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출산 뒤 정리가 끝난 후에야 겨우 산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엘리사는 초췌한 얼굴을 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리하르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산실에 들어오기 전,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하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리하르트는 옆에 있는 세틸에게 다급히 물었다.
“엘리사는 정말 괜찮은 건가?”
“조금 지치신 것 빼고는 전부 괜찮습니다. 지금은 피곤해서 잠드신 것 뿐이고요.”
그는 세틸의 말을 듣고서야 안도하며 엘리사에게 다가갔다.
땀으로 말라붙은 그녀의 머리카락과 아직 눈가에 촉촉이 남아 있는 눈물이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짐작게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자,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리하르트는 잠든 엘리사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고생 많았어, 엘리사.”
그의 입맞춤을 느낀 것인지, 깜빡잠들었던 엘리사가 힘겹게 눈을 떴다.
리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다, 퍼석하게 마른 입술에도 가볍게 입을 맞췄다.
“무사해 줘서 고마워. 사랑해.”
엘리사는 그의 말에 대답할 힘도 없어 힘없이 웃었다.
리하르트는 두어 번 더 입을 맞추고 입술을 뗐다. 그리고 엘리사의 이불을 여며 준 후, 그녀의 가녀린 손을 감싸 쥐었다.
“더 자도 돼. 옆에 있을게.”
이대로 엘리사의 곁에서 그녀가 깰때까지 지키고 있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눈을 감지 않고 그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에 리하르트가 뒤를 돌아보자, 속싸개에 싸인 무언가를 안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산파가 보였다.
“자, 도련님. 아버지께 인사드리셔야지요.”
산파는 리하르트에게 속싸개에 싸인 아이를 안겨 주었다.
“자, 잠깐 -”
리하르트는 혹여 자신의 손길에 아이가 바스러지기라도 할까 걱정되어 아이를 안지 않으려 했으나, 산파는 이미 그에게 아이를 넘겨준 뒤였다.
리하르트는 엉겁결에 아이를 받아 안았다. 아이를 감싸 안는 어설픈그의 손길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역력히 느껴졌다.
엘리사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어머나, 이렇게 보니 도련님이 각하를 꼭 빼닮았네요. 벌써부터 이목구비가 뚜렷한 걸 보니 아주 미남이세요.”
리하르트는 산파의 너스레를 듣고서야 겨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몸은 그의 팔뚝보다도 작았고, 머리 역시 그의 주먹보다 작았다.
그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오밀조밀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 숱은 적지만 그를 닮은 흑발도 조금 나 있었다.
아이는 커다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작은 입을 연신 오물거렸다.
리하르트는 아이의 연둣빛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산파는 아이가 리하르트를 닮았다고 했으나, 아이의 연둣빛 눈만은 엘리사의 모습을 간직한 채로 태어났다.
‘이 아이가 우리 아기라고…….’
이 조그마한 아이가 엘리사의 배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 작은 손으로, 작은 발로 엘리사의 배를 통통 치며 제게 인사를 건네던 그 아이라는 사실이 경이롭고 신기했다. 동시에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아이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며칠전, 엘리사와 아이의 이름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렸다.
‘우리 아기 이름은 하네스로 지을 거야. 고대어로 ‘축복’이라는 뜻이래. 어때?’
원작에선 엘리사 홀로 지어 준 이름이었지만, 이번 생에선 아빠인 리하르트의 동의하에 함께 지어 주게 된 이름이었다.
리하르트는 그녀와 자신에게 찾아온 축복 같은 아이에게 꼭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안녕, 하네스, 아빠야.”
‘아빠’라며 스스로를 지칭하는 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는 아빠의 부름에 대답하듯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을 보자, 이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이 와닿았다.
리하르트는 그런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보듬어 안았다.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 날이었다.
하네스가 태어나고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리하르트는 내내 엘리사의 곁에 머무르며 그녀의 몸조리를 도왔고, 그 덕에 엘리사는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몸을 회복했다.
그리고 그 한 달 동안 하네스는 엄마 아빠는 물론, 공작저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 제법 오동통해졌다.
