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그는 에이든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최근 영지에 비센나로부터 넘어오는 이주민들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고 합니다.”
비센나는 세리어트 영지와 산을 하나 두고 붙어 있는 백작령이었다.
두 영지의 사이에 있는 산에는 모든 것을 잃고 산적이 된 이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수확철인 가을과 식량이 떨어지는 봄에 비센나와 세리어트 영지를 습격하곤 했다.
세리어트는 그들의 습격을 철저히 막아 영지민들을 보호했지만, 비센나는 그렇지 않았다.
비센나의 백작은 기사들을 움직이는 비용이 아까워 영지민들을 방치했고, 그 결과 비센나의 영지민들은 산적들을 피해 오히려 세리어트로 넘어오곤 했다.
그래도 세리어트는 외지인에게 개방적인 편이었으므로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는 비센나 백작에게 있었다.
비센나 백작은 치안을 보완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세리어트가 자기네 영지민들을 데려간다며 분개했다.
이는 두 영지 간의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비센나 백작이 감정적인 이유로 교역량을 줄인 것이다.
세리어트는 오랜 시간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나, 늘 있던 일이기에 급한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비센나 백작이 우리 영지로 찾아와 비센나에서 넘어온 영지민들을 색출해 내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에 에이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우리 기사들이 그들을 보호하다 비센나 백작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습니다. 비센나 백작이 본성으로 찾아와 항의를 하고 있다고…….”
그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엘리사는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비센나 백작은 예전부터 엘리소르후작령으로 가는 길목을 탐내고 있다고 들었어요. 함께 산적들을 토벌하는 대가로 통행료를 반으로 줄여주는 건 어떨까요?”
“통행료를 줄인다고?”
“통행료가 줄면 비센나와 엘리소르사이에 교류가 더 많아질 거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세리어트에도 교류가 많아져 이득이 될 거예요.”
엘리사가 내놓은 방안에 프레드릭은 내심 놀랐다.
평범한 귀부인들은 비센나 백작이 어떤 욕심을 가졌는지, 세리어트의 옆에 엘리소르 후작령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은 너무 광활했으니까.
실질적인 경영권을 가진 귀부인들이라도 대부분은 교류가 가능한 가까운 영지의 사정 정도만 알았다.
그런데 엘리사는 북부인 루벨린에서 지냈으면서도, 서부에 있는 세리 어트의 주변 정세까지 꿰뚫고 있는 게 아닌가.
프레드릭은 엘리사의 처세에 내심 감탄했다.
‘선대 공작 각하가 병환으로 자리 보전하는 동안 루벨린을 이끌었다더니, 사실이었군……….’
케인은 제법 영지를 잘 이끌었지만, 프레드릭은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케인이 쫓겨나고 엘리 사가 차기 가주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걱정이 앞섰었다.
물론 공작 부인으로서 어느 정도 영지 경영을 해 본 경험은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북부에서의 일이다.
북부에서만 살아온 그녀가 서부의 사정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그의 편견을 조금 전 엘리사가 부순 것이다.
프레드릭은 그제야 에이든이 그저 혈육의 정만으로 엘리사를 차기 가주의 자리에 세우지 않았음을 알아챘다.
‘아직 정식 가주도 아닌데, 내가 주제넘었나………?’
프레드릭의 놀란 시선에 고민하던 엘리사가 재빨리 덧붙였다.
“음, 이건 그냥 제 의견이니까 이런 관점도 있구나, 하고 참고만 해주세요.”
“세리어트 영지와 주변 정세에 대해서 잘 알고 있구나.”
“선대 공작 각하는 쓸모가 없는 사람은 가차 없이 버리는 분이셨거든요. 그 밑에서 버티려면 제 몫을 해야 했어요.”
에이든은 그렇게 말하는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모 없는 곳에서 고생했을 딸아이가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한편, 그 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 주어 기특하기도 했다.
에이든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프레드릭에게 지시했다.
“이번 일은 이렇게 처리하는 게 좋겠군, 프레드릭.”
에이든의 말에 엘리사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만류했다.
“무조건 제 의견을 따라 주실 필요는 없어요. 세리어트 영지에 대해서는 저보다 아버지가 훨씬 더 잘 아실 테니까요.”
“아니. 아주 괜찮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단다. 프레드릭, 자네의 생각은 어떻지?”
“가주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갈등을 빚지 않고 양방이 이득을 취할 수 있으니, 그보다 좋은 대책은 없을 겁니다.”
다른 방안을 고려해 볼 것도 없이 엘리사가 내놓은 방안이 채택되었다.
프레드릭은 영지에 서신을 보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엘리사는 식당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루벨린에서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판단을 내리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익숙했지만 이곳에서는 아직 어색했다.
그런 엘리사의 마음을 읽은 에이든이 말했다.
“그냥 지금까지 루벨린을 이끌어온 것처럼 세리어트를 이끌면 돼, 엘리사.”
“이제 이곳도 너의 집이고, 너의 사람들이니.”
나의 집, 나의 사람들.
