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그 시각, 펠리스 후작저레이모어는 접견실에 홀로 앉아 찻물이 다 식은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기로 한 이가 늦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레이모어는 다 식은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목을 축이려는 그 순간, 노크 소리가 울렸다.
접견실로 들어온 부하는 난감한 표정으로 소식을 전했다.
“각하. 루벨린 공작이 세리어트 후작저로 가는 바람에 계획이 실패했다고 합니다.”
“.……루벨린 공작 부인은?”
“공작 부인을 처리하는 것도…
실패했다고 합니다.”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레이모어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레이모어는 여상한 표정으로 목을 축이고 혀를 찼다.
“빠르게 처리했어야지, 무얼 그리 꾸물거렸는지. 쯧.”
그 멍청한 작자가 실패할 거란 가능성은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에게 케인은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버릴 일회성 패였으니까.
그때, 또 다른 노크 소리와 함께 집사가 접견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루벨린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어찌할까요?”
레이모어는 잠시 놀란 듯했으나, 이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안으로 모셔라.”
부하와 집사는 조용히 물러났다.
레이모어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야, 당신을 정식으로 대면하게 되는군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
“안으로 드시지요.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리하르트는 펠리스 후작가의 사용 인의 안내를 받으며 접견실로 향했다.
펠리스 후작가는 루벨린 공작저만큼은 아니지만 그 규모가 컸고, 어두운 톤으로 꾸며 웅장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쩐지 음산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쪽입니다.”
접견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은 리하르트에게 고개를 숙인 후, 곧장 접견실의 문을 열었다.
리하르트는 동행한 루벨린의 기사 둘과 함께 접견실로 들어섰다.
레이모어는 접견실 중앙에 앉아 리하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보다 늦게 오셨군요.”
그 말은, 리하르트를 유인하고 엘리사를 죽이려던 그의 계획이 틀어지게 되면서 그가 뒤늦게 이곳에 온 것을 지적하는 의미였다.
리하르트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보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혹여 함정이라 생각하고 오지 않으시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만.”
“설령 함정이라 하더라도 피할 이유가 있나?”
리하르트는 싸늘히 대꾸하며 다리를 꼬고 앉아 레이모어를 바라보았다.
설령 함정이라 해도, 그의 힘으로 모조리 쓸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에게 함정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여유로운 태도였다.
마주 보고 있는데도 내려다보는 듯한 그의 위압감에, 레이모어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응수했다.
“과연, 전쟁 영웅다운 배포이십니다.”
“우리가 공치사할 사이는 아닌 듯한데, 이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리하르트는 군말이 길어지기 전에 대화를 잘라 냈다.
그는 잠시도 레이모어와 더 있을 생각이 없었다. 서둘러 일을 정리한 후 기다리고 있을 엘리사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레이모어는 그런 리하르트의 태도에도 언짢은 기색이 없었다.
그는 하녀가 막 새로 내온 찻잔을 들며 리하르트의 옆에 서 있는 루벨린의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전에 듣는 귀를 물리는 것이 좋겠군요. 다른 이가 듣기엔 곤란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아, 물론 저도 물리도록 하지요.”
“안 됩니다. 각하. 위험합니다.”
레이모어의 옆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그를 만류했으나, 레이모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나는 두 번 말하는 걸 아주 싫어해.”
그의 여유는 리하르트가 자신을 결코 해치지 못할 것을 알기에 나오는 것이었다.
레이모어 휘하의 기사들은 그의 처사가 불안한 눈치였으나, 이내 물러났다. 그들과 함께 루벨린의 기사들도 접견실을 나갔다.
접견실에 비로소 리하르트와 레이 모어,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
리하르트는 뜸 들이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힘, 황제가 벌인 짓인가?”
레이모어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목을 축인 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는 그 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리하르트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레이모어를 바라보았다.
레이모어는 황제를 폐하’가 아니라 ‘그’라고 지칭했다.
