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괜찮으려나..’
일을 마무리하고 별관으로 향하는 에이든의 머릿속엔 엘리사보다는 리온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제 허락 없이 머리핀의 진주알을 떼어 낸 리온에게 이 머리핀이 누구의 것인지 알려 주고, 진주알은 심어도 싹이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사실 그는 그 상황이 황당하다 못해 우스워 아이를 나무랄 생각조차 들지 않았지만, 리온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잘못을 해선 안 되기에 알려 준 것이었다.
그의 말을 이해한 리온은 자신이 엘리사에게 줄 선물을 망가트렸다는 사실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런 리온을 달래 줄 틈도 없이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워야 했다. 업무를 보면서도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아이를 키우는 건 어렵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별관에 도착했다.
엘리사와 리온은 별관 앞 우물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엘리사의 옆에 있는 리온은 언제나 그랬듯 눈을 반짝이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내 가슴에 걸려있던 작은 가시가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에이든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때, 그의 금발과 꼭 닮은 고운 금발이 눈에 띄었다. 엘리사의 머릿결 사이에 꽂힌 진주 머리핀이 시선을 끈 탓이었다.
그는 그것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섰다.
어차피 훼손된 것이니 엘리사에게 줄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상자에 담아 방 한쪽에 치워 두었건만.
“성하!”
다가오는 에이든을 발견한 리온이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손가락으로 그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물의 힘으로 리온의 손을 씻겨 주고 있던 엘리사는 한 박자 늦게 그를 돌아보았다.
에이든은 엘리사와 그녀의 머리에 꽂힌 진주 머리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머리핀의 진주 장식은 조잡스럽게 다시 붙인 티가 났지만, 그건 그것 대로 어여뻤다.
잘못을 수습하려는 리온의 마음과, 리온과 에이든 모두를 위한 엘리사의 마음이 함께 붙어 있어 더욱 그랬다.
그제야 에이든의 시선을 눈치챈 엘리사가 씩 웃으며 물었다.
“잘 어울려요?”
에이든은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그런 엘리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엘리사의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선물 감사해요, 아버지.”
난생처음으로 들은 ‘아버지’라는 호칭에 에이든의 눈빛이 흔들렸다.
평생 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호칭이었다.
그 호칭을, 율리아와 자신을 닮은 딸아이가 부르고 있었다.
싱그럽게 웃는 딸아이를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도 어느덧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
‘으, 피곤하다……….’
에이든으로부터 가문의 힘을 다루는 법을 처음으로 배우고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
엘리사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그대로 늘어졌다.
단시간에 집중한 탓인지 눈이 아프고 피곤했다.
그런 엘리사의 기색을 살피던 앤이 물었다.
“창문 열어 드릴까요?”
“그래 줄래?”
마차 창문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걷자,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아카로아의 여름은 햇볕은 뜨거우나, 습도가 없어 그늘 아래의 바람은 제법 선선했다.
선선한 바람을 쐬자 조금이나마 피곤함이 가셨다.
엘리사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때, 창밖에 지나가는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머리에 머리 핀이 꽂혀 있었다.
그것을 보자 번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앤, 마부에게 장신구점에 잠깐 들렀다 가자고 해.”
앤은 마부에게 엘리사의 말을 전했다.
이윽고 마차가 장신구점 앞에서 멈췄다.
엘리사는 기사들을 가게 앞에 대기 시킨 후, 앤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일전에 루벨린 공작가의 사용인들을 위해 브로치를 제작한 적 있는 가게 주인이 엘리사를 알아보고 직접 달려 나와 환대했다.
“어서 오시지요, 공작 부인! 몸도 힘드실 텐데 어찌 직접 오셨어요?
공작저로 부르셨으면 제가 한달음에 달려갔을 텐데요.”
“오랜만이네요, 마담. 근처에 일이 있어 지나가는 길에 들른 것이랍니다.”
“아, 그러셨군요. 오늘은 어떤 물건을 보러 오셨나요?”
“남성용 브로치를 보려고요.”
“그럼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마담은 남성용 장신구가 전시되어 있는 2층으로 안내했다.
엘리사는 2층으로 올라가기 전, 주위 구경에 삼매경인 앤을 돌아보고 말했다.
“앤, 넌 여기서 구경하고 있어도 돼.”
“네. 그럼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불러 주세요.”
엘리사가 2층으로 올라가고, 1층에 남겨진 앤은 여성용 장신구들을 구경했다.
정성 들여 세공한 보석들이 박힌 장신구들을 구경하는 건 그저 보기만 해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마님한텐 이런 것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엘리사에게 어울릴 만한 장신구들을 눈여겨봐 두며 걸음을 옮기는데, 발에 무언가 동그란 것이 밟혔다.
그 순간, 체중이 실린 발이 삐끗하며 몸이 휘청했다.
“어?”
운동 신경이 없는 앤은 바닥에 부딪히는 끔찍한 고통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런 앤을 끌어당겨 안았다.
앤은 그 온기에 놀라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준수한 외모의 남자가 보였다.
“이런, 괜찮습니까, 아가씨?”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자각한 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남자와 이렇게 가깝게 접촉한건 처음이었다.
