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08화 (108/164)

108화

산통이 시작되자 하녀들과 산파, 주치의인 세틸이 달려와 본격적인 출산 준비에 들어갔다.

아이를 받을 준비가 착착 되어 가는 가운데, 엘리사는 몇 분 주기로 돌아오는 산통을 참아 냈다.

“하, 윽….”

“엘리사, 숨 쉬어. 잘하고 있어.”

고통스러워하는 엘리사의 곁에서 그녀의 안색을 살피는 리하르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아이를 낳다가 죽는 여자들도 많았고, 아이를 낳고 난 후에 그 후유증으로 죽는 여자들도 많았으니까.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심장이 죄였다.

매번 전장에 설 때마다 여기서 살아남지 못하면 엘리사를 볼 수 없다는 두려움을 안고 전투에 임했지만, 그 두려움조차 지금의 두려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두려워하면 엘리사가 불안해하겠지.’

리하르트는 철저히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 대신 엘리사의 가녀린 손만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잠시 진통이 사라지자, 그의 기색을 알아챈 엘리사가 리하르트의 손을 꼬옥 잡았다.

“…리하르트.”

갑작스러운 그녀의 손길에 놀란 리하르트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그의 걱정을 읽기라도 한 듯 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 안 죽어.”

“…..”

“그러니까 그렇게 죽을상하고 있지 마. 우리 아기가 아빠 얼굴 보고 무서워하겠….”

원작에서 아이와 엄마 모두 무사하다는 걸 알고 있는 엘리사는 애써 태연한 척 리하르트를 안심시키려 했으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번 진통이 찾아왔다.

“흐읏….”

엘리사는 진통을 견디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참아 내지 못한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진땀을 뻘뻘 흘리며 괴로워하는 엘리사의 모습을 지켜보던 리하르트는 이 상황을 만든 과거의 자신을 향해 이를 으득 갈았다.

한심한 놈…

제 감정에 취해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그녀와 밤을 보내고, 결국 그녀에게 이 끔찍한 고통을 겪게 한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어떻게 사랑하는 여자를 이렇게 아프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 대신 아플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에게는 그녀의 고통을 덜어 줄 방법이 없었다.

고통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손을 잡아 주고, 그 손등에 입을 맞춰 주는 것밖에는.

태어나 처음으로 절망적인 무력감이 들었다.

“잘하고 있어, 엘리사. 조금만……

조금만 더 힘내.”

리하르트는 고통스럽게 숨을 내쉬는 엘리사를 달래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통상적으로 초산인 산모가 출산하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다.

예상보다 짧게 끝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길어질 수도 있었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그녀에게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끔찍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엘리사의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지옥 같았다. 꼭 누군가 제 심장을 난도질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윽……. 흑…….”

급기야 엘리사가 눈물을 내비쳤다.

그것을 본 리하르트의 이성이 끊어졌다.

리하르트는 옆에 있는 세틸과 산파를 다그쳤다.

“제발, 뭐라도 좋으니 어떻게 좀해 봐! 그대가 엘리사의 주치의지 않나?”

서늘하고 무심한 인상의 리하르트는 평소에도 사용인들에게 두려운 존재이긴 했으나, 그래도 직접 아랫사람을 다그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런 그가 아랫사람에게 언성을 높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틸은 처음 보는 리하르트의 모습에 놀라 다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소, 송구합니다, 각하. 하지만…….…

산고에 관해서는 어찌 도와 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세틸의 말을 들은 리하르트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침음을 삼켰다. 그녀를 다그쳐서 될 일이 아니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가녀린 손을 감싸 쥔 채 전장에서도 찾은 적 없는 신을 찾았다.

부디 이 시간이 무사히, 빠르게 지나가게 해 달라고.

*

자정을 넘긴 늦은 밤에 시작된 진통은 해가 중천에 뜰 때가 이어졌다.

정오 무렵, 겨우 아기 문이 다 열리고 양수까지 터지자 리하르트는 산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그마저도 나가지 않겠다, 엘리사의 곁에 있겠다, 버티는 것을 사용인들이 쫓아내다시피 하여 겨우 내보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출산 막바지 준비에 접어들었다.

“아윽…!”

장시간 지속된 진통에, 엘리사는 비명을 지르느라 목이 다 쉬어 이젠 그저 흐느끼고 있었다.

온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천장에 매단 천을 붙잡은 팔에는 힘이라곤 없었다.

‘너무 아파….’

차라리 죽는 것이 덜 고통스럽겠다 싶을 정도로 끔찍한 시간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하녀들 역시 그런 엘리사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지친 엘리사의 기색을 알아챈 세틸은 엘리사의 손을 붙잡았다.

