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엘리사를 본 케인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난 반평생을 세리어트를 위해 살아왔어! 나보다 더 가주의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악에 받쳐 반박하는 케인과 달리, 엘리사는 무심한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장신구점에서 만났던 그날 이후, 당신에 대해 조사해 봤어요.”
“하! 그새 뒷조사까지 했군.”
“영지민들 사이에서 평판이 꽤 좋더군요.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팔을 걷고 나서고, 영지의 문제도 현명하게 해결하고.”
엘리사의 말에 케인은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그래. 당신이 루벨린에서 하하호 호 공주님 놀이나 하고 있을 때 난세리어트를 위해 헌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면엔…”
엘리사는 예의를 집어던지고 자신을 낮잡아 보는 케인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대단한 여성 편력가. 권력을 이용해 여러 여성을 희롱하고 추행한 성범죄자.”
그 말을 들은 케인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런 케인을 바라보는 엘리사의 눈빛에 혐오와 경멸이 어렸다.
케인은 에이든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영지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실제로 좋은 결과를 여러번 이끌어 내기도 했다.
하지만 뒤에선 권력으로 여성들을 희롱하고 입막음했다.
그런 그가 과연 진심으로 영지민들을 염려하고 생각하여 베풀었을까.
“가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영지민들에겐 헌신하는 ‘척’했겠지.”
“…….”
“개인의 권력과 유흥을 위해 노력하는 걸 ‘헌신’이라고 하나?”
“…..”
“결국 당신은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자신을 떠받들어 줄 도구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잖아.”
엘리사는 세리어트의 가주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 물론 교황의 자리에도 관심이 없었다.
케인의 말대로 가주의 자리는 기존의 후계자에게 넘겨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앤을 추행한 그 남자가 세리어트의 차기 가주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하지만 엘리사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케인은 뜨끔하기는커녕 오히려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계집애 몇 명 좀 데리고 논게 뭐 그리 대수라고 가주 자리를 운운하는 건지…….”
“…뭐?”
“그래. 반반한 얼굴로 이 남자 저 남자 후리고 다니는 계집애 몇 명 좀 혼내 줬지. 그런 식으로 남자를 후리고 다니면 큰일이 날 거라고 말이야.”
“…….”
“그런데, 그래서?”
제 잘못을 모른다는 듯 웃으며 엘리사를 바라보는 케인의 눈은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세리어트 영지를 잘 보살펴 왔고, 나로 인해 많은 영지민들이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
“당신이 공작가에서 예쁜 드레스나 입고 달콤한 쿠키나 먹는 동안 말이야.”
엘리사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으리라 생각하며 비꼬는 케인의 말에 리하르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케인에게 마법을 사용하려는 순간, 엘리사가 리하르트의 팔을 붙잡았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케인은 계속해서 엘리사에게 이죽거렸다.
“알량한 정의감 따위로는 사람들을 구할 수 없답니다, 공작 부인.”
‘공작 부인’이라는 호칭에 악센트가 들어갔다.
비아냥거리는 어조였으나, 엘리사는 도발에 발끈하긴커녕 피식 미소를 지으며 그런 케인을 바라보았다.
“원래 내 노력은 어렵고, 남의 노력은 참 쉬워 보이지.”
케인이 간과한 한 가지 사실은, 리하르트가 출정한 동안 병상에 누운 알버트를 대신해 루벨린을 이끈 사람이 엘리사라는 사실이었다.
엘리사는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알량한 정의감’이 과연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세리 어트의 차기 가주가 되어 보여 줄게.”
“그 말은….”
“고향 땅에 가서 자숙하며 지켜 봐.”
그 말은 즉, 케인을 세리어트 가문에서 아예 쫓아내겠다는 뜻이었다.
그 의미를 파악한 케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엔 절망이 자리했다.
평생 자신이 열망해 온 것을 잃은 자의 절망.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나의, 나의 세리어트다! 내가 반평생을 바쳐 만들어 온, 나의 가문이라고!”
케인은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엘리 사에게 달려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볼 리하르트가 아니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제 뒤로 밀어 보호하고, 달려드는 케인의 정강이를 가격해 그를 제압했다.
“아악!”
정강이를 정통으로 맞은 케인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그대로 엎어졌다.
리하르트는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듯 내려다보다, 근처에 있던 톰슨에게 명령했다.
“톰슨, 후작저까지 데려다주고 와라.”
“예, 각하.”
톰슨과 루벨린의 기사들은 고통을 호소하는 케인을 질질 끌고 가 후작저의 마차에 태웠다.
“이거 놔! 저 계집이 가주가 되는 건 인정 못 해! 나의 세리어트라고!”