지존인 황제를 폐하’라 지칭하지 않는 것은 명백한 모독죄이자,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반역죄.
황제의 최측근인 자의 언행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언행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후작은 이 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지? 그대가 내게 주입한 건가?”
“그 힘은 원래 당신의 것입니다.”
“…뭐?”
그의 대답에 리하르트의 눈빛이 동요했다.
“정확히는 제가 당신을 위해 되찾아드린 것이지요.”
“그게 무슨-”
“그 계집을 죽이려 한 것도, 당신의 힘을 완성시킨 것도…… 모두 당신을 향한 충정에서 우러난 제 뜻입니다.”
황제의 뜻이 아니라.
레이모어의 말에 리하르트는 그가수렵제 때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너무 고깝게 생각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각하를 위한 일이니.’
레이모어는 협곡에서 악마의 영혼석을 가져와 루벨린에 그것을 뿌렸고, 리하르트로 하여금 협곡을 수색 하러 가도록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힘’을 리하르트에게 심었다.
아니, 그의 말을 빌리자면 ‘되찾아주었다.
‘왜………? 이 힘이 무엇이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레이모어에게 물었다.
“어째서…… 내가 ‘이 힘을 가지고 있는 거지?”
레이모어는 그런 리하르트를 보며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찼다. 그리고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신의 뜻입니다.”
“……신의 뜻, 이라고?”
처음엔 그가 미쳐서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광기 어린 신념으로 가득찬 레이모어의 눈을 보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는 그저 신의 뜻을 따를 뿐이지요.”
“많이 혼란스러우실 만도 하지요.
모르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당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려진 큰 그림이니까.”
“…….”
“제가 도와드릴 -”
결국 리하르트는 참지 못하고 레이 모어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죽여 버리기 전에 알아듣게 설명해.”
리하르트는 살기를 뿜으며 짓씹듯 말했다. 그가 살의를 느낌과 동시에 그의 등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올라왔다.
레이모어는 그것을 보고는 광기에 찬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저를 죽이도 신께선 당신께 뜻하신 바를 멈추지 않으실 겁니다.”
“내 반평생에 걸쳐 완성한 역작.”
“…….”
“내가 만든, 나의 신이시여.”
“…….”
“그 계집만 아니었으면 진즉에 결함 하나 없이 완성되었을 터인데…….”
“……엘리사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곱게 죽여 주진 않을 것이다.”
레이모어의 멱살을 쥔 리하르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레이모어는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며 웃었다.
“제 말을 믿기 힘드시다면, 진리의 탑으로 가십시오. 그곳에 당신이 찾는 답이 있을 테니.”
신의 뜻.
진리의 탑.
리하르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레이모어를 쳐다보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각하, 급한 소식입니다. 잠시 들어 가도 되겠습니까?”
루벨린의 기사였다.
리하르트는 레이모어를 죽일 듯 노려보다 그의 멱살을 놓았다. 그리고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어와라.”
루벨린의 기사는 리하르트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접견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다급히 다가와 리하르트에게 귀엣말로 소식을 전했다.
“마님께서 진통이 있다고 하십니다. 서둘러 돌아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엘리사의 소식에 리하르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직 출산 예정일까지는 한 달하고도 좀 더 남아 있었다.
아홉 달을 채우고 태어나면 정상적인 출산이지만, 그전에 태어나면 조산이었다.
엘리사를 떠올리자, 조금 전까지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차지하고 있던 모든 생각들이 사라지고 오직 그녀만이 남았다.
리하르트는 레이모어를 두고 곧장 돌아섰다. 지금 당장 엘리사에게 가봐야 했다.
그런 리하르트의 등 뒤로, 레이모어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자를 진정으로 위하신다면 최대한 멀리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헛소리다.
리하르트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돌아서 접견실을 나갔다.
레이모어는 닫히는 방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랑하는 남자의 손에 죽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겠습니까.”
식은 찻잔을 드는 그의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