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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02화 (102/164)

102화

엘리사는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엘리사의 불안에 확신을 심어 주듯, 리하르트는 다시 한번 말했다.

“사랑해.”

외면당할까 무서워 그에게 전하지 못했던 진심. 그리고……….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

하지만 여전히 두려웠다.

엘리사는 내내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것을 말했다.

“내가…… 아이를 가져서 그런 거라면, 그 실수 때문에 책임감을 느끼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싫어.”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솔직하게 꺼낸 마음이었다.

엘리사가 말하는 ‘실수’가 배 속의 아이를 뜻하는 것을 알아챈 리하르트는 설핏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급작스럽긴 했지만, 난 단 한 번도 그날 일을 실수라고 생각한 적없어.”

“…….”

“너와 ‘진짜 부부’가 되어 네 배속에 내 아이가 자라는 걸 지켜볼수 있기를 아주 오래전부터 바랐으니까.”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간절히 바라왔던 소원.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전장에서도 버티게 해 준 단 하나의 빛.

리하르트는 엘리사와의 사랑의 결실이 자라고 있는 그녀의 배를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우리 아기는 실수가 아니라 내 소원이야.”

어린 날, 제 조부를 끔찍이 증오했다.

그가 자신에게 바라는 모든 계획을 어그러트려 복수하는 것이 제 삶의 목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 당시의 제게선 알버트를 향한 증오를 덜어 내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공허만이 남으리라.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끝없는 ‘공허가 서서히 채워지기 시작했다.

저를 찌르는 뾰족한 감정이 아닌, 녹지 않는 솜사탕처럼 보드랍고 간질간질한 감정들이.

너로 인해서.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예고도 없이 덜컥 생겨버린 자신의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제야 리하르트는 확신했다.

평생 저를 괴롭히던 그 아픈 감정들을 지워도 될 것 같다고.

이제, 행복해지고 싶다고.

너와 함께.

“넌 그 소원을 이뤄 준 거고.”

“…….”

“고마워, 엘리사.”

그의 말에,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엘리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한때, 그가 알버트를 향한 복수를 포기하고 가정을 꾸려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길 바랐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그를 위한 그 바람이 사실은, 그의 곁에서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픈 자신의 바람이었다는 것을.

그를 향한 이 감정이 제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된 감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줄곧 같은 소원을 빌고 있었던 거야.’

그 기적이 가슴 아릴 정도로 기뻤다.

엘리사는 울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내 소원은, 네 소원이랑 같아.”

엘리사의 뺨과 눈가를 어루만지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던 리하르트의 손길이 멈칫했다.

“좋아해, 리하르트.”

놀란 듯 엘리사를 바라보던 리하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윽고 대답 대신 부드러운 입술이 눈물로 범벅이 된 엘리사의 눈가에 내려앉았다.

그는 그녀를 달래듯 그녀의 양쪽 눈꺼풀에 입을 맞추고 뗐다. 그리고 이마를 맞댄 채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속삭였다.

“사랑해, 엘리사.”

엘리사는 그렇게 속삭이는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주한 그의 눈동자에 오롯이 제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 너머로, 자신을 향한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감정에 가슴이 벅찰 정도로 두근거렸다.

엘리사는 저를 지탱하듯 안는 그의 팔을 붙잡으며 눈을 감았다.

물기 어린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겹쳐졌다.

가볍게 쪼듯 서로를 탐하던 입술이 이윽고 짙은 호흡을 얽었다. 호흡이 가빠질수록 엘리사를 안은 리하르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하아….”

정신이 몽롱해질 즈음, 가까스로 그에게서 벗어난 엘리사는 가쁜 숨을 내쉬며 그의 가슴팍에 몸을 기댔다.

그 와중에도 그에게서 떨어질까 그의 가슴팍 옷깃을 꼬옥 쥔 채였다.

리하르트는 혹여 엘리사가 넘어질까 그녀를 침대로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추려는데, 살짝 붉어진 엘리사의 얼굴이 보였다.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집어삼키고픈충동이 일었다.

리하르트가 그 얼굴에 끌려 입을 맞추려던 그 순간.

“아.”

엘리사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에 의아해하던 리하르트는 그녀의 배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귀여운 불청객의 등장에 리하르트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엘리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배를 쓰다듬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쉿. 얼른 자.”

그의 말을 들은 것인지, 아이는 금세 잠잠해졌다.

그 모습을 미소 띤 표정으로 지켜보던 두 사람은 이내 다시 입술을 겹쳤다.

*

다음 날, 리하르트는 다음 주에 있을 수확제 관련 회의를 하기 위해 황궁으로 왔다.

다행히 막바지였기에 논의할 안건은 많지 않았고, 회의는 예정보다 훨씬 일찍 끝이 났다.

리하르트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빠르게 황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부에게 지시했다.

