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마차 안엔 케인이 홀로 앉아 있었다.
“경, 송구하오나 세리어트 가문은 초대받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황실에서도 황실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세리어트 가문에 초대장을 보내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러자 케인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기사에게 건넸다.
연회 초대장이었다.
“이, 이것은 …….”
그것을 펼쳐 본 기사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정확히는, 단순한 초대장이 아니라 황태자 크리스티안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었다.
기사는 케인에게 다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제, 제가 몰라뵙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에 케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난 괜찮네. 어디 그게 자네 탓이겠나? 참석 명단을 수정하지 않은 자의 잘못인 것을. 내게 사과할 것 없네.”
“너그럽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기사는 재빨리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케인은 느긋하게 마차에서 내려 눈앞의 황궁을 올려다보았다.
생전 처음 와 본 황궁이었다.
케인이 황궁을 올려다보고 있던 그때, 기사 두 명이 다가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후, 황궁의 기사들이 케인과 하인의 몸수색을 마쳤다. 그러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황궁의 시종이 케인에게 다가왔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황궁 안으로 들어서자, 곳곳이 황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전경이 보였다.
케인이 황궁을 둘러보며 연회장으로 향하던 그때, 근처에서 소곤거리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남성분은 처음 뵙는 분 같은데. 누구시죠?”
“아까 들어오면서 듣기로, 세리어 트 후작가의 차기 가주님이시래요.”
그들의 시선을 의식한 케인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크라바트를 괜스레 한 번 더 고정했다.
“어머, 세리어트 후작가라고요? 세리어트 후작가는 황실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차기 가주님부터는 황실과 가깝게 지내기로 한 것 일지도요. 이제 악연이 잊힐 만큼 시간이 꽤 흐르긴 했으니까요.”
케인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황태자를 구슬리느라 내가 애 좀 썼지.’
일주일 전, 에이든과 엘리사의 관계에 대한 소문을 들은 케인은 크리스티안의 측근인 블레넘 백작 영식을 찾아갔다.
꽤 오랜 시간 친하게 지내온 친우가 블레넘 백작 영식과 친한 사이였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블레넘 백작 영식을 회유해 크리스티안과의 만남을 주선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어렵게 만난 크리스티안은 당연하게도, 케인을 탐탁지 않아 했다.
‘세리어트의 차기 가주가 왜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현 가주는 나를 아주 고까워할 텐데.’
케인은 그동안 에이든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황실 행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현재 에이든이 가문의 일에서 손을 뗐다고는 해도 현 가주는 그였고, 가문 내에 에이든을 따르는 자들 또한 아직 많았다.
케인이 그나마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고는 하나, 가문의 힘을 이어받지 못한 몸이었다. 그를 대체할 후계자 후보는 얼마든지 많았다.
그의 동생도 있고, 그의 사촌들도 있었다.
하지만 영지를 운영하다 보니 이제 가문 내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게다가 최근엔 루벨린 공작 부인과의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가문 내에서도 에이든을 불신하는 세력이 생긴 터였다.
케인은 에이든의 힘이 약해진 지금 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에이든을 따르는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할 기회.
그래서 크리스티안을 찾았다.
‘이제 세대가 바뀌었지 않습니까?
태양이 지고 다음 날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듯, 제가 이끌어 갈 세리어트는 이전의 세리어트와는 다를 것입니다.’
‘….…흐음.’
‘이 제국 또한 그렇습니다. 황제폐하의 영광은 아렌시아에 영원토록남을 것이나, 다가올 전하의 아렌시아 또한 새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아렌시아를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제게 주십시오.’
그의 말에 크리스티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는 현 가주와 달리 총명하고 융통성이 있군, 새 시대에 걸맞은 인재야. 마음에 들어.’
그는 케인에게 흔쾌히 연회 초대장을 써 주었다.
그렇게 참석한 연회였다.
케인은 오늘 연회에 참석하여 자신이 크리스티안의 세력이 되었음을 알리고, 귀족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을 심산이었다.
“이쪽입니다.”
시종을 따라 도착한 연회 홀에 이미 도착한 귀족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두 사람이 있었다.
엘리사와 리하르트였다.
엘리사와 관련된 소문 탓인지 그 누구도 선뜻 그들 가까이 다가가진 않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흘깃흘깃 그들에게로 향했다.
아름다운 것에 자연히 눈이 가듯, 한 폭의 그림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연인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 소문 때문에라도 참석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엘리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벨테인 후작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케인은 그런 엘리사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때도 느꼈지만, 보통 여자가 아니군.’
장신구점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엘리사가 못마땅했지만, 고마운 점도 있었다.
소문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에이든과 엮여 준 덕분에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
‘조금 더 이용해 볼까.’
케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엘리 사에게 다가섰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 했다.
그는 이 기회에 엘리사를 적으로 돌리고, 그녀를 아니꼬워하는 이들에게 호감을 얻을 계획을 세웠다.
“공작 부인, 여기서 또 이렇게 뵙는군요.”
