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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95화 (95/164)

95화

#11. 광기 어린 충성이 향하는 곳

엘리사가 에이든의 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보름이 지났다.

아카로아에는 어느덧 가을이 다가와 있었다.

그동안 세리어트 후작가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차기 가주로 있던 케인을 쫓아낸 것이다.

에이든은 케인의 체면을 생각해서 자진하여 정리하고 가문을 떠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었다.

덧붙여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재산을 나눠 주었다. 남은 평생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날 내쫓겠다는 거지?’

하지만 케인은 나갈 수 없다며 버텼고, 결국 세리어트 후작가 기사들의 손에 끌려 꼴사나운 모습으로 쫓겨났다.

에이든은 새로운 차기 가주를 맞이 할 준비를 마친 후작저에 엘리사를 데려가기로 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하녀들은 중요한 날인 만큼 평소보다 엘리사의 치장에 한껏 공을 들였다.

엘리사가 즐겨 입던 밝은 톤의 드레스 대신 살짝 어두운 톤의 드레스를, 장식들도 고급스러우면서도 깔끔하고 단순한 디자인을 선택했다.

차기 가주로서의 위엄을 주기 위해서였다.

치장을 마친 하녀들은 자신들의 완성된 작품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님,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맞아요! 세리어트의 기사들이 마님을 보자마자 달려 나와서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할 거라고요.”

“기사들뿐이겠어요? 사용인들도 모두 마님에게 반할 거예요.”

하녀들이 재잘거리자, 호들갑에는 재주가 없는 앤도 진심을 담아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그들의 너스레에 웃음을 터트렸으나, 머리로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반길 리가 없지……..’

분쟁이 생기면, 사람들은 누구의 잘잘못인지를 떠나 양쪽을 다 분란 분자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원인 제공을 한 쪽도 잘못이지만, 거기에 맞서는 이도 분쟁이 생길 만한 상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케인은 영지민들에게 꽤 평판이 좋은 차기 가주였고, 엘리사는 지금껏 그들과 접점이라곤 없는 외지인이 아닌가.

그들이 엘리사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뭐, 지금부터 그 생각을 바꿔 가야지.’

엘리사는 그렇게 의지를 다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엘리사.”

리하르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하녀들은 방문을 열어 준 후, 조용히 방을 나갔다.

엘리사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리하르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9월 중순에 접어들자, 제국은 한 달 후에 있을 수확제 준비로 분주해졌다.

리하르트 역시 며칠 전부터 귀족회의에 참석하느라 이른 아침 공작저를 나서곤 했다.

평소 같으면 그가 황궁으로 출발했을 시간이었다.

“리하르트? 오늘은 황궁에 -”

의아해하며 그를 올려다보던 엘리 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가 얼굴을 그녀 쪽으로 기울였으니까.

예고 없이 훅 가까워진 그와의 거리에, 엘리사는 숨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그의 붉은 눈이 있었다.

다정한, 그러나 밤이 되면 저를 집어삼킬 듯 돌변하는 위험한 눈이.

그 눈빛에,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엘리사, 머 -”

리하르트가 무어라 입을 뗀 그 순간, 엘리사의 두 손바닥이 그의 두 눈을 때리듯 가렸다.

제 감정이 들킬까 겁이 나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아.”

불시에 눈을 공격당한 리하르트가 작은 신음을 흘리며 엘리사의 손을 붙잡았다.

저가 밀어내고서는, 저가 되려 흠칫 놀란 엘리사가 리하르트에게 잡힌 한쪽 손을 뗐다.

“리, 리하르트? 아파?”

손을 치우자, 가려져 있던 리하르트의 눈이 다시 드러났다.

살짝 찡그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시 두근거렸다.

그 두근거림이, 아렸다.

아팠다.

“…엘리사?”

리하르트는 들켜선 안 될 것을 들킨 아이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엘리사를 의아한 듯 불렀다.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린 엘리사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왜, 왜 왔어?”

“머리, 이렇게 갈까?”

뜬금없이 머리 모양을 묻는 리하르트의 질문에 엘리사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머리는 갑자기 왜?”

“오늘 후작저에 가는 날이잖아.”

엘리사는 그제야 그가 왜 황궁에 가지 않았는지, 그리고 저를 찾아왔는지 이해했다.

그는 수렵제 전날, ‘중요한 자리엔 특히 더 신경 써야 한다’며 자신이 그의 옷과 머리를 점검해 주던 것을 기억하고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를 후작저에 데려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리하르트,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한데, 오늘 후작저엔 나 혼자 갈 거야.”

