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그날 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공작저의 사용인들과 함께한 연말 연회를 마치고 침실로 올라왔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낮엔 할아버지랑 리온 형을 만나 랴, 저녁엔 연회에 참석하랴 고된 일정에 지친 하네스는 리하르트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었다.
“좋은 꿈 꾸렴, 하네스.”
리하르트는 침실에 마련된 요람에 하네스를 눕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엘리 사는 무심코 창밖을 돌아보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녁부터 구름이 많다 했더니, 창 밖으로 새하얀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리하르트, 눈이 와.”
평균적으로 기온이 온화한 편인 아카로아에 눈이 잘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루벨린에서는 겨울마다. 지겹게 보던 눈이건만, 감회가 새롭게 느껴졌다.
엘리사는 창문 밖으로 손을 뻗었다.
큼직한 눈송이가 그녀의 손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올해의 마지막 눈이네.”
“새해의 첫눈이기도 하고.”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말을 받아치며 자신이 덮고 있는 담요 안으로 그녀를 끌어들였다.
창문으로 새어드는 찬 기운에 엘리 사가 감기라도 걸릴까 염려가 되었다.
엘리사는 그런 리하르트에게 안긴 채 그를 슬그머니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시선을 느낀 그가 눈을 맞춰 왔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리하르트와 서먹서먹했었는데.’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어색할 정도로,다정한 그의 눈을 마주하자, 문득 지난날 그의 모습들이 겹쳐졌다.
어릴 적, 겉으론 까칠하게 굴면서도 내심 저를 챙겨 주던 그 소년.
전쟁에서 돌아온 이후 어딘가 공허한 냉기를 품고 있던, 그러나 어릴 적 그 마음 그대로 저를 챙겨 주던 그 남자.
그땐 루벨린을 떠날 거라 생각했었다.
그의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될 줄도,
‘이제, 매해의 첫눈과 마지막 눈을 이 남자와 보게 되겠지.’
지난날보다 길게 남겨진, 너와 함께 할 미래의 그 날들이 나는 너무 기대돼.
“고마워, 리하르트. 네 덕분에 나는 작년보다 올해 더 행복해졌어.”
엘리사의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깜빡이던 리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콩맞대며 속삭였다.
“내년엔 더 행복하게 해 줄게.”
진심을 담은 약속이었다.
마주한 그의 눈에서 진심을 읽은 엘리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웃었다.
그런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던 리하르트의 눈빛이 이내 그녀를 삼킬듯 돌변하여 다가왔다.
두 입술이 겹쳐지려던 그 순간.
리하르트가 미간을 설핏 찡그리며 멈칫했다.
엘리사와 함께 지내면서부터 사라졌던 통증이 미미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리하르트?”
그 기색을 느낀 엘리사가 의아해하며 그의 뺨을 어루만지자, 다행히 금세 통증이 사라졌다.
리하르트는 재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직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엘리사에게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엘리사가 의심을 가지기 전에 키스하려던 그때, 고요한 방에 쭙쭙거리는 물기 어린 마찰음이 울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 입을 맞추지도 않은 상태였다.
둘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요람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잠에서 깬하네스가 제 손을 쭙쭙 빨고 있었다.
“흐에에.”
두 발과 남은 손을 파닥거리는 걸보니 혼자서 신이 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둘이 아닌 셋이란 사실에 익숙해져야 할 때였다.
다음 날, 황궁에서 신년을 맞이하여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황제의 축사 후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되자, 귀족들은 와인 잔을 하나씩 들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안은 와인 잔을 기울여 목을 축이며 여느 때처럼 리하르트를 주시했다.
리하르트 주위의 뭇 귀부인들과 귀족 영애들이 그를 보며 얼굴을 붉혔으나, 리하르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서늘한 눈으로 엘리사의 주위를 경계하고 있을 뿐이었다.
‘재수 없는 새끼.’
세상 혼자 사는 듯 저 혼자 잘난 얼굴을 가지고 뭇 여성들의 환심을 다 받고 있으면서, 그런 것들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그 모습을 보자 심기가 뒤틀렸다.
“뭐 해? 잔이 비었는데.”
크리스티안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지나가는 하녀에게 와인을 요구했다.
하녀는 황급히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크리스티안이 목을 축이는데,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왜 저렇게 부인을 감싸고도는지 알겠군.”
“누구 말인가?”
“공작 부인 말이야. 임신했을 때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이렇게 보니 작고 가녀린 것이, 뭇 사내들의 눈길을 끄는군.”
“자네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 저 오밀조밀한 얼굴은 또 어떻고.”
“자네들 말을 듣고 보니, 출산 후에 어째 더 물이 오른 것 같네.”
“홍등가 계집들이랑은 달라. 아주 사람을 홀리는……. 내 여자였으면 몇 날 며칠을 안 내보낼 텐데.”
“자네는 요즘 오줌발도 약해졌잖나.”
현재 아렌시아에서 공작 부인으로 불릴 사람은 엘리사뿐이었다.
