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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91화 (91/164)

91화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 한 대가 황궁에 멈춰 섰다.

차주에 있을 크리스티안의 생일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황궁에 도착한 크로텔 백작이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앞서가고 있는 글리세이드 백작을 불렀다.

“이보게, 카터.”

“오, 윌리엄.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군.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어제 카지노에서 재미를 좀 봤거든.”

“얼굴이 핀 이유가 있었구먼.”

“내 조만간 한턱내지. 아 참, 자네 그 소문 들었나?”

“무슨 소문?”

‘소문’이란 말에 글리세이드 백작의 귀가 쫑긋했다. 모름지기 사람들은 소문에 관심을 가지는 법이었다.

“어제 카지노에서 들은 이야긴데…….”

크로텔 백작은 주위를 한 번 살펴보고는, 글리세이드 백작의 가까이에 바짝 몸을 숙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루벨린 공작 부인과 교황 성하 말일세. 두 사람이 내연 관계라고 하더군.”

“세상에, 교황 성하께서? 사별하신 후론 여자에겐 관심도 없으신 듯하더니.”

“공작 부인이 보기 드문 미인이긴 하잖나.”

“그래도 그렇지, 홑몸도 아닌 여자가 어떻게…….”

“그러니 보통 여자가 아닌 거지.

이건 확실한 건 아닌데, 배 속의 아이도 다른 남자의 애라는 이야기가….”

적잖이 놀란 듯한 글리세이드 백작의 반응에 흥이 오른 크로텔 백작이 주워들은 이야기를 더 풀어놓기 시작하던 그때였다.

“뚫린 게 입이라고 아주 멋대로 지껄여 대는군.”

등 바로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떠올린 귀족들은 사색이 되어 말을 멈췄다.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살기에 등골이 섬뜩해졌다.

“히곡!”

크로텔 백작은 놀란 나머지 딸꾹질까지 나왔다.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지껄여 봐.”

그곳엔 선연한 살기를 드리운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마님.”

채비를 마친 엘리사는 에이든을 만나러 신전에 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쐬며 창밖을 구경하는데, 문득 며칠 전의 꿈이 떠올랐다.

‘그 꿈은 대체 뭐였을까.’

단순히 꿈이라기엔 어딘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배 속의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는 예지몽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며칠간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아이 역시 엘리사를 안심시키듯 부지런히 꾸물거렸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닌 듯했다.

‘설마 내가 배 속에 있을 때의 기억은 아니겠지?’

이래저래 추론하던 엘리사는 희박한 가능성을 떠올리곤 고개를 내저었다.

‘배 속에 있을 때라고 하기엔, ‘엄마’라고 불린 사람은 나와 분리되어 있었는걸.’

그리고 그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이상했다.

간혹 어린아이들은 배 속에 있을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있지만, 자신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다지 신빙성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설령 기억한다고 해도, 빙의하기 전 12년의 기억이 없는 내가 ‘엘리 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말이 안 돼.’

역시 그냥 꿈인 걸까.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즈음, 마차가 멈췄다.

“마님, 도착했습니다.”

엘리사는 톰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동행한 앤과 함께 곧장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신전은 언제나 그랬듯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였으나, 무언가가 이상했다.

‘응?’

평소엔 저를 알아보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오늘은 인사는커녕 제 시선을 피하며 수군거렸다.

그뿐만 아니라, 정답게 인사를 하던 신관들까지도 엘리사를 못 본 척 외면하고 지나쳤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도 자신과 관련된, 좋지 않은 일이라는 예감이.

때마침 안면이 있는 실리카 신관이 지나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엘리사는 그에게 다가갔다.

“실리카 신관님.”

“고, 공작 부인.”

엘리사와 마주친 실리카 신관은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평소 환대하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사뭇 이상한 모습이었다.

엘리사는 그것이 자신에 관련된 일이란 것을 확신했으나,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혹시 신전에 무슨 일이 있나요?

분위기가 평소랑 묘하게 다른 것 같은데.”

“그, 그것이…….”

해맑은 엘리사의 물음에 실리카 신관은 난감한 표정으로 주위의 시선을 살피며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정말로 성하와 그런 사이십니까?”

“그런…… 사이라니요?”

“……성하와 부인께서 부적절한 관계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그의 말에 엘리사가 기함했다. 황당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공작 부인.”

엘리사가 반박하려던 그때, 옆에서 에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려던 엘리사는 에이든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말을 삼켰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실리카 신관이 다급히 에이든의 앞을 막아섰다.

“안 됩니다, 성하! 지금 사람들이 두 분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아시잖습니까? 그들의 소문에 힘을 실어 주실 생각이십니까?”

“신관께서도 그 소문을 믿으십니까.”

그렇게 되묻는 에이든의 표정은 언제나 그랬듯 담담했으나, 그의 말엔 뼈가 있었다.

허를 찔린 실리카 신관은 에이든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히 성하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에이든은 그를 뒤로한 채 엘리사에게 눈짓을 하고 돌아섰다.

엘리사는 그 뜻을 눈치채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에이든은 인적이 드문 곳에 와서야 걸음을 멈췄다.

엘리사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평소의 부드러움이 사라진, 한껏 굳어진 표정이었다.

“……내가 부주의했구나. 내 감정에 매몰되어 네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엘리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버지 탓이 아니에요. 저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걸요.”

저 역시 난생처음 진심으로 자신을 아껴 주는 부모가 생긴 것이 기쁜 나머지, 상황이 이렇게 될 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엘리사의 머리에 꽂힌 진주 머리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이든이 말을 이었다.

“출산 전까지는 신전에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

“네가 힘들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하게 되어 미안하구나.”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이다.

신경은 쓰이겠지만, 그 소문이 엘리사에게 직접적인 해를 가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사와 에이든의 관계를 밝히면, 세리어트를 몰락시켰던 황제가 엘리사를 눈엣가시처럼 여길 터.

이미 자신과 엮였다는 이유로 율리 아를 잃었던 에이든은 가뜩이나 출산이 임박하여 고생하고 있는 딸아이에게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에이든의 마음을 읽은 엘리사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그때였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엘리사의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어느샌가 나타난 리하르트가 있었다.

성큼 다가온 리하르트는 습관처럼 엘리사의 등을 감싸 안으며 그녀의 옆에 섰다.

“제게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눈에 결의가 어려 있었다.

*

크리스티안의 생일 당일 밤, 황궁에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연회가 시작되기 전, 낯선 가문의 문양을 새긴 마차가 황궁 앞에 멈췄다.

“저 문양은 낯선데.”

“잠깐, 저 문양… 세리어트 후작가의 문양이잖아?”

마침 마차에서 내리던 귀족들이 문양을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이든의 전대까지는 교황과 가주가 따로 있었기에 가주가 황실 행사에 참석하곤 했었다.

하지만 에이든이 교황의 자리에 오른 이후, 세리어트 가문은 지금껏 황실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교황은 신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섬길 수 없는 자.

오직 신의 사자로 살아야 했기에 황제의 신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십년 전의 일 때문에 세리어트가 황실을 껄끄러워한다는 이야기가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그런데, 이십 년 만에 세리어트 가문의 마차가 황궁 연회에 나타난 것이다.

귀족들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곁눈질로 마차를 훑어보는 가운데, 황궁의 기사가 마차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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