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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90화 (90/164)

90화

그와 눈이 마주친 엘리사는 흠칫 놀라 몸을 뺐다.

‘왜, 왜 아직 안 자는 거야?’

시간이 늦었으니 당연히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잠든 그의 옆에 조용히 가서 누우려 했건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죄라도 지은 것처럼 심장이 콩닥거리며 빠르게 뛰었다.

야밤에 그를 찾아온 이유를 들킬것 같아 무서웠다. 하지만 기껏 찾아와 놓고 도망가는 것도 이상했다.

엘리사가 당황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방문이 더 열리고 리하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사?”

빛을 등지고 있어도 잘난 그 얼굴이 얄미웠다. 그 얼굴에 반응하는 제 심장에 심술이 났다.

엘리사는 언제 당황했었냐는 듯 삐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왜 아직 안 자?”

묻고서야 깨달았다. 찾아온 쪽이 그렇게 묻는 것이 이상하다는 걸.

하지만 리하르트는 그에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는 듯했다.

“잠이 안 와서. 넌 왜……….”

엘리사에게 물어보려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얇은 잠옷과 배를 보고 미간을 설핏 일그러트렸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엘리사는 기다렸다는 듯 냉큼 방으로 들어섰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걱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넌 왜 깼어? 어디 불편해?”

엘리사는 그의 말에 이질감을 느꼈다.

왜 깼냐는 건, 그가 자신이 자다가 깼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에 의문을 품을 여유가 없었다. 이 늦은 밤에 그를 찾아온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아빠가 없으니까 잠이 안 오나 봐. 여기 오는 중에도 계속 발로 차고 난리도 아니었어.”

엘리사는 배에 손을 얹으며 가장 그럴싸한 핑곗거리를 댔다.

리하르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살며시 엘리사의 배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방으로 오는 길에도 부지런히 움직이던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하기만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주 신이 났었는데…….”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된 엘리사는 머쓱해졌다.

부쩍 피곤해 보이는 엘리사와 그녀의 배를 자못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물었다.

“그럼 같이 잘까?”

바라던 대답이었으나, 엘리사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를 눕혀 주고,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여분의 베개를 다리 사이에 끼워 주었다.

그리고 엘리사를 뒤에서 끌어안고 누워 얇은 여름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 손길이 매우 능숙했다.

그의 넓은 가슴팍에 안기자 마음이 놓였다. 두근거리는 심장과는 별개로,엘리사는 제 배를 감싼 그의 커다란 손을 만지작거리다 그를 불렀다.

“…리하르트.”

“응.”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거운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는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눈을 감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네 감정이 나와 같다면, 내게 확신을 줘.

*

리하르트의 품에 안겨 잠들었던 엘리사는 낯선 공간에서 눈을 떴다.

‘여기는 어디지?’

사방이 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숨이 막히진 않았다.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물 안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빛만이 보였다.

왜인지 평온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따스한 빛을 받고 있으니 다시 눈이 감겼다.

까무룩 잠이 들려는 찰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 금방 가서 아빠를 데리고 올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줘.”

부드럽고 다정한, 그러나 어딘가 애틋한 목소리.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인데, 오래 전부터 저 목소리를 알고 있었던 듯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엘리사는 그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 목소리가 더 들리지 않는 것이 슬펐다. 목울대와 가슴께가 아릿정도로,

‘엄마…….’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여자를 지칭한 단어에 흠칫 놀랐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사?”

그 목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걱정으로 잔뜩 굳어진 얼굴을 한 리하르트가 보였다.

“어디 아파? 갑자기 왜…….”

막 잠에서 깬 엘리사는 그가 걱정하는 이유를 몰라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조금 전 그건…… 꿈?’

엘리사는 설렁줄을 당기려는 리하르트를 붙잡았다.

“아니, 아니야. 그냥 꿈을 꿨는 데….”

그에게 꿈을 설명하려는데, 울컥목울대를 치고 올라온 슬픔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그저 꿈일 뿐인데, 꼭 그것이 진짜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가슴 한편이 아렸다.

“나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꿈인데, 왜 이렇게……….”

“그냥 슬픈 꿈이야. 괜찮아, 엘리 사. 괜찮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엘리사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그녀를 가만히 안고 다독여 주었다.

잠시 후, 엘리사의 눈물이 잦아들자 리하르트가 엘리사의 눈물을 닦아 주며 물었다.

“무슨 꿈이었어?”

“…내가 물속에 있었어. 따뜻하고 포근한 곳이었는데, 갑자기 어떤 목소리가 들렸어.”

“목소리?”

“여자 목소리였는데……. 내가 그 사람을 ‘엄마’라고 불렀어.”

“…….”

“그런데 그 사람이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사라졌어. 그게 너무 슬퍼서….”

꿈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횡설수 설 늘어놓던 엘리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맞아, 꼭 내가 배 속의 아기가 된 것 같았어.”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우리 아기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이런 꿈을 꾼 건 아니겠지……?”

세틸 경을 불러야겠군.”

