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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00화 (100/164)

100화

다음 날, 리하르트는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회의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몸이 무거워진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 에이든이 저택에 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이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끝낸 참이었다.

리하르트는 곧장 엘리사의 방으로 올라왔다.

막 단장을 마친 엘리사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아이와 태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다녀왔어, 엘리사.”

“응. 잘 다녀왔어?”

리하르트에게 짤막히 인사를 건넨엘리사는 다시 아이에게 집중했다.

“사랑아, 아빠 왔어. 조금 있으면 외할아버지도 오실 거야.”

침대 맡에 걸터앉은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제게 인사를 했지만, 평소와 달리 묘하게 침울한 느낌이 들었다.

마주치지 않는 시선이나, 평소보다 힘없는 목소리 같은 것들이.

‘……어제 일 때문인가?’

그 때문이라면 충분히 서운할 만했다.

최근 들어 몸이 부쩍 무거워져서 힘들어하는데, 남편이란 놈은 아내를 배려하긴커녕 제 욕망을 못 이겨 짐승처럼 굴었으니.

리하르트는 엘리사에게 사과할 생각으로 입술을 뗐다.

“엘리사.”

하지만 그 순간 들려온 노크 소리가 그의 다음 말을 막았다.

“마님, 각하. 교황 성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 소식에 엘리사는 반색을 비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주었으나, 엘리사는 슬그머니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평소 같으면 제게 완전히 몸을 기대어 왔을 그녀인데.

엘리사가 걱정이 된 리하르트는 곧장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지탱했다. 다행히 이번엔 엘리사도 그를 피하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안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공작저로 들어온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섰다.

그레이슨이 마차 문을 열자, 평상복을 입은 에이든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를 본 그레이슨과 기사단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추었다.

“루벨린의 신하들이 신실하신 신의 사자,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저야말로 이리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에이든은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그러고는 마차 쪽으로 다시 몸을 돌렸다.

모두가 그에 의아해하며 지켜보는 데, 마차에서 익숙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누나!”

“리온?”

뜻밖의 손님에 엘리사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에이든이 리온을 안아 내려 주자, 리온은 반면에 반색을 숨기지 못한 채 엘리사 쪽으로 깡총 뛰어왔다.

에이든은 그런 리온을 보고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너를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어젯밤부터 저도 데려가 달라고 난리 법석을 떨더구나.”

“누나 안녕! 아조씨두 안녕!”

리온은 엘리사와 리하르트의 주위를 맴돌며 제 나름의 반가움을 표했다.

엘리사는 그런 리온의 통통한 뺨을 어루만지며 인사했다.

“어서 와, 리온. 잘 왔어.”

리온은 히죽 웃으며 엘리사의 손에 제 뺨을 비볐다. 저를 귀여워하는 그 손길이 기분 좋았다.

리하르트는 리온과 인사를 나누드라 정신없는 엘리사 대신 에이든에게 인사를 했다.

“신전에서 이곳까지 거리가 꽤 될텐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딸아이를 만나러 오는 길인 것을요.”

네 사람이 막 인사를 나누었을 때, 앤이 다가와 엘리사에게 귀띔을 했다. 마침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났다는 이야기였다.

“식사 준비가 끝났대요. 어서 가요.”

리하르트는 습관적으로 엘리사의 등을 안았다. 몸이 무거워진 그녀를 지탱하고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엘리사는 선뜻 그에게 몸을 기대지 않은 채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리온의 눈이 갸름해졌다.

*

저녁 식사를 마친 네 사람은 바람을 쉴 겸 뒤뜰로 나왔다.

네 사람 중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리온은 모처럼 엘리사를 만난 것이 기분 좋은지, 정신없이 폴짝거리며 뛰어다녔다.

엘리사는 그런 리온의 뒤를 따랐고, 에이든과 리하르트가 그 뒤를 따랐다.

“리온, 그러다 다치겠어. 이리 와.”

폴짝거리며 뛰어다니던 리온은 엘리사의 목소리를 듣고 쪼르르 돌아왔다.

잠깐 걸은 것만으로도 숨이 찬 엘리사는 근처의 벤치에 앉아 가쁜 숨을 골랐다.

리온은 그런 엘리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누나, 힘드러?”

“응. 아기가 많이 커서 걷기만 해도 힘드네.”

그제야 못 본 새 부쩍 커진 엘리 사의 배가 리온의 눈에 들어왔다.

“누나 배 엄청 커져써.”

“그만큼 아기가 자란 거야. 신기하지?”

“오옹. 나 아가한테 인사할래.”

리온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다가오더니, 엘리사의 배 가까이에 대고 속살거렸다.

“아가 안녕.”

그러자 리온의 인사를 들은 것인지, 배 속의 아이가 꿀렁거리며 반응했다.

엘리사의 배가 움직이는 것을 본 리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가 내 인사 들어써?”

“응, 그런가 봐.”

“오와.”

“아기가 너한테 인사하고 싶은 것 같은데, 손대 볼래?”

리온은 냉큼 엘리사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배 속의 아이가 꿀렁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느껴 본 생명의 신비함에 리온의 눈이 번쩍 커졌다.