엘리사는 온종일 그런 하네스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잘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 하네스 방에서 잘까?”
잠들기 전, 아이의 방에서 떠나기 싫어하던 엘리사가 리하르트에게 물었다.
아직 어린 하네스는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했다. 새벽에도 몇 시간주기로 깨서 젖을 먹어야 했다.
몇몇 귀부인들은 젖유모를 따로 두고 편히 자기도 했지만, 엘리사는 하네스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하네스를 침실로 데려가자니, 같이 잠을 자지 못할 리하르트가 신경 쓰였다.
그래서 고민 끝에 생각한 방법이었으나, 엘리사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리하르트에겐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그럼 하네스를 침실로 데려가자.”
두 사람은 하네스를 침실로 데려왔다.
“하네스, 여기가 엄마랑 아빠가 자는 방이야. 오늘부터 우리 여기서 같이 잘 거야.”
엘리사의 품에 안긴 하네스는 엘리 사의 설명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조그마한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무어라 대답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엘리사는 그런 하네스를 꿀이 떨어질 듯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웃었다.
“오구, 우리 아가. 엄마한테 대답한 거예요?”
엘리사가 웃자, 덩달아 하네스도 방거리며 웃었다.
한참 엘리사를 바라보며 손을 바동거리던 하네스는 갑자기 엘리사의 잠옷을 쭙쭙 빨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단번에 그 행동의 의미를 눈치챘다.
“하네스, 배고파?”
아이는 엄마에게서 나는 젖내를 맡고 배가 고파진 것이다.
엘리사는 곧장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한 달 새 모유를 수유하는 그녀의 모습이 많이 능숙해져 있었다.
엘리사는 제 품에 안겨 편안히 젖을 먹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그맣지만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 감도, 아직은 서투르기만 한 숨소리도, 저도 살겠다고 정신없이 젖을 빠는 소리도 그저 사랑스러웠다.
이 조그마한 손에 제 남은 인생이 오롯이 맡겨졌으나, 그마저도 기꺼울 정도로,
“잘 먹네.”
엘리사의 곁에서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하네스의 오동통한 뺨을 검지로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자 허공을 허우적거리던 하네 스의 작은 손이 리하르트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식사를 방해하는 아빠의 손가락이 매우 거슬린다는 듯이.
조그마한 아귀힘이 제법 셌다.
그 모습을 놀란 듯 바라보던 엘리 사와 리하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양껏 배를 채운 하네스가 입을 뗐다.
“내가 소화시킬게.”
리하르트는 옷차림을 수습하는 엘리사를 대신해 하네스를 안아 들었다.
유모와 엘리사가 하네스를 트림시키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주로 그의 몫이었다.
리하르트는 하네스를 안아 들고 침실을 거닐며 아이의 작은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옷차림을 수습한 엘리사는 두 부자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아빠 품이 편해졌나 보네.’
하네스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얌전히 있었다.
아이를 안은 리하르트도, 그에게 안긴 하네스도 처음에 비해 많이 자연스러워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엘리사가 안심한 순간, 멀뚱히 있던 하네스가 먹었던 우유를 토해 냈다.
위장 근육이 약한 신생아들에겐 빈 번히 있는 일이었다.
엘리사는 손수건을 들고 다가가 리하르트의 어깨에 묻은 우유를 닦아냈다.
“내가 안고 있을 테니까 옷 갈아입고 와.”
“그래야겠네.”
리하르트가 하네스를 엘리사에게 안겨 주려던 바로 그때였다.
손을 바동거리던 하네스가 리하르트의 머리카락을 꽉 집어 당겼다.
“윽!”
“하, 하네스!”
당황한 엘리사가 하네스의 손을 붙잡았으나, 스스로 손을 제어하지 못하는 하네스는 머리카락을 놓지 못했다.
그러다 뭔가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울음을 터트렸다.
“으에에엥!”
난데없이 아들에게 머리채를 잡힌 리하르트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머리채를 잡힌 건 난데 왜 네가 우는 거냐…….’
하네스는 엘리사의 도움을 받아 겨우 손을 폈으나, 이미 그 자그마한 손에 리하르트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힌 뒤였다.
