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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93화 (93/164)

93화

엘리사의 충격적인 발언에 케인은 물론, 황실 일원들과 귀족들 모두 입을 떡 벌렸다.

황제는 못마땅한 눈으로 에이든의 서신과 엘리사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공석인 차기 가주의 자리에는 제 딸, 엘리사 루벨린을 임명하고자 합니다.]

고요하던 연회 홀이 삽시간에 웅성거리며 소란스럽게 변했다.

“공작 부인은 로엔그린 자작가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세리어 트의 후계자라니?”

“방계의 후손인 걸까요?”

“어쩌면 교황 성하께서 비밀리에 사생아를 보셨다거나….”

온갖 억측이 퍼져 나가던 그때, 어리벙벙한 채 지켜보던 케인이 엘리 사를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교황 성하와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엮였던 여자가 갑자기 세리어트의 차기 가주라니요? 그저 이번 일을 무마하고자 무리수를 던진 것 아닙니까?”

엘리사의 출신에 혼란스러워하던 귀족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엘리사를 탐탁지 않아 하는 몇몇 귀족들이 케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엘리사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반박 대신 두 손바닥을 펼쳐 모았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 위에 마나가 모여들며 자그마한 물방울이 형성되었다.

처음엔 손톱만 하던 물방울이 점점 부피를 키워 엘리사의 얼굴만큼 커지더니, 이내 두둥실 떠올랐다.

귀족들은 그 경이로운 광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사람들의 관심이 모인 순간, 엘리 사의 물방울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톡 터졌다.

그 바람에 작은 물방울들이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튀었다. 마찬가지로 가까이에 있던 케인의 얼굴에도 물방울이 튀었다.

케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 냈다.

‘이건…… 진짜 물이잖아?’

그의 손등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묻어 있었다.

저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으나, 결코 가질 수 없었던 힘.

케인은 그것에서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엘리사와 자신 사이의 벽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엘리사의 말에 반박하지 못한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엘리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케인을 보며 대꾸했다.

“이것으로 경의 오해에는 충분한 해명이 된 것 같네요.”

엘리사의 힘을 본 귀족들은 더 이상 무어라 떠들지 못했다.

엘리사가 누구의 딸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차기 가주의 자질을 갖추었음은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황제조차도.

‘저 힘……….’

황제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그가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혈통을 끊고 싶어 했던 그 세리어트 후작가의 후계자가 눈앞에 있었다.

에이든과 엘리사의 스캔들로 루벨린과 리하르트에게 불명예를 씌울 생각에 들떠 있었던 크리스티안 역시 이를 부득 갈았다.

‘계획이 성공했네.’

엘리사는 일그러진 그들의 얼굴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리하르트는 담담한 눈으로 엘리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엘리사가 공개적으로 나설 수 있었던 건, 그가 자신에게 향할 모든 위험들을 막아 주리란 믿음 덕분이었다.

엘리사는 그런 리하르트를 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엘리사를 본 리하르트의 표정도 한결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엘리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일주일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

“제게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리하르트의 말에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생각이라니?”

“이 기회에 공개적으로 장인어른과 엘리사의 관계를 밝히죠.”

그 말인즉,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뜻이었다.

에이든은 단박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어차피 평생 숨기실 생각이 아니라면, 그냥 조금 앞당겨 밝히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황실은 두말할 것도 없고, 세간의 모든 이목이 엘리사에게 집중될 겁니다. 가뜩이나 힘들 시기에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휘말려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간의 이목을 받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합니다.”

리하르트의 말에 엘리사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엘리사는 재빨리 리하르트의 의견에 동의했다.

“리하르트의 말이 맞아요. 전 소문같은 건 이미 이골이 났거든요. 또다른 소문 하나 더 얹어진다고 해서 더 신경 쓰이진 않아요.”

“……..”

“그보다는, 아버지를 한동안 뵙지 못하는 게 더 신경 쓰이겠죠.”

리하르트의 말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에이든은 엘리사가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자,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딸바보 아빠의 모습이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서늘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엘리사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섭섭한 척 한술 더 떴다.

“아버지는요? 아버지는 그동안 저를 만나지 못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우리,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데.”

침울해하는 엘리사의 모습을 본 에이든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물론 나도 아쉽지만……….”

리하르트는 말끝을 흐리는 에이든의 걱정을 단박에 간파했다.

그는 황제가 엘리사에게 해코지를 하진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압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

“제 조부는 세리어트의 몰락을 묵인했지만, 저는 세리어트를 지킬 테니까요.”

리하르트는 곧 지금의 루벨린, 그 자체였다.

엘리사는 세리어트의 핏줄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루벨린 공작 부인이기도 했다.

