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소, 소가주님을 뵙습니다.”
데이지였다.
데이지는 식탁에 음식을 세팅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미소로 인사하던 엘리사는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데이지는 엘리사가 사주라고 지시했던 정 사이즈의 에이프런이 아닌, 전에 입고 있던 짤막한 에이프런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게다가….
‘어쩐지 겁에 질린 표정 같은데.’
그에 엘리사가 의문을 품으려는데, 안나가 엘리사가 앉을 의자를 빼내주었다.
“소가주님께서 오신다고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든 음식들이랍니다. 부디 입맛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식탁으로 안내한 안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대기했다.
톰슨과 앤 역시 엘리사의 뒤쪽으로 물러났다.
안나의 말대로 식탁에 갖가지 다양한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카밀라가 준비해 두겠다던 호수 버섯 튀김은 없었다.
‘……이상해.’
카밀라가 아무리 아파도 약속을 잊을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그때, 데이지가 다가와 엘리사에게 물었다.
“어떤 음식을 덜어 드릴까요?”
그렇게 묻는 데이지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것을 눈치챘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빙긋 웃으며 손을 쭉 뻗어 음식을 가리켰다.
“무슨 음식인진 모르겠지만 저것도 좀 덜어 줄래?”
그때, 엘리사의 드레스 소매에 걸린 스푼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그에 흠칫 놀란 데이지는 엘리사를 바라보았다.
엘리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스푼, 떨어졌는데. 주워야지?”
멍하니 엘리사를 바라보던 데이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몸을 숙여 스푼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새것을 가져오겠다며 사라졌다.
엘리사는 포크로 치즈 한 조각을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 넣으려는 순간, 헛구역질이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앤이 놀라 엘리사에게 다가왔다.
“마, 마님! 괜찮으세요?”
“치즈 냄새를 맡으니까 속이 좀……… 안 좋은 것 같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안나도 엘리사에게 다가왔다.
“입덧을 하시는 건가요?”
“그러신 것 같아요. 드물긴 하지만 막달까지도 입덧을 하는 산모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엘리사를 모시기 위해 임신에 대해 공부한 앤이 대신 대답했다.
엘리사는 괴로운 표정으로 식탁에서 일어났다.
“날 위해 고생해서 준비해 줬는데, 이래서는 못 먹을 것 같구나.”
엘리사의 말에 잠시 표정이 굳어졌던 안나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대답했다.
“아……. 그러시다면 별수 없죠. 괘념치 마세요.”
“대신 뒤뜰 산책을 좀 하고 싶은데. 찬 바람을 쐬면 속이 좀 나아질 것 같아.”
안나는 엘리사와 앤, 톰슨을 뒤뜰로 안내했다.
교외에 위치한 세리어트 후작저의 뒤뜰은 고요했다.
평소엔 평화롭게 느껴지던 고요함이었지만, 오늘은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조차 스산하게 느껴졌다.
뒤뜰의 전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리사는 앤에게 지시했다.
“앤, 오늘은 바람이 거세구나. 마차로 돌아가서 바람이 거세니 다들 바람을 피하고 있으라고 하렴.”
가을바람이 제법 선선하긴 했지만, 거세다고 할 수준은 아니었다.
앤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러마고 대답하고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 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안나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혹시 뒤뜰의 별채에 가 보셨어요?
그곳에 소가주님의 어머니… 선대 후작 부인께서 쓰시던 공간이 있는데.”
“그래? 그럼 뒤뜰을 둘러보고 그쪽으로 가자.”
엘리사는 뒤뜰 한쪽에 있는 나무로 향했다. 그 뒤를 톰슨과 안나가 따랐다.
한참 엘리사를 따라 걷던 안나는 슬쩍 엘리사와 톰슨의 눈치를 살폈다.
엘리사는 국화꽃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했고, 톰슨은 그런 엘리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이다!’
안나는 소매 안에 숨겨 두었던 단검을 꺼내 톰슨의 뒷덜미를 노렸다.
그 움직임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유려했다.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자객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톰슨이 재빠르게 공격을 피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허공을 내리찍은 안나는 간발의 차로 아슬아슬하게 톰슨의 공격을 피했다.
톰슨은 놀란 얼굴의 안나를 노려보며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루벨린에서 ‘바람이 거세다’는 뜻이 뭔지 아나?”
톰슨은 안나를 향해 맹렬히 달려들며 덧붙였다.
“집으로 돌아가기 힘들겠다는 뜻이야.”
