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11화 (111/164)

111화

연말을 앞두고 신전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신전에서 연말을 맞이하여 가난한 백성들에게 연말을 즐길 수 있는 따뜻한 빵과 수프,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쿠키 등 음식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연말 음식은 선착순이었지만, 올해는 모두에게 나눠줄 수 있었다.

엘리사가 루벨린의 이름으로 신전에 기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점차 기부금이 는 덕이었다.

그러다 엘리사가 세리어트의 후계 자가 되자, 권력의 흐름을 느낀 귀족들이 더욱더 거리낌 없이 기부를 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음식을 받으러 온 백성들은 물론이고, 기부하려는 귀족들까지 신전 방문객이 더욱 늘어나 에이든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그는 혼자 남을 리온에게 미안해하며 리온이 먹을 간식들을 챙겨 주었다.

“놀아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리온.”

“갠차나여!”

연말에 일손이 부족해 머리가 좀 큰 아이들은 모두 일을 거들어야 했기에, 리온과 놀아 줄 또래 아이가 없었다.

하지만 리온은 괜찮다며 자리를 비우는 에이든에게 손을 흔들었다.

에이든이 챙겨 준 간식들을 반쯤 먹은 리온은 별관 밖으로 나왔다.

지난밤에 내린 눈이 곳곳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리온은 화단으로 향했다.

겨울이 되어 황량해진 화단에 아이의 손보다 조금 큰 크기의 눈사람 3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리온이 오늘 아침부터 만들던 것이었다.

“이고는 엄마, 이고는 나, 이고는 성하. 그리고……….”

리온은 이다음에 만들 눈사람들을 떠올렸다.

저를 이곳에 데려다준 사람.

엄마 같은 느낌이 드는 그 사람.

“우웅, 누나 보고 십따.”

엘리사가 출산한 이후, 리온은 한번도 엘리사를 만나지 못했다.

아기가 태어난 직후엔 외부인과의 접촉이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에이든조차도 하네스가 태어난 그날만 하네스와 엘리사를 만나고 돌아왔다.

리온은 엘리사를 만나고 싶은 마음을 담아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장갑을 낀 손이 차가웠지만 개의치 않았다.

막 두 번째 눈 뭉치를 완성한 그 때였다.

“리온.”

지금 만들고 있는 눈사람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그리웠던 그 얼굴이 서 있었다.

리온은 반색을 내비치며 엘리사에게 달려갔다.

“누나!”

“그동안 잘 지냈어?”

“응!”

“그새 많이 컸네. 좀 있으면 누나보다 더 크겠는데?”

“빵도 마니 먹고 고기두 마니 먹어 써. 그래서 쑥쑥 커써!”

“오구, 잘했어. 장하다.”

엘리사는 발갛게 언 리온의 뺨을 어루만지며 반가움을 표했다. 콧물이 삐죽 나온 얼굴조차 귀여웠다.

엘리사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히죽거리던 리온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언제나 엘리사와 함께 있던 리하르트가 있었다. 두꺼운 담요 뭉텅이를 품에 안고서.

리온은 담요 뭉텅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조씨, 이고 모야? 빵이야?”

‘빵’으로 추정되는 담요 뭉텅이를 바라보는 리온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에 엘리사와 리하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번에 응가냐고 묻더니, 오늘은 빵이야?”

“응?”

리온은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엘리사의 배를 보고 무언가를 눈치챈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누나 날씬해져써!”

“맞아. 누나 배 속에 누가 있었는지 기억나?”

“아가?”

“우으아!”

그때, 리하르트가 안고 있던 담요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담요 밑자락이 파닥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리온의 눈이 놀라 커지더니, 이내 신이 나서 방방거리기 시작했다.

“나두! 나두 아가 볼래! 아가 보여 죠!”

“여긴 추우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꼬맹이.”

리하르트와 엘리사는 리온과 함께 별관 안으로 들어왔다.

리온은 리하르트의 주위를 빙빙 맴돌며 리하르트가 아기를 내려놓길 기다렸다.

리하르트는 그런 리온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담요를 벗겼다.

그러자 아기띠 밖으로 튀어나온 짧은 다리가 보였다.

“오옹!”

하네스 역시 리온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듯, 무발목의 통통한 다리를 파닥거리며 리하르트를 채근했다.

리하르트는 아기띠를 벗어 의자에 앉은 엘리사에게 안겨 주었다.

“자, 하네스, 형이랑 인사해.”

“으에?”

작은 팔다리를 파닥거리며 낯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하네스는 엘리사의 옆에서 눈을 반짝이며 저를 바라보고 있는 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엘리사는 하네스의 작은 손을 붙잡고 하네스 입장에서 리온에게 하네 스를 소개했다.

“안녕, 형아. 나는 하네스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우리 앞으로 잘 지내요.”

“엥에.”

“하네스, 여기는 리온 형이야. 네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형이 널 많이 보고 싶어 했어.”

“오옹.”