엘리사를 건드린다는 것은 곧 세리 어트와 루벨린을 동시에 건드린다는 의미.

제아무리 황제라도 섣불리 손을 댈순 없을 터였다.

“그 누구도 엘리사를 건드릴 수 없도록.”

설령 그것이 황제라 해도.

그렇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눈엔 엘리사를 건드리는 자는 누구라도 가만히 두지 않을 듯,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니, 부디 엘리사의 곁에 있어 주십시오.”

엘리사는 그런 리하르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새삼스럽게도 그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동시에 정말 아무 일도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가 지금처럼 자신의 뒤에 버티고 있어 준다면.

리하르트의 존재에 든든함을 느낀 엘리사는 최근에 계속 생각해 왔던 또 다른 계획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리고, 세리어트의 후계자 자리 말이에요.”

에이든과 리하르트는 의미심장하게 운을 떼는 엘리사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그 자리, 제가 앉아야겠어요.”

*

크리스티안의 생일 연회에서 도망치다시피 나온 케인은 곧장 신전으로 왔다.

평소 늘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모습은 사라지고, 분노로 가득찬 모습이었다.

일이라도 칠 기세로 신전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신전 앞의 성기사들이 막아 세웠다.

케인은 살기등등한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명령했다.

“성하를 뵈러 왔다. 비켜라.”

“시간이 늦었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신전은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모든 제국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지만, 해가 저문밤이면 문을 닫았다.

하지만 케인은 막무가내였다.

“비키라고 했다. 그대들은 내가 누군지 모르나? 나는 장차 세리어트를 이끌 차기 가주다. 후계자가 가주님을 뵙겠다는데 감히 앞을 막아서는 건가?”

케인의 말에 성기사들이 멈칫했다.

케인은 그들이 이제 비켜설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들은 비켜서긴커녕 더 단호하게 막아섰다.

“송구하오나, 차기 가주님은 다른 분이시니 숙지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에 케인의 눈이 뒤집어졌다.

“차기 가주는 나야! 나 말고 누가 차기 가주라는 말이냐? 쭉정이 같은 네놈들이 뭘 안다고 떠들어!”

케인은 성기사들에게 무력으로 밀어붙이고 신전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한 걸음 딛기도 전에 맥없이 성기사들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거 놔! 이거 놓지 못해, 이 자식들아? 어딜 감히! 감히……!”

“케인을 놓아주십시오.”

케인이 신전 앞에서 추태를 부리고 있던 그때, 서늘한 얼굴을 한 에이 든이 나타났다.

성기사들은 에이든에게 곧장 돌진하려는 케인을 한 번 더 저지한 후, 마지못해 놓아주었다.

케인은 에이든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 걸음은 위태롭고 난폭했으나, 케인보다 체격이 큰 에이든에겐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케인은 에이든의 양팔을 붙잡고 애원하듯 그에게 매달려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성하, 오늘 황궁 연회에서 아주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

“들어보십시오. 글쎄, 제가 세리어 트의 후계자 자리에서 파면되었다지 뭡니까? 그것도 황제 폐하께서 그런 농담을 하시더군요! 허, 참. 아무리 세리어트가 못마땅하셔도 그렇지.”

“……..”

“그러고는, 세리어트와는 전혀 무관한 공작 부인이 후계자가 된다고 하더군요. 기가 막혀서.”

케인은 현실을 부정하듯 이야기를 쏟아 내었으나, 그를 바라보는 에이 든의 눈빛은 서늘하기만 했다.

곁을 내어주진 않아도, 늘 부드러웠던 과거의 눈빛과는 다른 눈이었다.

케인은 그 변화를 부정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이 아니지요? 그 여자와의 스캔들을 끊어 내기 위해 더 큰 건을 터트리신 것이죠?””

“…….”

“그런 이유라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니 -”

“전부 사실이다.”

“예?”

“내가 케인, 너를 파면했다.”

에이든의 무심한 눈빛이, 감정 없는 목소리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못을 박았다.

에이든은 경멸 어린 눈으로 케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게, 그 자리를 주는 것이 아니었다.”

“…….”

“내 선택을 후회해.”

멍하니 에이든을 바라보던 케인은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가주가 되기 위해 살아왔어요. 성하께서 그리 키우셨지 않습니까?”

“그 애는 성하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되게 하세요. 저는 가주의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선대에는, 교황과 가주가 따로 있지 않았습니까?”

케인이 막무가내로 에이든에게 매달리고 있던 그때였다.

등 뒤에서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당신 같은 사람에겐 가주자리를 넘겨줄 수 없어.”

뒤를 돌아보자, 막 이쪽으로 다가오는 엘리사와 리하르트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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