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엘리사!”
리하르트는 타고 갔던 마차를 둔 채 날아서 공작저로 돌아왔다.
엘리사의 침실로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있는 엘리사의 곁엔 주치의인 세틸과 앤이 있었다.
“……리하르트.”
엘리사는 핼쑥해진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리하르트는 다급히 엘리사의 곁으로 다가섰다.
아직 정황은 알 수 없지만, 당장 출산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닌 듯했다.
리하르트는 힘없이 떨리는 엘리사의 손을 잡아 주며 옆의 세틸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조산기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빠르게 약을 처방한 덕에 어느 정도 진정되었고요.”
그녀의 말에 리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틸은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조산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누워서 생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시기면 배 속의 아이는 거의 성장했을 시기였다. 당장 태어나도 큰 탈 없이 크겠지만, 가급적 위험을 줄이는 것이 좋았다.
“조금이라도 더 배 속에서 키우는 것이 아기님께 좋을 듯합니다.”
설명을 마친 세틸은 물러갔다. 앤도 자리를 피했다.
둘만 남겨지자, 엘리사는 아기에 대한 걱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책했다.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아기가 힘들었나 봐. 그래서 빨리 나오려고 하나 봐. 나 때문이야…….”
그녀의 눈물에 리하르트의 가슴이 미어졌다.
엘리사가 임신을 하면서 부쩍 눈물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강하고 긍정적인 편이었다.
그런 엘리사가 이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이는 건, 현재 그만큼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힘들다는 의미였다.
리하르트는 떨고 있는 엘리사의 눈물을 닦아 주며 그녀를 달랬다.
“그게 왜 네 탓이야. 그전까지 넌 건강했고, 아기는 아무 이상 없었잖아.”
“하지만…….”
“너를 노린 그자들의 잘못이지,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최선을 다해 아기를 지켰어.”
리하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그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제 불찰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와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엘리사, 넌 지금보다 더 빨리 태어나서도 살아남았어. 그리고 이 아이는 내 피를 이었으니… 설령 이르게 태어나더라도, 분명 건강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진정시키듯 그녀의 이마 언저리에 입을 맞췄다.
그의 말에 서서히 안정을 되찾은 엘리사는 울음을 멈췄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옆에 누워 그녀와 그녀의 배를 보듬어 안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한숨 자.”
“…….”
긴장이 풀린 탓인지,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손을 꼭 잡은 채 금세 잠들었다.
리하르트는 그녀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레이모어가 했던 이야기들을 곱씹었다.
그 힘은 원래 당신의 것입니다.
그는 엘리사에게 잡힌 손을 조심스럽게 빼내어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엘리사의 힘은 생명의 힘, 루벨린의 힘은 파괴의 힘이라면, 어느 날부터 갑자기 발현되기 시작한 이 힘은….
‘죽음의 힘.’
힘이 닿는 게 무엇이든 생명을 빼앗는다.
그것이 이 힘의 속성이라면, 엘리 사의 힘과는 상극의 힘인 셈이었다.
그것이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힘이 상극인 그녀를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꺼림칙함이.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녀의 눈물에, 말 한 마디에, 행동 하나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저인데.
그저 만지는 것만으로도 내가 너를 다치게 할까 조심스러운데.
자신이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있을 리 없다.
리하르트는 잠든 엘리사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잠든 그녀의 뒷머리에 입을 맞추며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만은 지킬것이라고.
#12. 가족
그날 이후, 엘리사는 세틸의 처방대로 온종일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리하르트는 수확제 준비를 대강 마무리한 후 온종일 엘리사의 곁을 지켰다.
다행히 엘리사의 몸 상태는 많이 안정되었고, 리하르트가 함께 있어준 덕인지 정서적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덕분에 별 탈 없이 열흘을 보내고수확제 이틀 전날이 되었다.
잠깐 짬을 내어 광장에 다녀온 앤과 하녀들은 나가지 못하는 엘리사를 위해 엘리사의 침실을 찾았다.
앤은 엘리사에게 예쁘게 포장된 종이 상자를 내밀었다.
“플루아 가게 마카롱이에요. 가게를 지나가는데 마님께서 좋아하시던게 생각나서 다 같이 사 왔어요.”
“어머. 다들 고마워. 잘 먹을게.”
엘리사가 진심으로 기뻐하자, 앤과 하녀들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엘리사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물었다.
“광장은 축제 준비로 한창이지?”