“세리어트 후작저로 간다.”

오늘 세리어트 후작가에 간 엘리사를 데리러 가기 위해서였다.

마차에 오르자마자 갑갑한 크라바트를 풀던 리하르트는 문득 목이 허전한 것을 깨달았다.

‘……집에 두고 왔나.’

어젯밤, 에이든은 리하르트에게 정화의 힘이 담긴 수정으로 만든 펜던 트를 줬었다.

‘정화의 검과 비슷한 원리로 만든 아티팩트입니다. 만약의 상황에 일시적으로나마 그 힘을 억눌러줄 수 있을 겁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힘이 곧 태어날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걱정하는 리하르트를 위해 만들어 준 것이었다.

몸에 지니고 다니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 오늘부터 하고 다니려 했건만, 아침에 엘리사에게 정신이 팔려 깜빡한 모양이었다.

‘오늘 집에 가자마자 해야겠어.’

리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막 광장을 가로지르는데, 익숙한 제과점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엘리 사가 저곳에서 만든 과자를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잠깐 제과점에 들렀다 가지.”

리하르트의 명령에 마차가 제과점앞에서 멈췄다.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좋아하던 쿠키 세트와 수제 사탕을 집어 들었다.

그때, 그의 근처에 서 있던 아가일이 리하르트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 미행이 붙었습니다.”

아가일이 눈짓으로 근처에 서 있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제과점의 쿠키와 사탕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리하르트는 제과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저 남자가 따라 들어왔으며 자신의 행동을 살피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쿠키와 사탕을 계산하고 나와 기다렸다.

잠시 후, 제과점에서 그 남자가 나왔다.

남자는 마차에 타지 않고 서 있는 리하르트를 보고 흠칫했으나, 행인인 척 그대로 지나쳐 가려 했다.

“내게 용건이 있지 않나?”

그런 남자의 발걸음을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멈춰 세웠다.

남자는 흠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역시 아렌시아의 영웅답게 예리하시군요. 각하의 기분을 언짢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정식으로 찾아뵙고 이야기하기엔 조금 곤란한 이야기라, 부득이하게 미행을 ……….”

“그래서, 용건은?”

“그 힘’에 관한 정보를 찾고 계시지요?”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 힘’이란 말에 리하르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의 ‘검은 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엘리사와 에이든, 그리고 진리의 탑에 보냈던 아가일뿐이었다.

그런데, 이자가 ‘그 힘’을 알고 있었다.

남자는 동요하는 리하르트의 모습에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그 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분께 모셔다드리겠습니다.”

*

“어서 오세요, 소가주님.”

세리어트 후작저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리던 엘리사는 낯선 얼굴의 하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카밀라는?”

지난번 방문 때, 엘리사의 다음 방문을 기다리겠다던 카밀라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엘리사에게, 마중 나온 낯선 하녀가 사근사근 웃으며 말했다.

“하녀장님은 며칠 전에 독감에 걸리셨어요. 혹여 소가주님께 옮기라도 할까 겁난다며 저를 대신 내보내셨답니다.”

“아……. 그렇구나.”

“하녀장님을 대신해 오늘 하루 소가주님을 모시게 된 안나라고 합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이에요.”

“나도 반갑구나.”

무뚝뚝하던 카밀라를 마주하다 과도하게 친절한 안나를 대하려니 어쩐지 어색했다.

‘그새 카밀라에게 길들여진 건가.’

엘리사는 짧은 시간에 카밀라에게 정든 자신의 모습에 내심 놀라며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카밀라는 많이 아프니?”

“요 며칠 심하게 앓으셨는데, 오늘은 많이 괜찮아지신 것 같아요.”

안나는 엘리사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그 뒤를 앤과 톰슨이 따랐다.

지나가며 마주치는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던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마땅히 보여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엘리사는 식당으로 안내하는 안나에게 물었다.

“프레드릭도 안 보이는 것 같은데.”

“가주님께서 수확제를 맞이하여 집사님께 휴가를 주셨답니다. 덕분에 열흘간 세리어트 영지로 내려가셨어요.”

“그래?”

엘리사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으나,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일이 많은 수확제에 휴가를 보내셨다고?’

엘리사는 프레드릭에게 수확제를 기념하여 저택 내에서 자체적으로 작은 연회를 열고, 사용인들에게 보너스를 챙겨 주도록 지시했다.

저택 내 모든 사용인들이 마음껏 먹고 마시며 수확제의 분위기를 즐기고, 광장에서 열리는 축제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연회 준비와 나눠 줄 금액의 세부 예산을 짜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 시기에 휴가를 갔다는 건 이상했다.

아직 그를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지금껏 엘리사가 보아 온 그는 자신의 일을 내버려 두고 휴가를 즐길 사람이 아니었다.

‘미리 다 처리한 건가?’

엘리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때,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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