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처음 세리어트 후작저를 방문한 날로부터 보름 후.
일찌감치 황궁에 갈 채비를 마친 리하르트는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엘리사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오후에 세리어트 후작저에 간다고 했지.’
오늘은 에이든 없이 엘리사 혼자서 후작저를 방문하는 날이었다.
그는 만삭의 엘리사를 혼자 외출시키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온종일 그녀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걸을 때마다 넘어지지 않게 옆에서 지탱해 주고, 피곤할 땐 어깨를 내어주며.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회의의 의장이 두 번씩이나 회의를 빼먹을 수도 없고, 무엇보다…….
‘엘리사가 동행하는 걸 허락하지 않겠지.’
첫날은 몰래 미행했지만,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만약 그 사실을 그녀에게 그대로 들켰다면 어땠을까.
그 생각만 하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행은 안 돼..’
몸이 힘들어져서인지, 최근 들어 제게 유독 뾰로통해진 엘리사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하는 건 상관없지만, 사랑하는 여자에게 미움받는 건 두려웠다.
‘그렇다고 엘리사를 공작저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할 수는 없고.’
그건 그녀를 위한다는 명목을 내세운 제 욕심이니까.
‘설령 황제라 해도 대놓고 엘리사에게 해악을 가하진 못하겠지. 루벨린과 전쟁을 치를 생각이 아니고서야.’
리하르트는 평온히 잠든 엘리사를 바라보며 자신의 불안을 달랬다.
이윽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그레이슨의 신호였다.
“다녀올게, 엘리사.”
“으응…….”
“조심히 다녀와.”
리하르트는 잠결에 웅얼거리는 엘리사의 손을 살며시 어루만지다, 이불을 여며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오자, 아직 잠이 덜 깬 듯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는 톰슨이 보였다.
리하르트는 그를 불렀다.
“톰슨.”
“좋은 아침입니다, 각하.”
“오늘 세리어트 후작저에 갈 때 호위를 더 데려가라. 그리고 가급적 엘리사의 곁에서 떨어지지 마.”
“아, 넵. 걱정 마십시오.”
리하르트는 톰슨의 대답을 듣고서야 마음이 놓인 듯 황궁으로 향했다.
*
오후 무렵, 엘리사가 탄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가 세리어트 후작가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소가주님. 오시는 길이 고되진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프레드릭은 첫날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엘리사를 맞이했다.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런 생각은 안 들었어요. 실제로 그렇게 먼 길도 아니고.”
“그렇다면 저의 기쁨이군요.”
하지만 프레드릭과 달리, 에이든 없이 엘리사를 마주한 사용인들의 눈빛엔 첫날보다 더한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루벨린 공작 부인이라는 내 신분때문인가….’
리하르트는 아렌시아의 영웅이면서, 동시에 그만한 힘을 가진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황가와 척을 진 세리어트의 입장에선 루벨린에게 우호적일 법도 하건만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저들이 나를 루벨린 공작 부인이 아니라 세리어트의 가주로 먼저 생각하도록 만들어야겠지. 그러려면…….’
엘리사는 가장 앞쪽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프레드릭과 카밀라를 바라보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이들의 우두머리인 두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것.’
결속이 잘된 집단일수록 윗사람의 의견과 생각을 곧잘 따른다.
프레드릭이 오랜 시간 세리어트의 집사로 있었다는 건, 그가 그만큼 세리어트의 결속을 잘 다져 놓았다.
는 뜻.
그는 노련한 집사이니, 그가 생각을 바꾸면 저들 역시 자연히 따라올 터였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한 엘리사는 프레드릭과 카밀라를 향해 빙긋 웃었다.
“우선 차를 드시면서 잠시 숨을 돌리시지요.”
프레드릭은 엘리사를 저택 안의 접견실로 안내했다.
거대하고 화려하고 루벨린 공작저와 달리, 세리어트 후작저는 상대적으로 아담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접견실을 구경하며 잠시 기다리자, 앤의 또래로 보이는 하녀가 차와 다 과를 내어왔다.
엘리사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환하게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고마워. 딱 마시기 좋을 정도로 식었구나.”
엘리사의 말에, 하녀는 흠칫 놀란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케인은 사용인들에게 너그럽고 관대한 편이었지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용인이 윗사람을 모시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까.
비단 케인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들 역시 다르지 않다고 들었다.
