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98화 (98/164)

98화

“그럼 이분은……….”

“율리아 님입니다. 소가주님의 어머님 되시는 분이지요.”

엘리사는 초상화 속 율리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이든에게 듣기로, 율리아는 임신한 몸으로 제국군의 추적을 피하다 혼자서 출산을 한 것 같다고 들었다.

그것도 채 7개월을 채우지 못한 조산을.

‘엄마..’

초상화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자, 그녀가 겪었을 고난이 떠올라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 고생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품고 키워 준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자신의 배 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기에 더욱 그 감정들이 와닿았다.

“…율리아 님은 저 같은 아랫사람의 사정까지도 헤아려 주시는 다정한 분이셨습니다. 추운 겨울날, 도박 빚에 팔린 저를 율리아 님이 거 두어 이곳으로 데려와 주셨지요.”

엘리사는 먼저 율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카밀라를 쳐다보았다.

율리아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짙고, 아픈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려서부터 배끊고 자란 탓에 몸이 약하고 일을 잘 못 하는데도, 율리아 님은 저를 아껴 주셨습니다.

몸이 약해도 할 수 있는 일을 주셨죠.”

그 구박받던 하녀가 세월이 흘러 이 저택의 집안일을 총괄하는 하녀장이 된 것이다.

엘리사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쑥 말을 꺼냈다.

“고마워요, 카밀라.”

갑작스러운 엘리사의 말에 카밀라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께 듣기로, 엄마는 후작가의 사람들을 모두 진심으로 아끼셨다고 들었어요. 그런 세리어트를 잘 보살펴 줘서 고마워요.”

멍하니 엘리사를 바라보던 카밀라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것을 본 엘리사는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카, 카밀라?”

“죄송합니다. 꼭 율리아 님이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엘리사는 그 모습을 보고 그녀가 얼마나 율리아를 좋아했는지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율리아를 그렇게 만든 이들을 향한 적개심이 치솟았다.

‘황제…….’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루벨린과 세리어트가 언제 제 숨통을 조일까 불안해하며 하루하루 말라 가게 하리라.

엘리사는 카밀라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송구합니다.”

잠시 후, 감정을 갈무리한 카밀라가 다시 회랑을 안내하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회랑은 컸지만, 역대 모든 가주들의 초상화를 두기엔 역부족이었으므로 회랑에 최근 5대 가주와 초대 가주의 초상화만이 남아 있었다.

카밀라는 마지막 초상화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분들은 초대 가주 아리에 님과 2대 가주이신 리리아 님입니다.”

마지막 인물화는 두 명의 여자가한 그림 안에 나란히 그려져 있었다.

아리에 세리어트와 리리아 세리어 트.

두 사람은 자매였다.

언니인 아리에이 초대 가주가 되었으나, 그녀가 자신을 희생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리리아가 가주가 되어 대를 잇게 되었다.

엘리사는 서로 다른 듯 닮은 자매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리리아…..’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쩐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리엔 역시도.

엘리사는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한동안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수확제는 아렌시아 제국 모두가 즐기는 축제였기에, 제도만이 아니라 각 영지에서도 자체적으로 축제를 진행했다.

카밀라와 함께 회랑을 둘러본 엘리 사는 수확제 관련 업무를 검토한 후, 루벨린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랐다.

“그럼 수확제 일은 계획대로 진행해 줘요, 프레드릭.”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수확제 전에 한 번 더 들르겠지만, 혹시 그 전에 급한 용무가 생기면 공작저로 사람을 보내고요.”

프레드릭은 마차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가쁜 숨을 내쉬는 엘리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몸도 무거우실 텐데, 너무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비센나와의 일도 해결되어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없고요. 다른 일은 몸을 푸신 후에 천천히 하셔도 괜찮습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난 좋은 엄마도 되고 싶지만, 유능한 가주도 되고 싶거든요.”

엘리사의 뜻을 이해한 프레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어쩌면 아기님께도 좋은 선행 학습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제 이야기하는 걸 들은 것인지, 때맞춰 배 속의 아기가 꼬물거리며 움직였다.

엘리사는 빙긋 웃으며 배를 쓰다듬고는 프레드릭과 카밀라를 바라보았다.

“그럼 조만간 또 봐요.”

그리고 마차가 출발하려는 찰나, 카밀라가 다급히 엘리사를 불렀다.

“저, 소가주님.”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카밀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혹시 특별히 드시고 싶은 음식이 있으십니까? 다음 방문 때는 그 음식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카밀라의 물음에 엘리사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그 말은, 자신의 방문을 기다리겠다는 뜻이었으니까.

그 의미를 파악한 엘리사는 환하게 웃었다.

첫인상은 무뚝뚝하고 조용하기만 하던 그녀가 제게 내비친 감정 한 자락이 반갑고 고마웠다.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세리어트 영지에서만 나는 호수버섯 튀김이 그렇게 맛있다고 들었는데, 먹어 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마침 한창 호수 버섯철이니, 최상급의 신선한 버섯으로 공수해서 준비해 두겠습니다.”

“기대할게요.”

“오시기 전날, 서신을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엘리사는 프레드릭, 카밀라를 비롯한 사용인들에게 배웅을 받으며 세리어트 후작저를 나섰다.

그와 동시에 숲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그녀를 지켜보던 시선도 모습을 감추었다.

*

어스름이 내려앉은 이른 저녁.

세리어트 후작가 휘하의 기사들이 후작저 주변의 숲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고?”

“그런 것 같았는데……. 내가 잘못 봤나.”

처음 인기척을 느낀 기사가 멋쩍은 듯 제 뒷머리를 긁었다.

“뭐,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조금만 더 둘러보고 가자.”

기사들은 근방을 좀 더 살펴본 뒤, 별 소득 없이 후작저로 돌아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근처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로브에 몸을 숨긴 케인이었다.

“젠장………. 젠장!”

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욕을 뇌까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를 호위하던 이들의 눈을 피해 숨어야 하는 제 신세가 비참했다.

차기 가주의 자리에서 쫓겨난 그는 고향인 세리어트로 돌아가는 척하다 다시 아카로아로 돌아왔다.

자신이 반평생을 지켜 온 것을 빼앗겼다.

이대로 고향에 돌아간다면, 차기 가주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동생과 친척들이 저를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겠는가.

‘그 계집, 그 망할 계집이 내 것을 전부 빼앗았어……….’

케인은 조금 전, 세리어트 후작저의 사용인들에게 배웅을 받으며 후작저를 나서던 엘리사의 모습을 떠올리곤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 깐깐하던 프레드릭도, 카밀라도 엘리사를 보며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능구렁이 같은 계집.’

그는 사용인들에게 관대하고 너그러운 윗사람이었다. 그리고 영지의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유능했다.

그래서 사용인들이 여자에다, ‘루벨린 공작 부인’이라는 외부인의 신분인 엘리사를 못 미더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쫓겨나고 얼마 되지도 않아, 그녀에게 호감을 표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자 심기가 뒤틀렸다.

자신은 그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신임은 얻지 못했었다.

그것을 엘리사는 고작 두 번의 만남으로 얻은 것이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케인은 애꿎은 잔디를 움켜쥐고 땅을 내리치며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그에겐 복수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참했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이런. 며칠 전까지 부리던 이들을 피해 숨어야 한다니, 참으로 비참한 모습이로군.”

케인은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케인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은..…?”

홀연히 나타난 레이모어는 유유히 다가와 케인의 앞에 섰다.

“자네에게 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보이는데.”

그는 이미 케인의 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고는 케인을 내려다보며 손을 내밀었다.

“도움,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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