겨울이 긴 루벨린에서는 겨울 사냥을 나서는 사냥꾼들이 많았다.
하지만 루벨린은 눈보라나 눈 폭풍등의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가 많았고, 그를 대비해 영지 곳곳에 오두막을 많이 지어 두곤 했다.
누군가 ‘바람이 거세다고 하면 그 오두막에서 눈보라나 폭풍을 피했다.
엘리사는 그 말로 톰슨과 마차에서 기다리는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다.
지금,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힘든 위험에 처했다고.
안나는 놀란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눈치챘지………?’
엘리사는 그런 안나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조금 전, 식당에서 데 이지가 스푼을 주울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도망가셔야 해요………..’
톰슨은 안나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녀를 베어 냈다.
그에 눈을 질끈 감았던 엘리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별채 쪽에서 우르르 나오는 괴한들이 보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톰슨과 엘리사를 에워쌌다.
이윽고 그들의 중심으로 길을 가르며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릴 때부터 세리어트 후작저는 왜 이런 구석에 처박혀 있을까 궁금했었는데…….”
“……..”
“오늘을 위해서 그랬나 봐.”
엘리사는 이죽거리는 케인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혹시라도 희망을 가질까 봐하는 말인데 당신 남편은 안 올 거야.”
물지 않을 수 없는 미끼를 던졌거든.
케인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엘리사는 그런 케인을 노려보며 배속의 아이를 보호하듯 배를 감쌌다.
‘……죽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남자의 소원.
우리의 소중한 결실.
이 아이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싶었다.
“…이러고도 가주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당연히 못 되겠지. 그래서, 내가 가질 수 없는 건 없애 버리려고.”
그 말은, 그의 목적은 가주 자리가 아니라 엘리사를 죽이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엄마 잘못 만나 세상 빛 못 보는 아이에게 미안해하면서 죽어.”
케인은 괴한들에게 공격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 순간, 저택 안에서 비명 소리와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앤이 전한 엘리사의 말뜻을 파악한 루벨린의 기사들이 저택 내부의 괴한들과 싸우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톰슨은 피식 웃으며 엘리사의 앞을 막아섰다.
“솔직히 이렇게 많은 인원을 상대하는 건 전쟁 이후로 처음이라, 자신은 없습니다만……….”
그러고는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은 오간 데 없이, 싸늘한 표정으로 검을 다잡으며 덧붙였다.
“그래도 제 목숨 하나 걸면 우리 애들이 도착할 때까진 마님을 지켜드릴 수 있겠죠.”
그와 동시에 괴한들이 톰슨에게 달려들었다.
톰슨 역시 검을 휘두르려는 그 순간, 그의 앞에 빙벽이 솟아올랐다.
그 바람에 괴한들의 공격은 모두 빙벽에 부딪혀 막히고 말았다.
톰슨은 놀란 눈으로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엘리사는 바닥에 주저앉아 마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케인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은 가지지 못한 그 힘으로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는 그녀를 보자 열등감이 끓어올랐다.
케인은 이를 으드득 물며 말했다.
“저 몸으론 얼마 버티지 못할 거다. 계속 공격해.”
그의 말대로 엘리사는 아직 힘을 다루는 데 능숙하지 않은 데다, 임신으로 인해 무리를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괴한들은 케인의 명령대로 계속해서 빙벽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화살세례도 합세했다.
그들이 충격을 가하는 빙벽을 유지하는 엘리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톰슨은 빙벽이 무너지면 언제든 맞설 수 있도록 태세를 풀지 않았다.
엘리사는 이를 악물었다.
‘버텨야 해. 지켜야 해.’
하지만 엘리사의 바람과는 달리 점차 집중력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빙벽에 작은 틈이 생기며 그 틈새로 화살이 파고들었다. 화살은 엘리사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윽!”
그와 동시에 빙벽에 균열이 일며 깨졌다.
톰슨은 재빨리 그들의 공격을 막아섰으나, 엘리사를 향해 날아드는 화살까지 막진 못했다.
‘안 돼……!’
엘리사는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 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불어닥친 강한 바람이 엘리 사에게로 향하던 화살들의 궤를 꺾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쿠르릉-천둥소리가 들리며 낙뢰가 내려쳤다.
지상으로 내려친 낙뢰는 조금 전, 엘리사를 공격했던 궁수를 정확히 관통했다.
‘이건………?’
괴한들과 케인은 놀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살기 어린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는 리하르트가 있었다.
“전부 죽여 주지.”
살벌한 목소리로 뇌까리는 그의 뒤로 검은 기운이 넘실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