“네. 올해는 유난히 다른 나라에서 온 행상인들도 많았어요.”
“아, 참. 이번에도 대극장에서 연극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맞다! 광장에서 에드워드 경을 만났어요. 글쎄, 마님이 그때 손수건을 주셨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무려 4년 전 일인데!”
하녀 하나가 ‘에드워드’라는 남자를 언급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아, 그러면서 마님은 잘 지내시냐고 물어봤어요.”
“어머, 그래?”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드워드 경은 잘 지내지?”
“그럼요. 경은 이번에도 -”
엘리사의 물음에 재잘거리며 대답하던 하녀들은 말을 하다 멈췄다.
엘리사와 하녀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잠시 소파로 물러나 있던 리하르트가 불쑥 침대로 돌아와 엘리사를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엘리사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싸한 눈으로 하녀들을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빛이 축객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압도당한 하녀들은 언제 신이 나 재잘거렸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희가 너무 시끄럽게 떠든 것 같아요. 마님께선 나가고 싶으실 텐데 눈치 없이…….”
“응? 난 너희 이야기라도 들어서 좋은데.”
“아, 아니에요. 이만 나가 볼게요.
쉬세요, 마님.”
하녀들은 엘리사가 붙잡기 전에 서둘러 침실을 나갔다.
등 뒤의 리하르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엘리사는 하녀들의 갑작스러운 퇴장에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등 뒤에서 낮게 가라앉은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워든가 뭔가 하는 놈은 뭔데네 안부를 묻는 건데?”
“에드워드 경? 대극장 소속 극단의 유명한 배우야.”
“손수건은 왜 줬고?”
“연극 끝나고 인사하는데, 다친 것 같아서 줬어.”
“다음부턴 아무 놈한테나 손수건 주지 마.”
“응?”
“…너와 관련된 건 전부 다 내 거니까.”
리하르트는 작은 목소리로 얼버무리며 엘리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에드워드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리하르트를 의아해하던 엘리사는 한 박자 늦게 그의 마음을 알아챘다.
“지금 질투하는 거야?”
리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장난기가 솟은 엘리사는 짐짓 모르는 척, 자신의 배를 감싼 리하르트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에드워드를 언급했다.
“음, 에드워드 경이 잘생겼긴 하지.
그런데….”
슬쩍 리하르트를 돌아보자, 질투심으로 불타오르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엘리사는 웃음을 터트리며 잔뜩 심통이 난 리하르트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내 남편이 더 잘생겼어.”
객관적으로 봐도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의 인상이 조금 무섭긴 하지만.
엘리사의 말을 들은 리하르트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 풀어졌다.
‘귀여워..’
내심 그런 리하르트를 귀여워하던 엘리사는 문득 조금 전 하녀들과의 대화를 떠올리곤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수확제 전야제 연회를 못 열게 돼서 아쉽다. 저 애들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연회를 열면 더 좋았을걸.”
엘리사는 원래 저택 내에서 자체적으로 수확제 전야제 기념 연회를 열생각이었다. 세리어트 후작저에 지시한 것과 같은.
하지만 가문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엘리사가 침대에 누워 요양하게 되면서 연회는 자연히 취소되었다.
엘리사는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나는 즐기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저 애들이 수확제를 즐겁게 보내 주면 좋을 텐데…….”
아쉬워하는 엘리사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
다음 날 저녁 무렵, 세틸이 찾아왔다.
하루 세 번, 엘리사의 상태를 진찰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상태가 많이 안정되신 것 같네요. 별다른 이상 증상은 없으셨나나요?”
“딱히 없었어요.”
“그럼 한 시간 정도는 괜찮을 것 같군요.”
“한 시간?”
맥락을 알 수 없는 세틸의 말에,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리하르트가 설렁줄을 당겼다.
이윽고, 침실의 문이 열리고 앤이 들어왔다.
나무로 만든 휠체어와 함께.
엘리사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휠체어는 왜 가져온 거야?”
“전야제 연회에 참석하려고. 괜찮겠어?”
엘리사는 그제야 그가 자신을 위해 전야제 연회를 준비했음을 알아챘다. 서 있기 힘든 자신을 위해 휠체 어를 준비했다는 것도.
그와 동시에 놀라 휘둥그레졌던 엘리사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목을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침대에 누워 지내게 된 이후, 그녀가 보여 준 가장 환한 미소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리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안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