앤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겨우겨우 목소리를 냈다.
“아……. 가, 감사합…….”
그때였다.
큰 손이 질척거리며 허리를 주물렀다. 그 손은 슬금슬금 올라와 팔과 몸 사이를, 그리고 더 올라가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 질척한 손길에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얇은 여름옷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가 소름 끼쳤다.
겁에 질린 앤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군요.”
남자는 그런 앤을 내려다보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여전히 손으로는 앤의 어깨와 팔을 주물럭거리면서.
앤은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런 저항도,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었다.
그 순간, 구원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손, 떼 주시겠어요?”
남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머릿속이 하얘져 굳어 있던 앤도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곳에 싸늘한 눈을 한 엘리사가 서 있었다.
“외간 남자가 생판 처음 보는 젊은 아가씨의 몸을 더듬고 있는 거, 그다지 좋은 그림은 아닌 것 같은데.”
엘리사의 뼈 있는 말에도 남자는 넉살 좋게 웃었다.
“하하, 더듬다니요? 저는 그저 아가씨가 다친 곳은 없나 살펴본 것뿐입니다. 제 호의를 이렇게 매도하시다니요, 부인.”
“본인은 좋은 의도였다고 해도 상대가 꺼리는데 만지는 건 폭력이 죠.”
엘리사가 정곡을 찌르자, 남자의 표정이 일순 험악하게 굳어졌다.
일반적인 귀부인들은 가급적이면 귀족 남성과의 문제는 크게 키우지 않고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었다.
본인이 당한 일이 아닐수록 더더욱.
예상치 못한 엘리사의 반응에 잠시 당황했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을 풀고 앤에게 말했다.
“아가씨, 뭐라고 해명 좀 해 줘요.
부인께서 단단히 오해하고 계신 듯 하니. 내가 아가씨의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까?”
그는 엘리사의 오해가 당황스럽다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손은 앤의 어깨를 매만지고 있었다.
가까이에 있는 남자의 온기만으로도 앤에겐 큰 위협이었다.
엘리사는 앤의 대답을 기다렸으나, 겁에 질린 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
“이거 보십시오, 이 아가씨는…….”
그때, 고개를 푹 숙인 채 달싹거리던 앤의 입에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예?”
앤의 말을 듣지 못한 남자가 친절한 사람 행세를 하며 그녀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앤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앤의 눈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지만, 동시에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시…… 싫다고, 이 변태 새끼야!”
앤의 말에 남자는 물론, 엘리사까지도 놀라서 벙벙했다.
앤은 그 틈을 타서 남자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엘리사의 곁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리던 남자는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어느새 주위에 있던 손님들과 직원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제게 모인 눈빛들을 본 남자의 얼굴이 당황하여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게 무슨………!”
남자가 앤을 잡으려고 다가섰다.
그 순간, 엘리사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손 치워.”
“뭐, 뭐?”
“애가 싫다잖아.”
남자를 바라보는 엘리사의 눈에 살기가 어려 있었다.
남자는 저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엘리사의 기세에 눌려 말을 잇지 못했다.
때마침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가게 직원이 다가왔다.
“두 분, 무슨 일이십니까?”
“저 사람이 내 하녀를 추행했어요.”
엘리사의 말에 남자는 펄쩍 뛰었다.
“추행이라니요? 증거라도 있습니까? 감히 나를 이런 식으로 모욕하면…!”
남자가 언성을 높이자, 옆에서 난 감한 표정으로 서 있던 직원이 그를 말렸다.
“케인 경, 위층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곧 찾으시는 물건을 가지고 올라가겠습니다.”
그의 말에 케인은 입을 다물었다.
직원이 둘 중 자신에게 자리를 피하게 한다는 건, 엘리사가 자신보다 더 윗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케인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자리를 피했다.
케인이 2층으로 올라가자, 엘리사의 뒤에 숨어 있던 앤은 그제야 숨을 제대로 내쉬며 울먹거렸다.
“죄송해요, 마님. 괜히 저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시게 해서…….”
“네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네가 죄송해? 네 잘못이 아니야, 앤, 난 괜찮아.”
엘리사는 여전히 덜덜 떨고 있는 앤의 손을 붙잡아 주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말에 앤은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마음 여린 앤의 눈물에 엘리 사의 마음도 덩달아 아려 왔다.
엘리사는 그런 앤을 안고 다독여 준 후, 이 난감한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곤란스러워 진땀을 빼고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아까 그 사람은 어느 가문의 사람이죠?”
“케, 케인 경은 사실 매너가 좋은 분인데,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엘리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엘리사와 케인의 사이가 틀어지면 어느 한쪽을 편들 수 없는 가게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다.
직원은 그 난처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신분이 낮은 앤이 ‘오해’를 한 것이라며 그녀가 겪은 일을 덮어 버린 것이다.
엘리사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느 가문의 사람인지 모르나요?”
엘리사의 물음에 직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굴리다, 못 이기는 척 대답했다.
“세, 세리어트 가문의 차기 가주십니다.”
세리어트.
이제는 친숙해진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엘리사의 표정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