그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이 가문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엘리사는 자신을 격려하듯 제 손등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는 에이든을 바라보다, 이내 게슴츠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으음, 아무래도 늘어난 일을 저한테 떠넘기시려는 의도 같지만…….”
“이런, 들켰나.”
에이든은 엘리사의 의심을 발뺌 한번 않고 곧장 인정했다.
그의 장난기 어린 반응에 엘리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씩 웃으며 의지를 다졌다.
“그래도, 제가 자진한 자리니까 열심히 해 볼게요.”
그런 엘리사의 모습에, 에이든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
식사를 마친 후, 후작저를 돌아보며 사용인들과 얼굴을 익힌 엘리사는 루벨린 공작저로 돌아가기로 했다.
후작저 곳곳에 아직 둘러보지 못한 장소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산달이 가까워 오는 만큼 무리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가 볼게요, 아버지.”
마차 앞에 선 엘리사는 에이든을 돌아보며 인사를 건넸다.
에이든은 그런 엘리사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엘리사를 바라보았으나,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엘리사는 그런 에이든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채 톰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창밖의 에이든에게 인사를 하려는 그 순간, 저택 지붕 쪽에서 불현듯 시선이 느껴졌다.
엘리사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당연히 지붕에 아무도 없었다.
‘기분 탓인가………?’
엘리사가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에이든과 톰슨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엘리사?”
“마님, 출발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엘리사는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조만간 또 봬요, 아버지.”
“그래. 조심해서 가렴.”
이윽고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가 세리어트 후작저를 나섰다.
에이든은 점점 멀어져 작아지는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에서 차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런 에이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레드릭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데려다주겠다고.”
평생 에이든의 곁에서 지켜봐 온 프레드릭은 그가 차마 꺼내지 못한 속마음까지 꿰뚫고 있었다.
그것이 익숙한 에이든은 고개를 내저었다.
“내 감정에 치우쳐서 저 아이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아가씨께서는 가주님이 데려다주시길 기대하셨을지도 모르지요.”
프레드릭의 말에 에이든은 흠칫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엘리사의 마음이었다.
프레드릭은 그런 에이든에게 말했다.
“다음에 먼저 찾아가 보시지요.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날 때부터 차기 가주로, 차기 교황으로 살아온 에이든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드러내고 의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교황이자 가주인 자신에게서 보호를 받아야 할 이들이었으므로, 율리아를 만나고 조금씩 그녀에게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했으나, 그녀가 죽으며 다시 감정을 감추기 급급해졌다.
그렇게 이십 년.
에이든은 소중한 딸아이를 찾고서야 다시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프레드릭은 그것이 기꺼웠다.
에이든은 그렇게 말하는 프레드릭을 빤히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엘리사의 마음을 헤아리는 걸 보니, 그 아이가 자네의 마음에 들었나 보군.”
“마음에 들다니요. 제가 어찌 감히 그분을 평가하겠습니까.”
“하지만 자네 마음속에서는 평가를 내리고 있지 않나? 가주가 될 재목인지, 아닌지.”
에이든의 예리한 지적에 프레드릭은 잠시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걷다,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직은, 조금 더 지켜볼 생각입니다.”
*
해 질 무렵, 엘리사가 탄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가 공작저 안으로 들어섰다.
이윽고 마차가 저택 앞에 멈췄다.
먼저 말에서 내린 톰슨은 곧장 마차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가 문을 열려는 순간, 리하르트가 저택에서 나왔다. 그의 눈빛이 톰슨에게 ‘비켜라’ 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 의미를 눈치챈 톰슨은 므흣한 미소를 지으며 리하르트를 보았다.
“우리 각하는 질투가 너무 심-”
리하르트는 톰슨의 장난기 어린 말에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빠르게 눈치챈 아가일이 톰슨의 팔을 붙잡아 끌어냈으나, 톰슨은 막냇동생이 연애하는 걸 지켜보는 형 같은 표정으로 히죽거리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톰슨을 무시한 채 마차의 문을 열었다.
“리하르트?”
엘리사는 단잠에 들었다 막 잠에서 깬 듯, 아직 졸음에 겨운 눈을 비비며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저를 마중 나온 그의 모습이 꼭 주인을 맞이하는 강아지 같았다.
“잘 다녀왔어?”
“으응.”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조심스럽게 안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에게 몸을 의지하며 마차에서 내린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에게서 바람의 냄새가 났다.
그가 비행을 하고 돌아올 때면 늘 나던 서늘한 냄새가.
그러고 보니 늘 단정하던 머리카락도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어디 나갔다 왔어?”
그가 제게 잘 다녀왔냐고 물었던 것처럼 별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그 물음에 순간적으로 리하르트의 눈빛이 동요했으나, 재빨리 갈무리했다.
“…아니.”
그의 대답과 동시에 그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작은 낙엽이 엘리사의 눈에 띄었다.
“그런데 머리카락에……….”
엘리사가 낙엽으로 손을 뻗은 순간, 리하르트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작은 돌풍이 스쳐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바람에 엘리사는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이 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을 땐, 그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낙엽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