엘리사가 하네스를 어르는 동안, 리하르트는 옷을 갈아입고 침실로 돌아왔다.
하네스는 이미 엘리사의 품에 안긴 채 잠들어 있었으나, 엘리사는 하네 스가 깊이 잠들었음에도 하네스를 내려놓지 못했다. 아이를 잠시도 떼어 놓기 싫은 마음이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아기가 태어나면 남편은 뒷전이 된다더니….’
유치한 감정인 걸 잘 알면서도 서 운했다.
엘리사가 하네스와 같이 자기 위해 자신과 다른 방을 쓰겠다며 선뜻 이야기를 꺼낸 것도, 아이가 잠든 동안에도 제게 집중하긴커녕 아이에게만 관심을 쏟는 것도.
리하르트는 침대에 앉아 있는 엘리 사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그 인기척을 느낀 엘리사가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리하르트, 머리는 괜찮”
그 순간, 불시에 다가온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놀란 엘리사가 흠칫 놀라며 물러서 자, 더 가까이 다가오려던 그가 멈춰 섰다.
엘리사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마주한 그의 표정이 묘하게 심통이 나 있었다.
“리하르트, 혹시 삐졌어?”
“응.”
마음은 토라졌어도 말로는 아니라고 할 줄 알았는데, 리하르트는 의외로 순순히 인정했다.
“왜?”
선뜻 인정한 것과 달리, 그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다 엘리사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맞대며 대답했다.
“…네가 하네스만 좋아해서.”
솔직한 그의 대답이 귀여워서, 리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그래서 하네스가 미워?”
“아니, 사랑하지.”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품에 안겨 잠든 하네스의 통통한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대답했다.
자신과 그녀의 사랑의 결실인 이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리가.
“하지만 그 마음과는 별개로 널 독차지하고 싶어.”
“키스해 주면 마음이 풀려?”
“난 마음이 필요해.”
그의 단호한 대답에 엘리사는 피식 웃었다.
금방이라도 저를 집어삼킬 듯 욕망이 일렁이는 눈을 하고 있으면서, 말로는 마음이 필요하다니.
하지만 우선은 그의 마음을 풀어주어야 했다.
“리하르트, 나도 물론 너랑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지만 하네스는 아직 어린걸.”
“…….”
“하네스를 보면 네 어린 시절이 생각나.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해 주고 싶어.”
“…….”
“하네스가 조금 더 자랄 때까지만 기다려 주면 안 될까?”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 리하르트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엘리사는 그런 그의 모습에 씩 웃고는, 잠든 하네스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의 뺨을 감싸쥐며 속삭였다.
“그럼 이제 키스는 필요 없어?”
지금은 독차지해도 될 것 같은데.
엘리사는 얼떨떨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입술에 먼저 입을 맞췄다.
쪽.
그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리하르트는 놀란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엘리사의 눈빛이 몹시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그의 눈빛이 돌변했다.
“방금 건 키스가 아니잖아.”
이윽고 다가온 그의 입술이 엘리사를 집어삼켰다.
모처럼 만에 리하르트와 달콤한 장 난을 치던 엘리사는 평소보다 일찍이 잠들었다.
리하르트는 잠든 엘리사와 두 사람 사이에 잠든 하네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그녀와 자신을 닮은 아이.
나란히 잠든 두 사람을 보자,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이 새삼 와닿았다.
제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가 둘이나 더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잘 자, 엘리사. 하네스.”
리하르트는 나직이 속삭이며 엘리 사와 하네스를 덮은 이불을 여며 주었다.
그리고 저도 잠들 생각으로 눈을 감으려던 그때, 고요한 방에 노크소리가 울렸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이 시간에 사용인이 침실로 찾아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찾아온 걸 보니, 짐작 가는 바가 하나 있었다.
리하르트는 조심스레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조용히 문을 열자, 얼마 전에 은밀하게 임무를 맡았던 아가일이 서 있었다.
“각하께서 명하신 대로 펠리스 후작에 대한 정보를 모아 왔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낯익은 이름에, 리하르트의 눈빛이 서늘하게 침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