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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99화 (99/164)

99화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시월에 접어들었다.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엘리 사는 내일모레에 세리어트 후작저를 방문하겠다는 서신을 작성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사, 그러지 말고 몸 풀고 나서 가는 건 어때?”

“저번에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대접하고 싶대서, 조만간 가겠다고 약속했거든. 그래서 가야 할 것 같아.”

“…….”

“가서 식사만 하고 올 거니까 그렇게 힘든 일정은 아닐 거야.”

리하르트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치였으나, 엘리사가 그렇게 말하자 더 이상 만류하진 못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님, 세틸입니다.”

오늘은 주에 한 번 주치의에게 검진을 받는 날이었다.

“들어오지.”

리하르트의 허락이 떨어지자, 세틸이 들어왔다.

그녀는 엘리사와 리하르트가 앉아 있는 침대로 다가와 예를 갖춘 후, 엘리사와 배 속 아이의 상태를 진찰했다.

이제 9개월에 접어든 엘리사의 배는 한눈에 보기에도 무겁고 힘들어 보였다.

세틸은 그런 엘리사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배가 불러서 많이 힘드시지요, 마님? 요즘은 숙면을 취하고 계신가요?”

“보름쯤 전보다는요. 태동이 예전보다 줄어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아기님이 부쩍 자라셔서 배 속이 좁아졌나 보군요. 아기님께선 건강히 잘 자라고 계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에 살짝 경직되어 있던 엘리사의 표정이 풀어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고, 소화가 잘되지 않아 식사조차 마음껏 하지 못했지만, 아이가 건강히 자라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그 고생이 싹잊혔다.

엘리사의 표정이 풀어지는 걸 본 리하르트의 눈빛이 덩달아 누그러졌다.

“그 외에 특별히 불편하신 점은 없나요?”

“음…. 딱히 없어요.”

“마님도 아기님도 건강하시니 크게 주의하실 부분은 없지만,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 증상이 있으시면 무조건 안정을 취하시고요.”

“그럴게요.”

“많이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더 버텨 주세요. 이제 아기님을 만나실 날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요. 빠르면 한 달쯤 후에 만나게 되실 수도 있고요.”

세틸의 말에, 풀어졌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출산의 고통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엘리사가 그 끔찍한 고통을 겪을 것이라 생각하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리하르트의 손이 엘리사의 손을 애틋하게 감싸 쥐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품에 안긴 엘리 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으음, 남편 머리 다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아프다던데……….’

엘리사는 제 옆에 있는 리하르트의 머리를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다.

‘리하르트는 머리숱이 많아서 좀 쥐어뜯어도 괜찮겠네.”

원작의 엘리사가 무사히 하네스를 출산한 것을 알고 있기에, 아이를 낳다가 잘못될 것이라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배 속의 아이를 만난다는 설렘이 앞섰다.

‘이제 곧 우리 아가를 곧 만날 수 있는 거구나……….’

엘리사는 제 배를 애틋하게 어루만지며 기억을 떠올렸다.

아기가 처음으로 태동하던 그 날이,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엄마와 아이만이 느낄 수 있는 비밀스러운 교감을 나누던 그 작은 아이가 어느덧 무럭무럭 자라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 아이를 품에 안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울컥 눈물이 날 듯했다. 동시에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그럼 두 분, 평안한 밤 보내십시오.”

진찰을 마친 세틸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때까지 말없이 배를 어루만지던 엘리사가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리하르트.”

엘리사 걱정에 잔뜩 표정을 굳히고 있던 리하르트는 그 시선을 마주하곤 곧장 표정을 풀었다.

임신한 아내가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남편뿐이다.

자신이 불안해하는 것을 엘리사가 알게 되면 그녀 역시 불안해질 터였다.

“넌 우리 아기가 아들일 것 같아, 딸일 것 같아?”

뜻밖의 질문에 리하르트는 바로 대답하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겼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그저 엘리사가 자신이 아이에게 사랑을 주길 바랐기에 정을 붙이려고 노력했을 뿐, 딱히 아이의 성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엘리사의 배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던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딸일 것 같아.”

추측보다는 그의 바람이 담긴 대답이었다.

그 대답에 엘리사는 고개를 살랑살랑 내저었다.

“우리 아가는 아들이야.”

확신에 찬 엘리사의 말에 리하르트는 의아한 눈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알아?”

“음, 엄마의 촉이랄까?”