엘리사의 말에 리하르트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왜?”

“네가 가면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너를 의식할 테니까. 그건 나의 힘이 아니라, 너의 힘이지.”

“…….”

“루벨린의 이름에 기대어 허울뿐인가주가 되는 건 싫어.”

“…….”

“이건 나 혼자서 해내야 할 문제야.”

그렇게 말하는 엘리사의 눈빛은 이미 그러기로 결심한 듯 단호했다.

그 단호한 눈빛에, 리하르트는 반박하지 못했다.

임신 후기에 들어선 엘리사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번 일은 그녀 혼자서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리하르트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조심해서 다녀와.”

“응. 다녀올게.”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리하르트는 마차가 공작저를 나서 모습을 감출 때까지 물끄러미 지켜보다 돌아섰다. 돌아서 집무실로 향하는 그의 표정이 걱정으로 굳어져 있었다.

‘아이를 물가에 내놓은 심정이 이 럴까.’

집무실에 와서도 리하르트는 좀처럼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런 리하르트의 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지켜보던 아가일이 그를 부르려던 그때, 살짝 열려 있는 발코니 문 사이로 돌풍이 들이쳤다. 이제 완연한 가을바람이었다.

“이제 정말 가을이네요.”

아가일은 분위기를 환기할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며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각하?”

그런 리하르트의 시선이 열린 발코니 문으로 향해 있었다.

무언가, 해결책을 찾은 듯한 표정이었다.

*

세리어트 후작저는 아카로아 중심부에 밀집되어 있는 여느 귀족 저택과 달리,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호수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정경 위에 자리한 저택은 타운하우스보다는 별장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와, 풍경이 너무 예뻐요. 마님.”

마차 창문 너머로 그 풍경을 구경하던 앤이 경탄했다.

엘리사가 앤과 같이 주위 풍경을 둘러보는 사이, 두 사람이 탄 마차가 세리어트 후작저의 대문을 통과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 앞에는 먼저 도착한 에이든이 엘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렴, 엘리사. 다들 널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는 평소의 법복 차림이 아닌, 평범한 귀족 남성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딴 사람처럼 낮설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아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새로운 모습의 그보다 더욱 관심이 쏠린 것은 그의 곁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과 기사들이었다.

엘리사를 마주한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차기 가주님을 뵙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가주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으나, 엘리사는 낯선 외지인을 경계하는 그들의 눈빛을 느꼈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그들 중 가장 앞쪽에 있던 중년의 남자가 앞으로 나와 엘리사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가주님. 저는 집사 프레드릭이라고 합니다.”

“프레드릭,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할게요.”

엘리사가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네 자, 프레드릭도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엘리사를 경계하는 가운데, 그만 홀로 경계심을 풀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알고 있다.

‘노련한 집사로군.’

집사들은 주인을 따르지만, 대개 한평생에 걸쳐 가문에 헌신하기에 주인보다는 ‘가문’ 그 자체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았다.

그는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 깐깐하게 엘리사의 가주로서의 자질을 판단하고 가늠할 것이다.

그의 판단이 엘리사의 가주 자리를 위협하진 못하겠지만, 그가 엘리사를 진심으로 조력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저택과 본성의 분위기가 판이 하게 달라질 터였다.

“곧 점심시간이라, 바로 식사에 드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습니다.

식당으로 드시지요.”

사용인들과의 인사가 끝나자, 하녀장 카밀라가 에이든과 엘리사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당에 호화로운 음식들이 식탁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루벨린에서도 매일 호화로운 식사를 보는 엘리사에게는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준비한 이들의 마음을 생각하여 과장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많이는 먹기 힘든데. 그래도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돌아온 하녀장의 반응은 무뚝뚝하기만 했다.

그녀는 저를 향해 웃는 엘리사를 가만히 응시하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식당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럼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엘리사는 그녀의 무뚝뚝한 반응에 머쓱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런 엘리사의 기색을 눈치챈 에이 든이 나직한 목소리로 귀띔을 했다.

“카밀라는 네 엄마를 진심으로 따르던 사람이란다. 겉으론 무뚝뚝해 보여도, 속으론 너를 반가워하고 있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엘리사가 쳐다보자, 계속 저를 보고 있었던 카밀라와 눈이 마주쳤다.

불시에 엘리사와 눈이 마주친 카밀라의 눈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비치더니, 이내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으로 엘리사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엘리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에이든도 그런 엘리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있던 그때였다.

“가주님.”

노크 소리와 함께 프레드릭이 다급히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엔 작은 쪽지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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