크리스티안은 귀족들의 저급한 대화를 들으며 혀를 찼다.
‘쯧, 오르지 못할 나무나 바라보는 한심한 놈들 같으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자연히 리하르트의 옆에 있는 엘리 사에게로 향했다.
남자들이 입 모아 탐내는 여자가 얼마나 예쁜지 호기심이 일었다.
‘뭐, 예쁘긴 하네.’
그동안 엘리사를 그저 꼴 보기 싫은 리하르트의 부인으로만 생각해 왔던 크리스티안은 새삼 엘리사를 보고 감탄했다.
귀족들의 말대로 출산한 엘리사는 청순한 얼굴과 몸에 성숙한 매력이 가미되어 미모에 물이 오른 느낌이 들었다.
몸매는 물론이고, 얼굴에서도.
그런 엘리사를 바라보고 있자, 애먼 목이 탔다. 갈증이 났다.
크리스티안은 와인을 마시면서도 엘리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계집이면……….’
엘리사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엘리사 옆에서 그녀에게 접근하려는 남자들을 살기등등한 눈으로 몰아내는 리하르트에게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는 크리스티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
밤이 깊어가자,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하녀 샐리, 앤 함께 잠시 바람을 씰 겸 나왔었던 엘리사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됐으니 저택으로 돌아가자고 해야겠다.’
본디 연회를 즐기는 성격이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 하네스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발걸음을 재촉하여 연회장 앞 복도에 도착했을 때였다.
“루벨린 공작 부인.”
엘리사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반갑지 않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크리스티안이었다.
엘리사는 꼬투리 잡히지 않고 지나갈 요량으로 예의상 새해 인사를 건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신년에도 제국에 영광이 가득하기를.”
“공작가에도 여신의 축복이 내리기를.”
“그럼….”
목례를 하고 지나가려는데, 크리스티안이 슬그머니 엘리사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 시간 괜찮나?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송구하오나, 남편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서요.”
엘리사는 면전에 대고 딱 잘라 거절했다.
황태자가 아니라 여느 귀족의 제안이라도 단칼에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은, 그만큼 일이 급하고 바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대개는 면전에서 단칼에 거절당하면 곧장 이해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공작이 어린애도 아니고 이야기할 시간 정도는 낼 수 있지 않나. 공작이 엄마 젖 먹을 나이는 지난 거 같은데. 안 그래?”
“…….”
“발코니는 바람이 차니 추울 것 같고, 근처 방으로 잠깐 들어가지.”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귀족들이 크리스티안과 엘리사의 모습을 흘금거리며 지나갔다.
그 시선을 느낀 엘리사는 결국 마지못해 크리스티안을 따랐다.
루벨린과 황실이 공공연한 적대 관계임은 제국의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리스티안과 실랑이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뒤를 샐리와 앤, 그리고 크리스티안을 따라온 시종둘이 따랐다.
‘앤이랑 샐리가 동행하니, 큰 문제는 없겠지.’
크리스티안은 연회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방 앞에서 멈춰 섰다.
‘이쯤이면 조용하겠군.’
물론, 공작 부인씩이나 되는 여자를 강압적으로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없었다.
그저 부제와 레이모어에게 들은 이야기로 그녀에게 회유를 가장한 협박을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대화를 하면서 가벼운 터치 정도는 할 수 있을 테고, 운이 좋다면 그녀를 제 뜻대로 할 수도 있을 터였다.
크리스티안은 방문을 열며 하녀들과 시종들에게 말했다.
“부인과 긴히 나누어야 할 이야기니,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려라.”
그의 말에 앤과 샐리의 눈빛이 당황하여 흔들렸다.
공작저가 아닌 곳에서 귀부인이 외간 남자와 단둘이서 방에서 독대를 한다니. 위험한 일이었다.
엘리사 역시 예상치 못한 크리스티안의 행동에 당황했다.
“전하, 외간 남녀가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남들 보기에도 좋지 않을 것 같네요. 차라리 발코니에서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떠실까요?”
“어딜 가지?”
크리스티안은 발코니로 향하려는 엘리사의 손목을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그에 엘리사의 미간이 고통으로 설핏 일그러졌다.
엘리사는 크리스티안의 손을 뿌리 치려 했으나, 제아무리 귀하게 자란 황태자여도 남자는 남자였다. 힘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 손, 놓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거참, 앙탈하고는. 내가 설마 공작부인을 어떻게 할 거 같나?”
크리스티안이 이죽거리며 엘리사의 손목을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그는 엘리사가 더욱 앙탈을 부릴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의 생각은 깔끔하게 빗나갔다.
“아뇨, 그게 아니라……….”
엘리사는 반대쪽 손으로 크리스티안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전하를 ‘어떻게 할 것 같아서요.”
엘리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온 물의 기운이 크리스티안의 손을 미약하게 얼렸다.
“큭! 이런, 미친……!”
크리스티안이 반대쪽 손으로 달아나려는 엘리사의 손목을 다시 붙잡은 그때였다.
옆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크리스티안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서리가 맺힌 듯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놓으시죠, 그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