“오, 아가가 진짜루 인사해써!”

“아가도 리온이 반갑대.”

“나도 반가워, 아가.”

고사리 같은 손이 조심조심 배를 쓰다듬자, 배가 꿀렁거리며 또 한번 인사가 돌아왔다.

리온은 환하게 웃으며 엘리사의 배를 어루만지다, 엘리사를 올려다보았다.

“아가 언제 뿅 나와?”

“음, 앞으로 오십 밤 정도 더 자면?”

“아가 빤니 보고 십따.”

“아가 태어나면 잘해 줄 거야?”

“웅! 리온이가 만날 놀아 주 꺼야!

그리구 따뜻하게 해 주 꺼야.”

리온의 말에 엘리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조그만 녀석이 저도 형이라고 동생을 귀여워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네가 귀여워하는 그 동생이 네 미래의 연적이긴 하지만…… 뭐, 누굴선택할지는 여주인공의 몫이니까.’

엘리사가 리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서늘한 가을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찬 기운에 순간적으로 한기가 들어 몸이 떨렸다. 그와 동시에 재채기가 나왔다.

엘리사는 그 한기에 몸을 웅크렸다. 그 순간, 온기가 남아 있는 옷이 엘리사의 어깨를 덮었다.

그에 놀란 엘리사가 올려다보자, 어느새 다가온 리하르트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엘리사를 감싸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아버지랑 같이 저쪽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두 사람이 대화 중이었다면 재채기 소리를 듣지 못할 수도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그는 그 작은 소리를 듣고서 한달음에 성큼 다가온 것이다.

엘리사를 내려다보는 리하르트의 표정이 걱정으로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날이 추워졌어.”

엘리사는 그를 따라 일어났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리온과 함께 웃고 있던 엘리사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침울해져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예리한 눈으로 지켜보던 리온이 물었다.

“둘이 싸워떠?”

그 물음에 엘리사는 물론, 리하르트도 흠칫 놀라 리온을 쳐다보았다.

한발 늦게 다가오던 에이든은 그 말을 듣고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리하르트를 바라보는 에이든의 눈빛이 싸해졌다.

그 싸한 기류를 느낀 엘리사는 다급히 부정했다.

“싸, 싸운 거 아니야. 리온.”

리하르트에게 서운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에이든에게 미운털 박히길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리온은 예리했다.

“하디만 아조씨 오니까 누나 표정이 슬퍼져써. 아까 밥 머글 때두 누나 밥 쪼금 먹어써.”

리온의 예리한 지적에 엘리사는 당황했다.

‘그렇게 티 났나……?’

어제 일로 섭섭해하는 기색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아기도 물론 소중하지만, 자신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 달라고 하면 너무 철없는 투정처럼 들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나름 숨긴다고 숨겼건만, 침울한 기색이 은연중에 드러났던 모양이었다.

엘리사가 당황해하고 있던 그때, 리하르트가 불쑥 대답했다.

“내가 잘못한 거야.”

엘리사는 뜻밖의 반응에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리하르트의 대답을 들은 리온의 눈이 새치름해졌다.

“아조씨가 잘모해떠? 구럼 누나한테 미안하다구 해.”

“…….”

“그리구 꼬옥 안아 줘야 대.”

리온이 엘리사를 안는 시늉까지 직접 시연했다.

그 모습을 본 에이든이 웃음을 터트렸다.

화해를 주선하는 리온의 말은 신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지도 신관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한 것이었다.

엘리사는 에이든에게 도움을 청하듯 그를 바라보았으나, 에이든은 오히려 한술 더 떴다.

“그래, 서운한 것이 있으면 풀어야지. 리온의 말대로 하려무나.”

엘리사는 머쓱한 표정으로 리하르트의 시선을 피했다. 괜히 그를 난 감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망설이는 기색 없이 엘리사를 안았다.

“미안해, 엘리사.”

“아….”

엘리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에게 안겼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리온이 흡족해하며 박수를 쳤다.

“이제 두리 사이조케 지내야 대!”

*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에이든과 리온을 배웅하고 침실로 올라왔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침대에 앉히고 이마를 짚었다. 아까 찬바람이 들어 감기 기운이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엘리사는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리온과 에이든 앞에서 혼자 나쁜 사람을 자처하게 한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서운해하는 것을 들킨 것이 무안하기도 했다.

“열은 없네.”

이마를 덮고 있던 그의 손이 거두어졌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엘리사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굴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다, 결국 눈이 마주쳤다.

그런 엘리사를 본 리하르트는 옆에 나란히 앉았다.

“엘리사.”

“으응?”

“어제 일은…… 미안해.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어.”

엘리사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살짝 내리깐 리하르트의 눈이자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마주 잡은 그의 손은 연신 제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혹여 저가 그 손을 뿌리치기라도 할까 겁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네가 나를 미워할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네가 소중한데, 더 잘해 주고 싶은데…… 소중한 사람이 생긴 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어.”

“…….”

“그래도, 나 조금만 좋아해 주면 안 될까.”

그렇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마주한 그의 눈빛은 애원하듯 절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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