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데리고 저택의 중앙 홀로 내려왔다.
홀엔 이번 수확기에 수확한 것들로 요리한 먹음직한 음식들과 예쁜 디저트들이 놓여 있었고, 그 곁엔 새옷을 입은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엘리사를 보고 반색을 띠며 다가왔다.
“마님! 몸은 좀 어떠세요?”
“다들 신경 써 준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엘리사는 안부를 묻는 하녀들에게 웃으며 화답했다.
모처럼 기사단의 제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톰슨도 엘리사를 보고는 성큼 다가와 너스레를 떨었다.
“와, 마님. 못 본 새 더 아름다워 지셨네요. 이래서 각하가 우리 마님을 방에만 꽁꽁 숨겨 놓으셨나 봐?
누가 눈독 들이기라도 할까 봐.”
짧은 시간 안에 연회에 참석하느라 단장하지 못한 엘리사를 배려하여 건넨 말이었다.
그러자 옆에서 톰슨의 너스레를 듣고 있던 기사가 깐족거렸다.
“와, 부단장님. 물론 마님이 아름다우신 건 맞습니다만, 아부가 너무 티 나는 거 아닙니까?”
“얀마, 아부 아니고 진심이거든?
마님은 내 생명의 은인이시라고!”
“…시끄럽다, 톰슨, 우리 아기가 듣겠어.”
톰슨과 기사가 투닥거리자, 리하르트가 핀잔을 주며 그들의 입을 막았다.
웃으며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앤이 문득 생각난 듯, 엘리사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년 신년제는 아기님이 계실 테니, 분위기가 좀 더 활기차지겠네요.”
“기대되는군요. 지금은 시커먼 성인 남자들만 드글드글 하니, 분위기가 너무 칙칙해서……….”
아가일이 앤의 말을 거들자, 옆에 있던 ‘시커먼 성인 남자’ 톰슨이 기가 막힌다는 듯 아가일을 흘겨보았다.
“허, 참내. 그러는 너도 속 시커먼남자거든?”
“제 속은 깨끗합니다. 저를 경과 같은 선상에 두지 마시죠.”
엘리사는 서로 정색한 채 티격태격하는 톰슨과 아가일을 보며 쿡쿡 웃었다.
그러나 연회의 시작을 막아서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빛은 싸늘했다.
그것을 눈치챈 기사가 황급히 두 사람을 리하르트의 시야에서 끌어냈다.
하녀들은 기다렸다는 듯 각자 선물상자를 들고 엘리사에게 다가왔다.
“마님, 저희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값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아기님이 한 번이라도 입어 주시면 정말 기쁠 거예요.”
하녀들이 준비한 선물 상자에는 각각 손 싸개나 턱받이, 아기 양말 등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직접 만든 선물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놀란 눈으로 선물들을 바라보던 엘리사의 얼굴에 이내 환한 미소가 번졌다.
“어머나, 이거 너무 귀엽다……. 다들 정말 고마워. 아기도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거야.”
그때까지 티격태격하던 톰슨과 아가일, 그리고 기사들도 엘리사에게 준비한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 부랴부랴 다가왔다.
“마님, 저희도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기사들은 나름 심사숙고 끝에 사온 아기용 장난감을 선보였다.
엘리사는 우락부락한 남자들이 아기용 장난감을 들고 난리 치는 걸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엉성한 녀석들……..
리하르트는 그런 부하들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엘리사를 보고는 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었다.
급하게 준비한 연회는 성공적이었다.
*
한 시간 후,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데리고 침실로 올라왔다.
연회를 즐기기엔 짧은 시간이었으나 엘리사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잔뜩 들뜬 엘리사는 침대에 누워서도 조금 전 사용인들과 기사들에게 받은 선물을 만지작거리며 재잘거렸다.
“이 딸랑이 너무 귀엽다.”
“그러게. 톰슨 녀석, 제법 안목이 있네.”
“이 양말도 좀 봐 봐. 발이 엄청 조그마해.”
엘리사가 만지작거리는 양말은 엘리사의 말대로 정말 작았다. 그녀의 손바닥 정도 되는 길이였다.
이 작은 발도 발이라고 양말을 신는다 생각하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양말의 주인이 마냥 귀엽게 느껴져 웃음이 났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엘리사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물었다.
“다른 거 받고 싶은 건 없어?”
“음, 이미 넘치게 받은 것 같은데.”
“널 위한 선물은 못 받았잖아.”
“오늘 연회만으로도 충분해.”
“그럼 내 선물은 필요 없어?”
리하르트의 물음에 엘리사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선물?”
“궁금해?”
엘리사는 무슨 당연한 걸 묻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요구했다.
“그럼 답례를 줘.”
“답례?”
“아까 다른 사람들한텐 웃어 줬잖아. 나한텐 더 좋은 걸 줘야지.”
욕망이 선연한 눈을 한 그가 무방비한 상태에 있는 엘리사의 입술을 검지로 쓸어내렸다.