엘리사가 하네스에게 리온을 소개하자, 하네스는 리온에게 인사하듯 고사리 같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정작 하네스를 보고 싶어했던 리온은 그런 하네스를 멍하니바라보기만 했다.

곱슬기가 있는 부드러운 흑발과 그에 대조되는 우윳빛의 통통한 뺨.

연둣빛 커다란 눈망울과 방긋거리는 작은 입.

파닥파닥 분주히 움직이는 고사리 같은 작은 손과 소시지처럼 포동포동한 팔다리.

‘귀엽다….’

태어나 이렇게 사랑스러운 생명체는 처음 보았다.

신전을 방문했던 다른 아이들보다도, 연말 선물로 에이든에게 받은 곰 인형보다도 훨씬 귀여웠다.

하지만 차마 하네스를 만지지는 못한 채 얼어붙었다.

그런 리온의 반응을 지켜보던 엘리 사가 미소 띤 얼굴로 슬그머니 물었다.

“리온. 아가는 형이랑 인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손 안 잡아 줄거야?”

“으에엥!”

눈앞의 리온이 잡힐 듯 말 듯 잡히지 않자, 심통이 난 하네스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던 리온은 하네스의 울음에 다급히 하네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하네스의 조그마한 손이 리온의 손을 꽉 잡았다. 그 손길이 제법 다부졌다.

마침내 원하던 것을 손에 쥔 하네 스가 방긋 웃었다.

“꺄우!”

“오구, 우리 아들. 형이랑 인사하니까 기분 좋아요?”

“따아!”

하네스가 리온을 향해 방방 웃자, 그런 하네스를 바라보는 리온의 얼굴에도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귀여운 애들 둘이 같이 있으니까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귀여워…….’

엘리사는 그런 두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한 엄마 미소를 지었다.

원작 남주와 서브 남주가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아가 손이 너무 쪼꼬매.”

하네스에게 잡힌 손을 온전히 내어준 채 알 수 없는 옹알이를 듣고 있던 리온이 속삭였다.

엘리사는 저도 작은 주제에 더 작은 아기를 작다며 귀여워하는 리온이 모습이 귀여웠으나, 형으로서 리온의 위엄을 살려 주기 위해 조용히 있었다.

리온은 하네스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뻗었다.

남녀노소 만지지 않고는 못 배길 마성의 통통한 뺨으로, 포동포동 여린 피부를 만지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아이, 예뿌다.”

하네스는 저를 예뻐하는 리온의 마음을 아는 듯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리온은 그런 하네스의 반응에 배시시 웃으며 속살거렸다.

“아프로 형아가 잘 놀아 주께.”

“아우! 에에!”

“안아도 주고 마는 것두 주께.”

“우으으!”

하네스는 리온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옹알이로 열렬히 반응했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혹여나 두 아이의 진지한 대화 분위기를 깰까 웃음을 꾹 참았다.

“그리구 형아가 따뜻하게 해 주께!”

“오옹.”

리온은 불씨가 거의 꺼진 벽난로로 다가가 불을 지폈다.

리하르트는 바람을 일으켜 리온을 도와줄까 했으나, 이제 리온은 그의 도움 없이도 능숙하게 불을 붙였다.

그 모습을 본 리하르트는 불을 붙이고 다시 하네스의 곁으로 돌아온 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잘했어, 꼬맹이.”

“히히.”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에이든이 방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바쁘신 거 뻔히 알면서 찾아온 건 저희인데요. 잠깐 신년인사만 드리려고 온 거니까 괘념치 마세요.”

엘리사는 다가오는 에이든에게 하네스를 안겨 주었다.

“하네스, 할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

“으우우.”

“그사이에 많이 컸구나, 하네스, 좀 있으면 아빠보다도 크겠어.”

신전에서 많은 아이들을 봐 온 에이든은 하네스와 두 번째 만남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이를 다루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에게 안긴 하네스 역시 편안해 보였다.

에이든은 하네스의 자그마한 손을 만지작거리며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며칠 전에 세리어트 저택에 갔었다는 얘길 들었다.”

“네. 이제 본격적으로 세리어트 영지의 업무도 돌보려고요.”

“아직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서두를 필요는 없단다.”

“집에만 있는 게 지루하기도 하고, 바깥바람도 씰 겸 들르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이제 네게 정식으로 가주의자리를 물려주어야겠구나.”

에이든의 말에 엘리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만간 가주의 자리를 받게 될 것이란 것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가주가 된다고 생각하자 감회가 새로웠다.

에이든은 엘리사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준비됐니?”

잠시 얼떨떨해하던 엘리사는 이내 결심이 선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든은 그런 엘리사의 대답에 흡족해했지만, 금세 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황제는 너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갖은 방법을 쓸 거다.”

“그에 대한 각오는 후계자의 자리를 받은 그때부터 이미 되어 있었어요.”

엘리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자가 두 번 다시는 우리 가문을, 그리고 제 사람들을 해치도록 두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그렇게 말하는 엘리사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