리하르트가 서둘러 설렁줄을 당기려는 순간, 엘리사의 배 속에서 꼬물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엘리사가 그 부분을 쿡 누르자, 아이가 정확히 그 부분을 통통 쳤다.

엄마 아빠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고 말하듯이.

그 작지만 힘찬 대답에 엘리사는 눈물이 덜 마른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아, 밤에 막 움직여서 깨워도 괜찮으니까 건강하게만 있어 줘.”

엘리사를 안심시키듯 한동안 꿀렁거리며 움직이던 아이는 다시 잠잠해졌다.

안심한 엘리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운 것을 본 리하르트의 표정 역시 한층 풀어졌다.

리하르트는 아직 엘리사의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을 닦아 주며 물었다.

“이제 기분은 괜찮아졌어?”

“미안. 자는데 깨워서…….”

“뭐가 미안해. 다른 데 불편한 곳은 없고?”

“응. 괜찮아.”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다시 눕혀 주고 옆에 누웠다.

뒤에 누운 그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우느라 열이 오른 저를 식혀 주는 약한 바람과 제 손을 토닥이는 그의 큰 손이 그가 깨어 있음을 알려 주었다.

마치 아이를 얼러 재우는 듯한 행동이었다.

엘리사는 제 손을 토닥거리는 리하르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귀찮고 짜증 났을 텐데.’

자다가 깨서 짜증 날 법도 하건만, 그는 그런 기색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은 같이 자기 싫다고 했다가, 늦은 밤에 갑자기 찾아와 같이 자겠다며 변덕을 부리지 않았나.

그에게 괜히 심술을 부리고 툴툴거린 것이 뒤늦게 미안해졌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입술이 떨어지기 전에 눈꺼풀이 먼저 감겼다.

엘리사의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리하르트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고는 잠든 엘리사의 뒷머리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잘 자, 엘리사.”

이번엔 행복한 꿈이 너를 찾아가기를.

*

며칠 후 아침, 리하르트는 금주에 있을 크리스티안의 생일에 대해 귀족들과 논의하기 위해 황궁에 갈 채비를 했다.

크라바트를 매는 리하르트의 시선은 거울을 보는 듯했지만, 사실 그의 신경은 온통 침대에 누운 엘리사에게로 향해 있었다.

“깨 있는 거 다 아는데.”

몇 분 전, 무심코 엘리사 쪽을 돌아보았던 리하르트는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엘리사와 눈이 마주쳤다.

리하르트가 다가가려고 하자, 엘리 사가 안고 있던 베개로 슬그머니 제 얼굴을 가렸다. 명백히 그의 시선을 피하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몇 분째 저 상태였다.

아니, 비단 오늘만이 아니라 며칠째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갑자기 저를 불퉁하게 대하다가도, 잘 때가 되면 슬그머니 제 품에 안겨 왔다.

엘리사가 제게 툴툴거리는 것이 그만큼 저를 믿고 의지한다는 의미 같아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 분위기에 맞춰야 할지 몰라 난처하기도 했다.

‘감정이 들쭉날쭉할 때지..’

임신을 하고 몸이 무거워지고 힘들어지면 잘 지내다가도 남편이 불쑥 불쑥 미워지기도 한다고 들었다.

아마 엘리사도 그런 것이리라.

리하르트는 크라바트를 매고 엘리 사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엘리사가 흠칫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사. 오늘은 배웅 안 해 줄 거야?”

배웅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 나가기 전에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어 꺼낸 이야기였다.

하지만 엘리사는 오히려 베개에 더 깊게 얼굴을 파묻은 채 뜸을 들이다. 한 박자 늦게 웅얼거리듯 답했다.

“잘 거야.”

“얼굴은 왜 가려? 숨 막히잖아.”

“얼굴 부어서 못생겼어.”

끝내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엘리 사에게 심술이 난 리하르트는 엘리 사가 안고 있는 베개를 슬쩍 당겨 내렸다.

그 바람에 무방비 상태에 있던 엘리사는 그와 눈을 마주치곤 숨을 멈췄다.

햇빛을 등지고 있어도 잘난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서늘한 인상과는 달리 따스한 기운을 품은 눈빛이 저를 빤히 바라본다.

쿵, 쿵….

그 시선에, 애써 숨기려 했던 심장소리가 귓가에 요란하게 울렸다.

무언가에 홀린 듯 저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엘리사를 물끄러미 보던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내 눈엔 예쁜데.”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 진솔한 그 눈빛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엘리사는 기습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눈을 깜빡거리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알아채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소리쳤다.

“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가.”

리하르트가 무어라 하려던 그때, 엘리사를 돕듯 노크 소리가 울렸다.

마차가 준비되었음을 알리러 온 그레이슨이었다.

“다녀올게.”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인사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리하르트의 인기척은 엘리사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돌아서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엘리사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개를 슬그머니 내렸다. 드러난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이라니.

“……싫어.”

나만 이런 감정인 거라면, 들키고 싶지 않아.

엘리사는 닫힌 문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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