시작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케인은 엘리사와 진흙탕 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다. 진흙탕 싸움을 하면 결국 이쪽의 이미지도 상하기 마련.
그는 웃는 얼굴로, 은근슬쩍 엘리 사를 힐난할 생각이었다.
장신구점에서 보였던 서늘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잠시 기억을 더듬던 엘리사가 기억났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아! 장신구점에서 내 아랫사람의 몸을 더듬었던 그 사람이군요.”
엘리사의 목소리에,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시선들이 이번엔 케인에게로 향했다.
케인은 엘리사의 직설적인 말에 당황했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그저 작은 오해였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오해하겠습니다. 그 일은 이제 그만 잊어 주시지요.”
“오해라니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예?”
“그때, 만졌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케인을 바라보는 엘리사의 눈에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장신구점에서의 그때처럼.
엘리사의 이야기를 들은 귀족들이 이젠 엘리사가 아닌, 케인에 대해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케인의 의도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미친 여자가, 지금 여기서 나랑 진흙탕 싸움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고작 하녀 하나 때문에?’
케인은 이를 으드득 갈며 엘리사에게 한마디 하려다, 엘리사의 옆에 버티고 선 리하르트를 보고는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
엘리사에게 조금이라도 언성을 높였다간, 금방이라도 제 목을 날릴 것 같은 살벌한 눈이었다.
엘리사의 페이스에 휘말린 케인은 본래의 목적은 잊은 채 이 상황을 수습하는 데만 혈안이 되었다.
그는 엘리사에게만 들릴 정도로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부인, 그 일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언급하시는 건 그 하녀를 위해서도 좋지 않습니다. 한창때의 젊은 아가씨에겐 여자로서의 이미지가 실추되는, 아주 치명적인 이야기란 말입니다.”
“왜 그 아이에게 치명적이죠?”
엘리사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잘못은 경이 했잖아요.”
그러고는 언제 천진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경멸 어린 눈으로 케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피해자가 몸을 사려야 하지?”
장신구점에서 들었던, 섬뜩할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였다.
엘리사의 말을 들은 귀족 여성들이 다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매너 있는 신사에서 한순간에 성추행범으로 몰락한 케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차마 엘리사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황제와 황후, 크리스티안과 로제의 등장에 사람들의 관심사가 그쪽으로 옮겨 갔다.
탄신 연회에서 황제의 축사가 끝나면, 다음 차례는 선물 헌정식이었다.
매년 어떤 값비싸고 진귀한 선물이 진상되는지는 귀족들의 큰 관심사중 하나였다.
덕분에 케인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엘리사를 노려보며 이를 으득갈고는, 자신의 친우와 블레넘 백작영식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 계집이 뭐라 떠들든 상관없다.
어차피 혼자 떠드는 것일 뿐, 그런 소문은 남자인 내겐 큰 타격이 없으니.’
케인은 엘리사를 무시한 채 자신의 성공적인 선물 헌정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때, 시종장이 황급히 황제에게 다가섰다.
그의 손엔 서신이 들려 있었다.
“폐하. 교황으로부터 온 서신입니다.”
“연회가 끝나고 읽도록 하지.”
“그, 그것이… 후계자와 관련된 문제라고 합니다.”
아렌시아의 모든 귀족들은 후계자를 정할 때 황제에게 알리도록 되어 있었다.
가문의 일이기에 황제가 간섭하진 않지만, ‘이 사람이 나의 뒤를 이어 당신의 신하가 될 사람이다’라고 알리는 일종의 통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후계자와 관련된 이야기라니.
그것이 황제의 흥미를 돋웠다.
황제는 에이든이 보낸 서신을 펼쳤다.
[세리어트의 가주 에이든 세리어 트, 폐하께 서면으로나마 인사를 올립니다.
가주의 위치에서 이렇게 서신을 보낸 것은, 세리어트의 차기 가주에 대해 아뢰기 위함입니다.
세리어트의 가주, 에이든 세리어트는 오늘부로 케인 세리어트를 후계 자의 자리에서 파면합니다.]
난데없는 이야기에 황제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다음 문단을 읽은 순간, 황제의 눈빛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그런 기색을 눈치챈 케인은 의아한 눈으로 황제와 서신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옆에 있던 크리스티안은 그런 부황의 기색을 알아채고 물었다.
“폐하, 어찌 그러십니까?”
그때였다.
이번 차례인 케인 대신, 엘리사가 황제와 크리스티안의 앞에 홀연히 나섰다.
고요한 가운데, 연회장의 모두가 그런 엘리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직 황제만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엘리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연회장 안 모두의 시선이 제게로 향한 것을 느낀 엘리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렌시아의 개국 공신.”
조용한 분위기 속에 엘리사의 목소리만이 또렷하게 울렸다.
“신의 뜻을 받드는 자.”
“생명의 힘을 이어받은 세리어트의 차기 가주.”
엘리사는 동요하는 황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엘리사 세리어트, 황제 폐하께 정식으로 인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