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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01화 (101/164)

101화

엘리사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왜, 그렇게….’

왜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너는, 그렇게 나를 무서워할까.

왜, 세상 아쉬울 것 없는 너는 내게 좋아해 달라고 할까.

이상해. 이상하다.

그런 표정을 하고, 그렇게 말하면….

‘……네가 꼭 나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

그 생각이 든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닐까 봐.

그 생각이 그저 제 희망이 투영된 착각일까 봐.

하지만 제 감정보다, 그간 그를 피하는 제 태도에 상처받았을 그가 안쓰러운 마음이 앞섰다.

“미워하지 않아.”

엘리사는 그동안 속 끓였을 그의 마음을 달래듯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좋아해. 많이.”

엘리사의 말에, 마주한 리하르트의 눈빛이 크게 동요했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본 엘리사는 그제야 저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어 버렸음을 깨달았다.

‘자, 잠깐. 그렇게 말하면 이상하잖아!’

그 사실을 깨달은 엘리사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숨막히는 침묵이 찾아왔다.

엘리사는 내뱉은 말을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했으나, 당황하여 하얗게 질린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엘리사는 무슨 말이라도 할 생각으로 한 박자 늦게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 그, 그러니까, 방금 전에 한 말은….”

그때, 이 상황에서 엘리사를 구해줄 구원과도 같은 노크 소리가 들려 왔다.

앤이었다.

“마님, 목욕물이 준비되었어요.”

적잖이 당황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하던 엘리사는 잔뜩 붉어진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소리쳤다.

“나, 나 먼저 씻고 올게!”

“엘리사, 잠깐 -”

리하르트가 그런 엘리사를 붙잡을 틈도 없이, 엘리사는 허둥지둥 침실을 나가 버렸다.

침실에 리하르트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엘리사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조금 전, 엘리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맥락을 생각하면 ‘좋아한다’는 뜻보다는 ‘미워하지 않는다’는 뜻에 가깝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애틋하게 저를 바라보던 눈.

뺨을 어루만지던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저도 모르게 진심을 말하고 당황해서 붉어지던 얼굴.

그 모습은 분명.…

“엘리사가, 나를…….”

조금 전의 기억을 곱씹던 리하르트는 그녀의 모든 반응이 가리키는 한가지 가능성을 떠올리고 숨을 멈췄다.

‘좋아해. 많이..’

그와 동시에 그의 심장이 아플 정도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

목욕을 마친 엘리사는 평소처럼 침실로 돌아가다, 우뚝 멈춰서 한숨을 삼켰다.

조금 전, 리하르트에게 고백 비슷한 말을 해 버린 것이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맥락상 고백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맥락상으론 고백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불쑥 내뱉어진 것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크게 흔들리는 그의 눈빛이 말했다.

들킬까 꽁꽁 숨겨 놨던 제 감정을 결국 그에게 들켰노라고.

‘리하르트는…… 뭐라고 생각할까.’

원작에서는 리하르트가 엘리사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나왔다.

지금의 리하르트는 저를 이성으로 좋아하는지는 몰라도, 소중하게 대해 주고 있으니 원작과는 이미 궤가 달라진 셈이었다.

그 변수처럼 그가 원작과 달리 저를 좋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설레다가도, 그에게 자신이 그저 가족이자 친구로서 소중한 사람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울적해졌다.

‘……그런 건 싫어.”

아이가 생긴 것에 책임감과 미안함을 느끼는 것이라면 더욱 싫다.

그 생각만으로도 울컥 가슴이 아파왔다.

기분이 구름 위로 날아올랐다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마님? 왜 그러세요?”

엘리사의 뒤를 따르던 앤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 엘리사는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는 엘리사의 표정은 전혀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니었다.

앤은 그런 엘리사에게 무슨 일이냐 물어보려 했으나, 침실이 있는 복도 쪽을 살펴보던 엘리사가 먼저 입을 뗐다.

