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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88화 (88/164)

88화

며칠 후, 엘리사는 오늘도 신성력을 다루는 법을 배우기 위해 신전을 찾았다.

두 사람이 신성력을 수련하는 장소는 신전의 별관과 가까운 곳에 있는 건물이었다.

본 건물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으로, 이곳에는 에이든이 만들어 놓은 정화의 샘이 있었다.

오색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밝은 빛이 스며드는 일반적인 신전 건물과는 달리, 이 건물은 푸른빛이 스며들어 기이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중심에 정화의 샘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 샘은 에이든이 막 세리어트의 가주가 되었던 열다섯 살 무렵 시험삼아 만들었던 것이라고 했다.

엘리사는 이곳에서 신성력을 다루는 연습을 했다.

“자, 이 샘을 기준으로 원형 방어막을 형성해 보렴.”

에이든은 먼저 시범을 보였다.

샘에 손을 얹자,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물이 서서히 보이지 않는 벽을 타고 올라가 세워져 타원형의 얇은 방어벽을 만들었다. 한 치도 흐트러짐 없는 모양이었다.

엘리사는 그의 시범을 따라 손바닥을 샘에 얹고 집중했다.

손바닥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온 물이 힘겹게 보이지 않는 벽을 타고 올라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집중이 흐트러졌다. 동시에 기껏 세웠던 물의 벽이 찰랑거리며 무너졌다.

그에 굴할 엘리사가 아니었다.

엘리사는 몇 번이고 다시 벽을 세웠다. 앙다문 입술과 잔뜩 찌푸려진 미간이 그녀가 고도의 집중을 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에이든은 얼굴로 한껏 집중하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터트렸다.

“엘리사. 잠깐 쉬었다 하자꾸나.”

그는 엘리사를 위해 근처에 있던 의자를 가져왔다.

“감사해요, 아버지.”

엘리사는 그가 가져다준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빨리 실력이 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리하르트를 정체 모를 그 검은 기운에서 구해 줄 수 있을 테니.

엘리사가 신성력을 배우는 데 열중인 건 물론 에이든과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싶어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리하르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에이든은 그런 엘리사를 다독였다.

“그래도 두 번째 수업치곤 잘하고 있는 거란다.”

“제가 듣기로, 아버지는 힘을 처음 사용했을 때부터 몬스터를 무찌를 수 있으셨다고 하던데. 그 이야기, 정말이에요?”

“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잘하고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은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네요. 천재가 어떻게 범재의 슬픔을 이해하겠어요. 에휴.”

엘리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탄하며 늘어졌다.

에이든은 그런 엘리사를 보며 피식 웃고는 엘리사를 다독였다.

“넌 그 천재의 딸이니 금방 잘할 수 있을 거다.”

그의 신빙성 있는 위로에 엘리사는 그제야 빙긋 웃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드레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상자였다.

“아버지께 드리는 첫 선물이에요.”

상자를 바라보는 에이든의 눈빛이 흔들렸다.

눈에 놀라운 감정과 기쁜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 감정과는 달리 상자를 도로 엘리사에게 돌려주었다.

“답례를 바라고 준 게 아니란다.

그저 네게 무언가 주고 싶었을 뿐이야.”

“저도 그냥 아버지께 뭔가 드리고 싶을 뿐이에요. 답례가 아니라.”

“…….”

“안 받아 주실 거예요?”

엘리사가 만면에 서운함을 내비치 자, 마음이 약해진 에이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상자를 받아 들었다.

상자 안에 백금으로 정교하게 세공하여 만든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엘리사는 에이든의 마음이 바뀔세라, 냉큼 브로치를 그의 옷깃에 달았다.

깔끔한 디자인의 브로치는 새하얀 법복과도, 그리고 수려한 그의 얼굴과도 퍽 잘 어울렸다.

“으음, 역시 제 미모는 아버지를 닮았나 봐요.”

엘리사의 너스레에, 에이든은 웃음을 터트리며 정정했다.

“아니. 넌 나보다는 네 엄마를 더 많이 닮았다. 네 엄마를 닮아 예쁘고 사랑스럽지.”

엘리사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는 에이든의 눈빛이 애틋했다.

그런 그의 눈빛에서 율리아를 향한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엘리사는 그제야 에이든이 재혼하지 않은 이유를 눈치채고 미간을 찡그렸다.

“…어머니 때문에 재혼하지 않으셨던 거군요. 그게 황제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임을 아시면서도.”

“그게 아니라면 황제를 죽여 복수를 하는 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 율리아는 내가 살아남아 사람들을 지켜 주길 바랐으니까.”

에이든은 씁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어쩌면 이것도 내 변명일지 모르지.”

그런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엘리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아버지가 살아 계신 덕에 어머니의 유지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죠.”

“어머니의 유지 덕에, 제가 아버지랑 만날 수 있었던 것이고요. 그리고…….”

엘리사는 제 배에 손을 얹으며 덧붙였다.

