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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89화 (89/164)

89화

그날 밤, 공작저로 돌아온 엘리사는 리하르트에게 말했다.

“나, 오늘부터 혼자 잘래.”

막 배 마사지를 마친 리하르트는 청천벽력 같은 엘리사의 말에 적잖이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같이 자는 거 불편해.”

“그럼 내가 소파에서 잘까?”

“아니야. 그러지 말고 네 방에서 편하게 자.”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제안이 내키지 않았다.

임산부들은 배가 나오면서 같이 자는 것을 불편해하기도 한다고 했다.

엘리사 역시 얼마 전부터 다리와 배 등에 여분의 베개를 끼워 자고 있었다.

하지만 최대한 편한 자세를 잡고 잠들어도 한 자세로만 잘 수 없기에 움직여야 했고, 그때마다 또다시 편한 자세를 찾기 위해 뒤척이며 잠을 설쳐야 했다.

그러다 배 속의 아이가 태동이라도 하면, 겨우 잠들려다가도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그런 엘리사를 혼자 자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엘리사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엘리사의 표정은 이미 결심한 듯 단호했다.

잠시 고민하던 리하르트가 나름의 계책을 내놓았다.

“그럼 동화책만 읽어 주고 갈게.”

요즘 엘리사는 밤잠을 설쳐서인지, 그가 동화책을 읽고 있을 때 잠드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도 엘리사가 책을 읽는 중간에 잠들면 모르는 척 오늘 밤까지만이라도 같이 잘 요량으로 생각해 낸 계책이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은 그냥 잘래.”

그 목소리가 묘하게 불퉁하다.

미묘한 뾰족함을 눈치챈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손을 잡았다.

“엘리사. 나 좀 봐.”

시선을 맞추려는 그의 눈을 슬금슬금 피하던 엘리사는 마지못해 그를 마주 보았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내가 혹시 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 나는… 네가 화를 내도 괜찮으니 네 마음이 편한 대로 했으면 좋겠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엘리사는 잔뜩 누그러진 목소리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런 거 아냐. 그냥 혼자 자고 싶어서 그래.”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엘리사의 눈은 금방이라도 울 듯했다.

그 모습을 본 리하르트는 결국 엘리사를 침대에 눕혀 주고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한동안 엘리사의 방문 앞에서 서성이다, 결국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왔다.

어둠이 깔린 밤에도 엘리사의 존재만으로 환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던 그녀의 침실과 달리, 제 방은 적막하고 싸늘하기만 했다.

리하르트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열린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름 풀벌레 울음소리가 적막한 방을 메웠다.

엘리사가 옆에 있을 땐 들리지도 않던 소리였다. 그 소리가 신경이 쓰였다.

한 시간이 넘게 이리저리 뒤척이던 리하르트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다가갔다. 문을 닫기 위해서였다.

막 문을 닫으려는데, 선선한 밤바람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방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아마 그녀의 침실 발코니 문도 열려 있을 터였다.

‘꽤 시간이 지났으니 자고 있겠지.’

잠시 고민하던 리하르트는 바람을 일으켜 날아올랐다. 그리고 곧장 엘리사의 방 발코니로 향했다.

예상대로 발코니 문은 열려 있었다.

리하르트는 인기척을 죽이고 발코니로 내려와 슬쩍 방 안을 살폈다.

침대는 발코니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슬쩍 살펴보니 엘리사는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리하르트는 발코니 문을 열고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발코니 경첩이 맞물린 것인지 끼익 소리가 났다.

리하르트는 흠칫 놀라 문을 잡고 조심스럽게 열었다.

‘내 집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지금 이 상황은 꼭 도둑이 물건을 털러 잠입한 것 같지 않은가.

물론 이 방에 진짜로, 그 누구도 훔쳐선 안 될 귀한 보물이 있긴 하지만.

리하르트는 그런 제 모습에 자조하며 침대로 다가갔다.

엘리사는 허리를 받쳐 주는 베개와 다리 사이에 끼고 자는 베개에 둘러싸여 곤히 잠들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침대 맡에 조용히 걸터앉아 잠든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저 작고 약한 몸으로 무거운 배를 안고 여기저기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엘리사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부른 배를 안고 아기에게 속삭이는 모습도, 작은 입에 음식을 한가득 오물거리는 모습도, 제게 토라져 툴툴거리는 모습도.

제 눈엔 배가 나온 엘리사의 모습이 마냥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당사자인 엘리사는 힘들어 보여 마음이 쓰렸다.