“앤, 가서 침실에 각하가 계시는지 보고 와 줄래?”

앤은 의도를 알 수 없는 엘리사의지시에 의아해하면서도 곧장 침실 쪽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고 잠시 기다렸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방문을 살짝 열고 침실 안을 슬쩍 들여다본 앤이 엘리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리하르트가 아직 침실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엘리사는 침실로 들어와 앤의 도움을 받으며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그럼 좋은 밤 되세요, 마님.”

엘리사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베개를 받쳐 준 앤은 밤 인사를 건네고 방문으로 향했다.

침대에 기대어 앉은 엘리사는 이상황을 모면할 임시방편을 생각해냈다.

‘리하르트가 돌아오기 전에 빨리 자야겠어.’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이 한 말에 대해 묻기 애매해질 테니까.

엘리사는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요량이었다.

그가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하면서도, 두려워 피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하지만 엘리사가 급하게 세운 계획은 처참히 틀어졌다.

앤이 침실을 나가려고 방문을 연순간, 마침 방으로 돌아오던 리하르트와 마주쳤기에.

‘헉’

열린 방문 틈으로 그와 눈이 마주친 엘리사는 흠칫 놀라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허둥지둥 문으로 다가왔다.

가뜩이나 몸이 무거워진 엘리사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걱정이 된 리하르트가 다급히 엘리사에게 다가섰다.

“엘리사, 천천히 - “

“나, 오늘 혼자 잘 거야. 네 방에 가서 자.”

하지만 엘리사는 발갛게 물든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그를 방 밖으로 밀어냈다.

“잠깐, 엘리사.”

리하르트는 갑작스러운 엘리사의 통보에 당황해하면서도, 저가 버티면 엘리사가 다칠까 걱정되어 못 이기는 척 밀려났다.

겨우 그를 밀어내고 문을 닫은 엘리사는 그런 제 모습에 흠칫 놀랐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무작정 밀어낼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좋아한다고, 너도 날 좋아해 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솔직하게 말하긴커녕 그를 피하고 밀어내기만 했다.

그런 제 모습이 한심했다.

‘이게 뭐야……. 유치해. 진짜 바보 같아.’

그를 밀어내는 이 순간에도, 그에게 반응하는 제 심장이 얄미웠다.

거세게 울리는 그 고동이 아팠다.

엘리사는 그런 제 가슴께를 움켜쥐었다.

그런다고 제 심장이 뛰지 않을 리 없는데도.

그때, 문 너머에서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사.”

엘리사는 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멍하니 방문을 바라보았다.

“정말 내 방에서 자?”

“……응.”

“그럼 그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

“아까, 좋아한다고 했던 거. 진심이야?”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줘.

솔직하지 못한 내 진심을 알아줘.

외면당할까 두려운 내 마음을 알아줘.

하지만 진심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흘러나왔다.

“진심 아니야.”

대답을 들은 리하르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점차 멀어지는 그 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리하르트?”

뒤늦게 그를 불러 봤지만,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 멍하니 있던 엘리사는 그제야 슬쩍 방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리하르트는 없었다.

‘바보…….’

그가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엘리사의 눈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숨기고 싶었지만, 막상 진심을 부정하고 나니 마음이 아팠다.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감정이 가슴에 남아 응어리진 것처럼 아렸다.

엘리사는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문을 닫았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나타난 온기가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와 동시에 맺혀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익숙한 온기.

익숙한 체향.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 온기와 체향의 주인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를 알아챈 심장이 다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좋아한다는 말, 정말 진심 아니야?”

귓가에 나직이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물었다.

엘리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엘리사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리하르트는 천천히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는 눈물이 맺힌 얼떨떨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엘리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며 중얼거렸다.

“그럼 나 혼자 짝사랑인가.”

그의 말에 그를 바라보던 엘리사의 눈이 놀라 커졌다.

리하르트는 떨리는 엘리사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사랑해, 엘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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