“마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의식을 잃으시면 안 돼요!”

“…….”

“자, 천천히 숨을 쉬세요. 마님께서 숨을 참으시면 아기님도 숨이 막혀요.”

아기가 숨이 막힌다는 말을 들은 엘리사는 조금 전 고통의 여파로 덜 덜 떨면서도 가까스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네, 좋아요. 천천히요. 숨을 들이 쉬면서 힘을 주세요. 아셨지요? 하나, 둘, 셋! 하면 숨을 쉬고……….”

“흐윽!”

세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번 끔찍한 고통이 엘리사를 덮쳤다.

엘리사는 감당하기 버거운 고통에 몸부림치며 입에 문 천을 악물었다.

세틸이 그런 엘리사에게 언제 숨을 쉬어라, 언제 힘을 줘라 하며 이야기하는 것 같았으나, 엘리사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냥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다 포기하고 그저 이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만 들었다.

지친 엘리사가 눈을 감는 순간, 불현듯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우리 아기는 실수가 아니라 내 소원이야.’

그와 동시에 떠올랐다.

처음 아기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그 날, 혹여 아기에게 해가 될까 제 배를 만지는 것조차 머뭇거리던 그 모습도.

아기가 처음으로 태동한 그 날,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있다가 제게 ‘고맙다’며 안아 주던 모습도.

그리고, 배 속에서 제게 인사를 건네던 그 작은 아이의 존재도.

‘우리 아기를 만나고 싶어……..’

엘리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그의 소원을, 그리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싶었다.

엘리사가 마음을 다잡은 바로 그 순간, 또 한 번 끔찍한 진통이 찾아왔다.

“아, 윽…!”

엘리사는 입에 문 천을 악물며 사력을 다해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배 위로 처진 천아래에서 출산의 진행 상황을 살피고 있던 산파가 소리쳤다.

“아기님의 머리가 보입니다, 마님!

조금만, 조금만 더 힘내세요!”

산파의 희망적인 이야기에, 곁에서 지켜보던 하녀들도 같이 주먹을 불끈 쥐며 조용히 엘리사를 응원했다.

엘리사는 또 한 번 강하게 밀려드는 고통을 느끼며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냈다.

“아으윽!”

안간힘을 내어 천을 그러잡은 그녀의 가녀린 손에서 핏기가 가시고, 힘을 다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바로 그다음 순간.

뜨겁고 묵직한 무언가가 배 속에서 쑤욱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흐에에엥! 흐에에엥……!”

처음으로 공기를 마시는 것이 힘겨운 듯, 서투른 울음소리였다.

‘드디어, 내가 아기를 낳았어…….’

그 울음소리를 듣자 마음이 놓이며 긴장이 풀어졌다.

이대로 눈을 감고 쉬고 싶을 만큼 피곤하고 고되었으나, 그보다 아기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잠시 기다리자, 세틸이 깨끗한 수건으로 감싼 아기를 엘리사의 품에 안겨 주었다.

“건강한 도련님이에요, 마님.”

가슴에 얹어진, 작지만 묵직한 체온이 느껴졌다.

엘리사는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그리고 힘겹게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막 태내에서 나온 아기는 사람보다는 말 그대로 핏덩이에 가까웠다.

피부는 양수에 절어 쪼글쪼글했고, 아직 핏기가 가시지 않아 온통 빨겠으며, 눈도 채 뜨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엘리사의 눈엔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모아 빚은 듯 어여쁘게 보였다.

‘우리 아기….’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 않았다.

조그마한 손을 움찔거리는 것도, 서투른 숨을 내쉬며 울음을 터트리는 것도.

그 존재가 어찌나 기적 같은지.

멍하니 아기를 바라보던 엘리사는 무언가 움켜쥐려는 듯 바동거리는 아기의 자그마한 손을 부드럽게 잡아 주었다.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너를 지켜 줄게.

그런 그녀의 마음이 전해지기라도한 듯, 아이가 엘리사의 손가락을 꼬옥 쥐며 울음을 뚝 멈췄다.

그 순간, 심장이 저릿해지며 울컥눈물이 차올랐다.

엘리사는 목이 멘 소리로 아이에게 첫인사를 건넸다.

“……안녕, 하네스.”

우리의 소원.

내가 낳은 기적.

사랑스러운 내 아가.

나는 너를 알기 전부터,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부터 너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구나.

너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무사히, 건강하게 태어나 줘서 고마워.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만으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벅찬 감정이 울컥차올랐다.

엘리사는 아기의 작은 머리에 입을 맞추며 생각했다.

오늘의 이 기억, 이 감정을 평생, 어쩌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