여기가 읽었던 원작 속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까.

엘리사는 씩 웃고는, 제 배를 어루만지는 리하르트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재잘거렸다.

“아빠를 닮은 아주 잘생긴 아들이야. 그렇지, 하네스?”

엘리사의 목소리를 들은 아이가 꿀렁거리며 반응했다. 그에 엘리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엘리사의 말에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던 리하르트가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내가 잘생겼어?”

그 말에 엘리사는 황당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리하르트를 좋아하는 귀족 영애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미 기혼임에도 불구하고.

물론 여우의 신 포도처럼 가질 수 없는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 시선들을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농담인가 싶어 그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정말 모르는 눈빛이었다.

‘이 얼굴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고?’

저 얼굴을 볼 때마다 홀리는 사람으로서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뺨을 감싸 쥐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열변을 토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이 얼굴에 반한 여자만 몇 명인데. 톰슨 경이나 아가일 경도 한 번은 너한테 반한 적 있을걸?”

“그럼 넌?”

“응?”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엘리사는 예상치 못한 리하르트의 물음에 눈을 깜빡였다.

마주한 그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짙어져 있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저를 옭아매듯이.

그 위험함을 감지한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가까스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어……. 자, 잘생겼지.”

“……잘됐네.”

엘리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리하르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와 닿은 그의 입술에 온통 정신을 빼앗겼으니까.

놀란 엘리사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리하르트의 입술이 떨어졌다.

리하르트는 숨결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멈춘 채 엘리사의 손을 얽으며 잠시 기다렸다.

그녀를 안기 전, 허락을 갈구하는 행동이었다.

그가 그렇게 바라볼 때면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엘리사는 귓가에 거세게 울리는 제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이윽고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 입술이 겹쳐졌다. 동시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긴장을 풀 듯 아랫입술과 윗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던 그가 이윽고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그녀를 온전히 집어삼켰다.

“하아…….”

배가 불러 온 탓에 숨이 얕아진 엘리사가 먼저 입술을 뗐다.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숨을 돌리는 동안 그녀와 이마를 맞댄 채 잠시 기다리다, 다시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잠옷 원피스를 입은 엘리사의 다리부터 허리까지 쓸어 올렸다.

엘리사는 그 손길에 몸을 움츠렸다. 뜨거운 손이 얇은 옷감 위로 어루만지는 느낌이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그 순간, 엘리사의 허리를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엘리사의 배를 스쳤다.

그와 동시에 리하르트의 움직임이 멈췄다. 입술도 떨어졌다.

당분간 무리하지 말라던 주치의의 당부가 떠오른 탓이었다.

“………리하르트?”

갑자기 그가 멈추자, 엘리사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하르트는 무방비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엘리사를 보며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짐승만도 못한 놈..

지금 엘리사는 가뜩이나 조심해야 할 시기였다. 알면서도 그녀의 말간 얼굴만 보면 이성을 잃고 만다. 그런 제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리하르트는 날뛰는 욕망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엘리사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미안.”

그녀의 작은 어깨에서 특유의 체향이 났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달콤한 향기가.

그 향기만으로도, 맞닿은 그녀의 체온만으로도 가까스로 잠재운 욕망이 반응했다. 가빠진 숨소리조차 그에겐 위험할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이대로 눈이라도 마주치면, 제 욕심껏 엘리사를 취할 것만 같았다.

위험했다.

“먼저 자.”

잠시 감정을 억누른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시선을 피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장 침실을 나갔다.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엘리사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그렇지. 세틸 경이 무리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머리로는 알고 있다.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이 시기에는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그가 자신과 아이를 생각해서 자제하려고 한다는 것도.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마음은 울적해졌다.

아기를 제 목숨보다 사랑하지만, 아기만큼이나 저 역시 소중했다.

그래서 아기의 안위만이 아니라 자신의 의사도 소중히 여겨 주길 바랐다.

“…바보.”

울적한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던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자리에 놓인 베개를 제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라도 되는 듯 베개를 마구 꼬집고 통통 때렸다.

“멍청이!”

한참을 씩씩거리며 분풀이를 하던 엘리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생각했다.

‘일주일 동안 손도 못 잡게 할 거야! 잠도 같이 안 잘 거라고!’

다짐은 그렇게 했으나, 행동은 조금 전까지 때리며 분풀이하던 그의 베개를 끌어안았다.

베개에선 매일 밤 저를 다정히 안아 주던 그의 체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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