그런데 엘리사가 처음으로 웃으며 고맙다고 말해 준 것이다.
하녀는 저를 향해 웃는 엘리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생을 세리어트 영지에서 살다가 얼마 전에야 제도로 올라오게 된 하녀에게 엘리사는 처음으로 가까이서 본 귀부인이었다.
‘예쁘다….’
후작성에서 읽었던 동화 속 공주님을 실제로 만난다면 이렇게 생겼을까.
그녀의 눈에 엘리사는 공주님처럼 보였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상냥한.
엘리사를 멍하니 바라보는 하녀의 시선을 느낀 앤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엘리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자부심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하녀는 두 뺨을 살짝 붉히며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니?”
“네?”
“이제 너는 내 사람이니, 이름을 알아 두려고 해.”
“아….”
잠시 머뭇거리던 하녀가 입을 열었다.
“데, 데이지. 데이지예요.”
“데이지? 예쁜 이름이구나.”
“감사합니다.”
하녀는 이미 붉은 얼굴을 더욱 붉히며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물러나려던 그때, 엘리사가 그녀를 멈춰세웠다.
“잠깐만.”
“네?”
“치마가 많이 짧은 것 같은데.”
보통 하녀들의 에이프런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데이지의 에이프런은 무릎 위로 껑충 올라간 기장이었다.
하녀는 당황한 얼굴로 엘리사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해요. 키가 갑자기 훅 자라는 바람에…….”
하녀의 말에 엘리사는 미간을 설핏일그러트렸다.
그 말은, 하녀가 이만큼 자라는 동안 케인이 새 옷을 사 주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엘리사는 프레드릭을 돌아보며 물었다.
“프레드릭. 이 아이에게 새 옷을 사 주지 않았나요?”
“그러잖아도 키가 훌쩍 자란 아이들이 몇 있어 소가주님…… 아니, 케인 경께 몇 차례 예산을 할당해 달라고 요청드렸습니다만, 허가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왜 허가해 주지 않았죠?”
“영지민들의 혈세를 그런 사소한 곳에 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말끝을 흐리는 프레드릭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프레드릭은 잠시 시차를 두고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치마는 짧은 쪽이 더 예쁘니 괜찮다고도 하셨지요.”
그의 말에 엘리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변태 자식, 이런 식으로 자기 욕망을 채웠구나.’
엘리사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동시에, 조금 모양새가 안 좋긴 했어도 케인을 쫓아내길 잘했다고 안도했다.
“앞으로는 몸에 맞지 않는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사람이 없도록 바로 바로 새것으로 사 주세요. 내 허가는 받지 않아도 돼요.”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용인들에게 하절기, 동절기마다 새로운 옷을 사 주도록 하세요. 만약 예산이 부족하다면 가주의 앞으로 할당된 품위 유지비를 사용해도 괜찮아요.”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아끼지 말 것.
그것이 엘리사의 철칙이었다.
엘리사의 파격적인 명을 들은 프레드릭은 잠시 놀란 눈으로 엘리사를 바라보다,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소가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가, 감사합니다. 소가주님!”
엘리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녀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엘리사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엘리사는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저 마셨다.
엘리사의 찻잔이 반 이상 비워지자, 프레드릭이 물었다.
“오늘 일정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리어트의 역사를 알고 싶어요.
세리어트에 대한 이야기는 책에서 많이 봤지만, 가문에서 보는 관점은 또 다를 테니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내내 뒤쪽에서 조용히 서 있던 카밀라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카밀라는 네 엄마를 진심으로 따르던 사람이란다. 겉으론 무뚝뚝해 보여도, 속으론 너를 반가워하고 있을 거야.’
엘리사는 에이든이 했던 말을 떠올리곤,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부탁할게요, 카밀라.”
“회랑으로 모시겠습니다.”
카밀라는 엘리사를 회랑으로 안내했다.
거대한 회랑에는 시간순으로 역대 가주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중 가장 가까운 곳에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가주님이십니다. 지금의 소가주님과 비슷한 나이셨을 때지요.”
에이든의 얼굴은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어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그런 그의 옆으로, 낯선 듯 익숙한 얼굴을 한 여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옅은 갈색 머리칼에, 엘리사와 꼭 닮은 연둣빛 싱그러운 녹안을 가진 미인.
엘리사는 그 사람을 단박에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