제 전에 엘리사와 함께 심었던 것이었다.
리온은 자라는 새싹들을 보며 에이 든이 제게 맡긴 화단을 예쁜 꽃들로 가득 채우리라는 야망을 키우고 있었다.
“물 머꼬 싶따.”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리온은 물 주전자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리고 의자에 올라서 컵에 물을 따랐다.
아직 어설프긴 하지만 많이 해 본 듯한 모양새였다.
리온은 가득 채운 컵을 두 손으로 잡고 꼴깍꼴깍 들이켰다.
“캬하.”
땡볕에서 땀 흘리고 마시는 물맛은 최고였다.
그렇게 목을 축이고 컵을 내려놓는 데, 테이블에 놓여 있는 작은 상자와 그 안에 든 머리핀이 보였다.
그것을 발견한 리온의 눈이 반짝였다.
“오와, 예뿌다.”
그때, 화단에 함께 씨앗을 심으며 엘리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꽃을 더 많이 피우고 싶으면, 이 꽃의 씨앗을 심으면 돼. 그럼 이 예쁜 꽃이 많이많이 필 거야.’
진주알로 장식된 예쁜 머리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리온의 머릿속에 번뜩 아이디어가 스쳤다.
*
정오 기도를 올린 에이든은 곧장 별관으로 돌아왔다.
기도를 올리는 동안 마음을 굳혔다. 엘리사에게 머리핀을 주기로.
다만 그 머리핀을 사용할지 사용하지 않을지는 엘리사의 마음에 맡기고, 자신은 그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에이든은 진주 머리핀이 든 벨벳상자가 놓여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머리핀은 그가 두고 나간 그대로 상자 안에 곱게 놓여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
머리핀을 장식하는 진주알이 듬성듬성 사라져 있었다.
에이든은 황망한 눈으로 머리핀을 바라보았다.
그의 방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로선 단 한 사람뿐이었다.
때마침 문밖에서 유력한 용의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계세여?”
머리핀을 황망한 눈으로 보고 있던 에이든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리온이 들어왔다.
“성하!”
리온은 에이든을 발견하고 반색을 비치며 다가오려다, 한발 늦게 생각 난 듯 신발을 탁탁 털고 다가왔다.
화단에서 놀다가 온 모양이었다.
에이든은 리온에게 물었다.
“리온. 이 머리핀, 네가 만졌니?”
“아! 그고 화단에 심어써요!”
“뭐?”
“누나가 예쁜 꽃은 씨앗 심으면 마니마니 생긴대요. 그럼 성하한테 다 주께요.”
그렇게 말하는 리온은 칭찬받을 생각에 으쓱해 있었다.
에이든은 뭐라 말을 잇지 못한 채 리온을 바라보다, 마른세수를 했다.
*
신전에 도착한 엘리사는 곧장 별관 쪽으로 향했다.
에이든은 다른 일이 생겨 조금 늦는다고 했기에 먼저 별관으로 온 것이었다.
별관에 도착하자, 리온이 늘 쪼그리고 앉아 있던 화단이 보였다.
하지만 늘 그 자리에 있던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방에 있나?’
엘리사는 별관 창문 너머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창문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 꼼지 락거리고 있는 작은 인영이 보였다.
익숙한 뒤태를 발견한 엘리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엘리사는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창문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던 아이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아왔다.
반가움에 손을 흔드는데, 엘리사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에 서서히 눈물이 차올랐다.
“리온?”
갑작스러운 아이의 눈물에 당황한 엘리사는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자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잘모해떠……. 미야내요…….”
엘리사는 리온이 미안하다고 하는 영문을 몰랐지만, 우선 아이부터 안아 달랬다.
그리고 아이가 어느 정도 울음을 그치고서야 물었다.
“리온,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니?”
엘리사의 물음에, 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진주 머리핀과 화단에서 다시 파내어 씻은 진주알을 내밀었다.
군데군데 접착제가 붙어 있어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어디서 난 건지는 몰라도 리온이 이 진주알을 머리핀에 붙이고 있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리온은 훌쩍이며 대답했다.
“누나 선물……… 리온이가 부있어.”
“선물?”
“성하가 누나한테 주려고 산 건데……. 미아내……….”
에이든의 선물이란 단어에, 엘리사는 제 손안의 머리핀을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