케인이 욕지거리를 하며 발버둥 쳤으나, 마차는 광장 쪽으로 사라졌다.
에이든은 멀어지는 마차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엘리사에게 다가섰다.
“엘리사. 괜찮니?”
“전 괜찮아요.”
엘리사는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황궁에서의 일을 이야기하려던 그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마차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온 마차가 신전 앞에서 멈춰 섰다. 벨테인 후작가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였다.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리고, 올리 비아가 내렸다.
올리비아는 엘리사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그녀의 눈에 슬픔과 그리움, 반가움 등의 여러 감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엘리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천천히 다가왔다.
엘리사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올리비아는 자신의 오랜 친구의 눈과 꼭 닮은 그 딸의 눈을 바라보다, 엘리사의 뺨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네가…… 눈에 밟히는 이유가 있었구나.”
엘리사는 멍하니 그녀를 마주 보았다. 맞닿은 뺨으로, 떨리는 올리비아의 손이 느껴졌다.
“네게서 율리아가 보이는 이유가 있었어….”
올리비아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눈을 깜빡이지 못했다.
눈을 깜빡이면, 엘리사가 사라질까 겁이라도 나는 것처럼.
그녀의 눈빛, 손길, 목소리, 그녀의 전부에서 죽은 친구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엘리사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올리비아는 그런 엘리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무사히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아가.”
그녀의 말에, 엘리사가 울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감정을 추슬렀다.
리하르트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엘리사를 감쌌다. 가을을 앞둔 시기라, 밤바람이 제법 선선했다. 눈물을 쏟아 낸 엘리사에게 찬바람은 위험할 터였다.
올리비아는 엘리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고는, 에이든을 쏘아보았다.
“왜 제겐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에이든은 난감한 표정으로 올리비아의 시선을 피했다.
“……엘리사가 조금 전 같은 상황을 부담스러워할까 봐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거라면 괜한 걱정을 하셨군요.”
올리비아는 눈을 세모꼴로 뜨고 에이든을 흘겨보다, 다시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언제 에이든을 흘겨보았냐는 듯 다정한 눈빛이었다.
“그러잖아도 출산일이 다가오는데 친정 엄마가 없는 게 신경 쓰였단다. 네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차마 말하지 못했는데, 이젠 율리아 핑계를 대고 곁에 있어 줄 수 있겠어.
편하게 엄마라고 생각하렴.”
올리비아는 엘리사를 향해 장난스럽게 윙크하며 덧붙였다.
올리비아의 말에 놀란 듯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는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생각했다.
일찍 내 자리를 찾길 잘했다고.
*
황궁 연회가 파한 야심한 시간.
톡. 톡….
황제의 침실에 심기가 불편한 황제의 손가락이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황제는 오늘 연회에서 밝혀진 엘리 사의 정체를 떠올리며 이를 으드득갈았다.
그런 그의 곁을 레이모어가 지키고 있었다.
“알버트 루벨린. 그 늙은 여우가 한미한 자작가의 계집을 며느리로 들인 이유가 있었군. 그저 임시방편인 줄 알았더니.”
“……”
“레이모어. 이제 어찌하면 좋나?
세리어트의 ‘진짜’ 후계자가 나타났어. 그 예언은 어떻게 되는 거지?”
‘예언’을 언급하는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몹시 초조해 보였다.
“게다가 루벨린에서 그 힘을 가지게 되었으니…….”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침묵하고 있던 레이모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폐하. 제가 그 예언을 아뢰며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잠시 기억을 되짚던 황제가 대답했다.
“…예언이란 미래를 바꾸기 위해 있는 것. 예언된 미래의 가능성을 없애 버리면,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하였지.”
“그렇습니다. 예언이란 물론 중요한 것이나, 더 중요한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예언을 알고 계시는 폐하께선 얼마든지 새로운 미래를 여실 수 있습니다.”
그제야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던 황제의 손가락이 멈췄다.
레이모어는 황제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가 다른 방법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우선 잠자리에 드시어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과연 그대의 말이 옳다.”
황제는 레이모어의 말대로 곧장 침실에 들었다.
레이모어는 그에게 예를 갖추고 황제의 침실을 나왔다. 침실을 나오자마자, 공손하던 표정은 사라지고 싸늘한 눈빛만이 남았다.
마차로 향하는 그의 머릿속엔 오늘 연회에서 보았던 엘리사의 모습이 가득했다.
‘평범한 계집인 줄 알았더니……….
그래서 아직까지 왕의 힘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나.’
레이모어는 엘리사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던 리하르트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 계집, 대의에 방해가 된다.
없애야 한다. 반드시.’
황궁을 나서는 그의 눈빛이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