그가 바라는 ‘답례’가 무엇인지 눈치챈 엘리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벼, 별걸 다 질투하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저를 유혹하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진 못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멈추진 못했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저를 빤히 바라보는 엘리사를 물끄러미 보던 리하르트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엘리사는 제 허리를 안는 그의 손길을 느끼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부드럽고 달콤한 입술이 겹쳐졌다.
그는 엘리사의 긴장을 풀 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떼기를 반복했다.
그에 애가 달은 엘리사가 슬그머니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자, 그는 피식 웃으며 입술을 깊게 겹쳐 왔다.
그제야 서로를 갈망하는 달뜬 호흡이 얽혔다.
차츰 엘리사의 호흡이 가빠지자, 리하르트는 마지못해 입술을 뗐다.
그러고도 아쉬운 듯 가벼운 입맞춤이 그녀의 입술에 두어 번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엘리사는 가쁜 숨을 고르며 그를 흘겨보았다.
“선물 주기도 전에 답례부터 받아가는 게 어디 있어? 순 날강도야.”
“싫으면 다시 돌려주고.”
그 말은 즉, 입맞춤을 돌려준단 핑계로 한 번 더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엘리사의 입술을 닦아 내며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그의 언행에 엘리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엘리사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척,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빨리 선물 줘.”
리하르트는 안주머니에서 벨벳으로 감싼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엔 엘리사의 손바닥 정도 크기의 백금으로 만든 열쇠가 들어 있었다.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열쇠와 리하르트를 번갈아 보았다.
리하르트는 그 무언의 물음에 대답했다.
“별장 열쇠야.”
“별장?”
“루데아에 있는 땅을 샀어. 그곳에 별장을 지으려고.”
리하르트는 며칠 전, 엘리사가 구름 한 점 없이 높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소풍 가기 딱 좋은 날씨네.’
아이 때문에 온종일 누워서 보내야 하는 그녀의 아쉬움이 느껴져 마음이 쓰였다.
아이를 낳고 나면 겨울이 되어 소풍을 가긴 힘들 터였다.
그녀의 기분을 달래줄 방법을 고민하던 리하르트는 얼마 전, 세리어트후작저에 다녀온 엘리사가 그곳의 호수가 아름답다며 이야기하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곧장 루데아에 별장을 지을 부지를 매입했다.
루데아는 아카로아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호반의 도시였다.
지상 낙원이라 불릴 정도의 아름다운 경치를 가지고 있는 그곳은 아렌시아의 고위 귀족들이 각자의 별장을 세울 만큼 유명한 휴양지였다.
“아기가 태어나면 셋이 같이 가자.”
리하르트는 만삭의 엘리사를 안아줄 수가 없어, 대신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우리 아기 품고 있느라 고생했어.”
“……..”
“많이 힘들었을 텐데 지금까지 무사히 잘 버텨 줘서 고마워, 엘리사.”
“…….”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버텨 줘.”
엘리사는 뜻밖의 큰 선물에 놀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임신으로 겪는 불편과 고통이 엄마이기에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지 않았다.
제게 고마워했고, 힘들 때마다 곁을 지켜 주었다. 언제나 자신을 먼저 생각해 주고 배려해 주었다.
그런 그에게 가족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기뻤다.
그가 있었기에 긴 시간, 이 고통을 버틸 수 있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던 엘리사는 이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가자.”
리하르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입을 맞췄다.
“사랑해.”
엘리사는 사랑을 속삭이는 그를 바라보며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리하르트가 그 손길에 얼굴을 기대어왔다.
‘이 다정한 남자의 아이는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울까.’
이 남자가 원작에서 아이를 죽이려 했었다는 사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과거, 그에게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도망치려고 했던 제 모습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곧 그를 닮은 아이를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설렘으로 벅차올랐다.
‘엄마는 너를 만나게 될 날이 너무 기다려져, 아가야.’
엘리사는 서서히 다가오는 그를 보며 눈을 감았다.
이윽고 부드러운 입술이 겹쳐졌다.
*
수확제가 지나가고, 또다시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리하르트는 평소처럼 엘리사를 먼저 재운 후, 잠든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다 느지막이 잠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리, 하르트……….”
고요한 방에 고통에 겨운 엘리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작은 목소리였으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목소리를 듣고 곧장 잠에서 깨어났다.
세리어트 후작저에서의 사건 이후, 엘리사의 상태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엘리사?”
리하르트는 다급히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엘리사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신음을 흘리며 배를 안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번들거리는 땀과 꾹깨문 입술이 그녀가 얼마나 큰 고통을 인내하고 있는지 알려 주었다.
엘리사는 신음을 억누르고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나… 배가, 너무 아파……….”
이따금 느껴지던 배 뭉침과는 달랐다.
시간이 지나도 고통이 가시지 않았고, 오히려 진통의 주기가 짧아졌다.
게다가 강도도 더 세지는 듯했다.
고통에 겨워하는 엘리사의 모습을 본 리하르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직감했다.
오늘이 바로 두 사람의 아이가 태어날 날이라는 것을.
“엘리사, 천천히 숨을 쉬어.”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진정시키며 다급히 설렁줄을 당겼다.
정확히 아홉 달을 채운 그날 밤, 진통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