“우리 아기에게도 자상한 할아버지가 생겼고요.”

에이든은 저를 위로하려는 엘리사와 배 속의 손주를 번갈아 보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그의 미소에 안도했다.

그때, 그에게 물어보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엘리사는 그에게 물었다.

“아 참. 아버지는 가문의 일에서 손을 떼셨다고 들었어요. 그럼 가문의 후계자는 누구예요?”

“케인이라고, 네겐 먼 친척 오라비뻘 되는 아이가 맡고 있단다.”

예상했던 이름이 나오자, 엘리사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엘리사는 에이든이 걱정하기 전에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

신전 앞, 귀족가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가 멈춰 섰다.

대동하고 온 기사들이 문을 열자, 날카로운 인상의 귀부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 뒤를 따라 그녀의 아들로 보이는 젊은 귀족 영식이 따라 내리며 투덜거렸다.

“엄마, 그런 건 신 나부랭이한테 말해 봤자 안 들어준다고요.”

크리스티안의 최측근인 블레넘 백작 영식이었다.

귀부인은 그런 아들을 눈을 홉뜨고 쏘아보며 그의 입술을 부채로 때렸다.

“너,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불경한 소리를 하는 거니? 조용히 하고 따라오렴.”

“하, 엄마 아들이 누구의 최측근인지 몰라서 이래요? 나, 황태자 전하의 최측근이에요. 전하는 신전이라면 치가 떨리게 싫어하신다고!”

“너는 동생보다 황태자 전하가 중요하니?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따라 오렴.”

“아, 진짜! 백날 신에게 기도인지 뭔지 해 봐라. 애초에 비실비실하게 태어난 애가 건강해지나.”

블레넘 백작 영식은 마지못해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꿍얼거렸다.

블레넘 백작 부인이 신전을 찾은 건, 원인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둘째 아들이 낫게 해 달라기도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처음엔 몰래 혼자서 신전에 다니더니, 갑자기 정성이 부족해서 기도가 듣지 않는 것이라며 다짜고짜 큰아들을 끌고 온 것이었다.

‘아, 짜증 나. 이럴 시간에 전하의 기분을 풀어 드려야 하는데.’

괜스레 바닥과 돌에게 분풀이하며 모친의 뒤를 따라 서쪽 예배당으로 향하고 있던 그때,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저 여자는…… 루벨린 공작 부인?’

엘리사는 에이든과 나란히 어디론가 향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에이든 역시 평소의 자애로운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루벨린 공작 부인이 요즘 신전에 자주 들른다던데. 설마…?’

그와 동시에 리하르트에게 울분을 터트리던 크리스티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블레넘 백작영식의 눈빛이 음험하게 빛났다.

‘다가오는 황태자 전하의 생신 선물은 걱정 안 해도 되겠어.’

블레넘 백작 영식은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엘리사와 에이든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엘리사는 수련을 마치고 에이든과 함께 별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별관 앞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리하르트?’

리하르트는 별관 옆 리온의 화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옆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은 리온이 쫑알거리고 있는 걸 보니 아이가 무언가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아마 자신을 데리러 왔다가 리온에게 붙잡힌 것이리라.

리하르트는 셔츠 차림으로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화단에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남들보다 좋은 체격이 옆에 앉은 조그마한 리온의 몸과 대조되어 더욱 크게 느껴졌다.

핏줄이 튀어나온 팔과 움직일 때마다 도드라지는 팔 근육 역시 리온의 통통하고 작은 팔과 비교되었다.

그 차이에 새삼 그가 남자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동시에 저 큰 체격을 가지고 저보다 한참 조그마한 아이의 부탁을 못이기고 있는 그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귀여워’그를 바라보는 엘리사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그런 엘리사의 모습을 지켜보던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많이 좋아하는구나.”

“네?”

“공작 각하 말이다.”

에이든의 말에 엘리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들켜선 안 될 거짓말을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자신조차도 속이고 있었던 거짓말을.

“그걸… 아버지가 어떻게 아세요?”

“그 사람을 바라보는 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지.”

에이든은 적잖이 당황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딸아이의 모습이 귀여 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담은 눈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눈을 하고 있거든.”

‘내가,리하르트를 좋아한다고?’

멍하니 에이든을 쳐다보며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는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뒤늦게 엘리사와 에이든의 인기척을 눈치챈 리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 눈은 오직 제게 고정한 채로.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워지는 거리만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엘리사.”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리하르트가 엘리사와 눈을 맞추며 습관처럼 엘리사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저를 내려다보는 다정한 눈을 마주한 순간, 그의 손이 뺨을 부드럽게 스친 순간.

엘리사는 깨달았다.

더는 지금 그에게 느끼는 이 감정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신을 속일수 없으리란 것을.

제 감정을 깨달음과 동시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인정하기가 무섭게 커져 가는 감정이 두려웠다.

엘리사는 제 감정을 숨기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

의아한 그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엘리사는 그를 보지 않았다.

아직은,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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