‘네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지금 자신이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더운 여름밤에 그녀가 잠을 설치지 않게 바람을 불어 주는 것뿐이었다.

엘리사의 이마에 땀이 반짝거리는 것을 본 리하르트는 약한 바람을 일으켜 그녀의 이마를 식혀 주었다.

살랑살랑, 부드럽고 선선한 바람이 엘리사를 스쳐 지나가자 엘리사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엘리사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으니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이 놓였다.

‘그냥 이대로 옆에 누워서 잘까.’

그럼 내일 일어나서 입술을 삐죽이려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였다.

“으응….”

곤히 자고 있던 엘리사가 고운 미간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다급히 엘리사의 상태를 살피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배가 미묘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태동이었다.

그것을 본 리하르트의 미간이 설핏일그러졌다.

리하르트는 꼬물꼬물 움직이는 엘리사의 배에 조심스레 손을 얹고 속삭였다.

“쉿. 엄마 깨우지 마.”

엘리사와 자다가 아이가 움직일 때면 늘 하던 행동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아이는 잠잠해졌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깰 듯 미간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리던 엘리사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 왔다.

리하르트는 평온히 잠든 엘리사의 얼굴을 한동안 더 바라보다, 흐트러진 그녀의 베개를 제대로 정리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엘리사의 이마에 살포시입을 맞추고 발코니를 나섰다.

*

엘리사의 단잠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

리하르트가 방으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사는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배 속의 아이가 배를 팡팡 차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아직 야심한 밤이었다.

엘리사는 아이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다시 잠을 청하려 했으나, 까무룩 잠들려 하면 아이가 꼬물거리며 움직였다. 야밤에 갑자기 신이 난 모양이었다.

아이가 배를 찰 때면 그 힘 때문에 깜짝 놀라 숨을 멈출 정도였다.

이 조그마한 아이가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신기했다.

‘아빠 닮아서 이렇게 힘이 좋은가.”

엘리사는 아기의 활발한 태동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증거 같아 기뻤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했다. 리하르트를 내보내고 한참 잠 못 이루다 겨우 잠든 터라 더욱 그랬다.

엘리사는 졸린 눈을 비비며 배 속의 아이에게 속삭였다.

“사랑아, 엄마 너무 졸려…….”

하지만 엘리사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아이는 엄마의 배를 밀어내고 발로 차며 놀았다.

결국 엘리사는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아이가 통통 건드리는 부위를 쿡 누르며 반응해 주었다.

그러다 문득 허전한 침대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아이가 밤에 태동을 하면, 리하르트가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가 잠잠해질 때까지 도와줬다. 잠에 겨운 제 투정을 받아 주고, 다시 잠들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의 빈자리를 보자 또다시 기분이 울적해졌다.

‘많이 좋아하는구나.’

에이든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난 아무나랑 안 해, 이런 짓’왜 그의 말에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기 무서웠는지를.

그의 다정함이 자신이 아니라 아이를 향한 것이라고 할까 봐, 그의 달콤한 입맞춤이 그저 육체적 욕망이라고 할까 봐 두려웠다.

아무것도 아니란 대답에 상처받을 것이 겁이 나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내가 혹시 네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해. 나는… 네가 화를 내도 괜찮으니 네 마음이 편한 대로 했으면 좋겠다.’

불확실한 그의 다정함이 서러웠다.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심술이 났다.

그래서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안아 주던 그의 온기가 그리웠다.

나긋나긋 달래어 주던 그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그가 원작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과 아이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은 그 온기와 다정함에 잊힌 지오래였다.

‘원작은 이미 바뀌었으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엘리사는 결국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섰다.

너무 늦게 깨달아 버린, 이젠 돌이 킬 수 없는 감정이었다.

*

잠든 엘리사를 보고 다시 방에 돌아온 리하르트는 결국 자는 것을 포기하고 책을 펼쳤다.

이미 여러 차례 독파한 임신과 출산에 관한 책이었으나, 혹시 놓친 부분은 없는지 한 번 더 읽기 위해 펼친 것이었다.

그때였다.

달칵—

조용한 방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리하르트의 시선이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방문은 조금 열려 있었으나,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누구지?’

자정을 훌쩍 넘긴 늦은 시간, 이 시간에 제 방에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겁도 없이 노크를 하지 않고 들어올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리하르트가 그에 의아해하던 그때, 살짝 열린 문 사이로 익숙한 금발이 삐죽 튀어나왔다. 뒤이어 연둣빛 눈동자가 따라 나타났다.

빠끔히 방 안을 살피던 그 눈과 딱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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