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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14화 (114/164)

114화

엘리사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크리스티안은 엘리사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는 듯 느긋하게 웃으며 찻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자신의 연인이 되면 얻을 수 있는 이점들을 피력했다.

“내가 그대에게서 후사를 보면, 황가와 루벨린은 정말 형제가 되는 거지. 세리어트와의 관계도 호전되는 거고.”

“갑자기 그게 무슨-”

“아, 그대가 세리어트 후계자도 낳으면 세리어트와도 형제가 되는 건가.”

“…….”

“아무튼, 이 기회에 부모님 세대의 케케묵은 악연도 청산할 수 있고.”

당연히 엘리사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확신하는 듯 자신만만한 어투였다.

엘리사는 기가 막혔다.

‘드디어 미쳤나?’

그는 지금 제게서 황손을 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말만 하면 아이가 뚝딱 생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게다가 율리아가 반역자로 모함당해 죽은 것을 그저 ‘케케묵은 악연’정도로만 치부했다.

기가 막힌 헛소리를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하니, 무슨 반박을 해도 듣지 않을 것 같아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그사이, 크리스티안은 계속해서 제할 말만 늘어놓았다.

“그리고 생각해 봤는데… 어릴 적부터 공작이 영 껄끄러웠던 이유가 아무래도 그대 때문이었나 봐.

그대를 차지한 그자가 영 못마땅했던 거지.”

그 말과 동시에 엘리사를 바라보는 크리스티안의 눈빛이 진득해졌다.

돌변한 그의 눈빛에 엘리사가 소름이 돋을 정도의 두려움과 혐오감을 느끼던 그때였다.

“흐에에엥!”

얌전히 엘리사의 품에 안겨 크리스티안의 얼굴을 멀뚱히 보고 있던 하네스가 때마침 울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에 크리스티안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할 말을 잃고 혐오스럽다는 눈빛으로 크리스티안을 보고 있던 엘리사는 그 기회를 틈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가 배가 고픈 것 같아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내 이야기에 대한 대답은?”

엘리사는 대답을 요구하는 크리스티안을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전하께서 하신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뭐?”

“배웅은 힘들 듯하니, 살펴 가시길.”

엘리사는 울며 보채는 하네스의 등을 토닥이며 돌아섰다.

집주인이 손님을 배웅하지 않는 건 대단한 무례였으나, 무례를 넘어 무식한 소리를 하는 크리스티안에게 예의를 차려 줄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런 엘리사의 태도에 크리스티안의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시건방진 여자가 감히 황태자의 호감을 거절해?’

여자에게 거절을 당한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것도 면전에서, 대놓고 무례한건 더욱더.

“아직 내 말 안 끝났는데.”

크리스티안은 접견실을 나서려는 엘리사의 팔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엘리사의 몸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에, 그녀의 품에 안긴 하네스가 숨이 넘어갈 듯 울어 젖혔다.

엘리사는 하네스를 보호하듯 감싸안았다.

그리고 크리스티안을 향한 적개심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그를 쏘아보았다.

“레이디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남을 모르시나요?

아무리 전하라 해도 번번이 이런 식의 무례를 범하시는 건 참을 수 없군요. 톰슨-”

엘리사가 문 앞에서 대기 중일 톰슨을 부르려는데, 크리스티안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엘리사의 말을 막았다.

“그런 당돌한 모습이 그대의 매력이지. 하지만 내 말을 거역하면 후회할 텐데…….”

엘리사는 톰슨을 부르려던 것을 멈추고 미심쩍은 눈으로 크리스티안을 바라보았다.

크리스티안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반역자의 자식인 그대를 세리어트의 가주로 인정할 생각이 없으시거든.”

4대 가문은 아렌시아의 건국 당시맺은 ‘형제의 맹약에 따라 반역을 일으켜도 일가가 멸문당하진 않았다.

하지만 반역에 가담한 당사자는 다른 반역자들과 마찬가지로 극형에 처해졌고, 그의 직계 후손은 작위를 박탈당하여 가문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가주를 잃은 가문은 방계에게 넘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 법대로라면 엘리사는 반역자인 율리아의 딸이니, 가주가 될 수 없었다.

크리스티안은 음습한 눈빛으로 엘리사의 몸을 훑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그대가 황가의 후손을 낳아 준다면 폐하께서도 그대와 세리 어트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지 않겠어? 손주의 외가인데, 아무렴.”

크리스티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닫혀 있던 문이 철컥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접견실로 들어섰다.

“고, 공작?”

그 얼굴을 본 크리스티안은 물론 엘리사 역시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기를 내뿜는 리하르트였다. 그에게서 검은 오라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크리스티안은 그 살벌한 기운에 흠칫 몸을 움츠렸다가, 그런 제 모습을 숨기려 외려 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공은 예의를 모르나? 아무리 아내라 해도, 손님을 대면하고 있을 때는 노크를…… 커헉!”

크리스티안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온 리하르트의 주먹이 크리스티안의 배를 때렸기 때문에.

크리스티안은 그의 공격을 버텨 내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에 놀란 엘리사는 황급히 하네스를 품에 안아 시야를 가렸다.

크리스티안은 가공할 만한 타격에 순간적으로 숨을 쉬지 못하고 헐떡거리다, 리하르트를 노려보며 눈을 번득였다.

“허억, 허억……. 이, 이게 미쳤나!

감히 황태자인 나를 쳐?”

“…….”

“영웅이라고 오냐오냐 떠받들어 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본데, 오늘 일을 폐하께 가서 말하면……!”

리하르트는 크리스티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크리스티안을 한 대 더 치려는 순간, 옆에서 작고 어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아?”

진정하고 울음을 그친 하네스가 그제야 리하르트를 알아보고 고사리 같은 손을 휘적거렸다.

엘리사를 닮은 연둣빛의 커다란 눈과 눈이 마주친 리하르트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친 하네스는 아직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향해 웃었다.

“아브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잡고 있던 크리스티안의 멱살을 패대기치듯 놓았다.

하지만 엘리사를 함부로 대하고, 하네스를 울린 장본인을 곱게 용서해 줄 생각은 없었다.

리하르트는 싸늘한 목소리로 짓씹듯 말했다.

“가서 말해. 눈이 돌아가서 남편있는 여자한테 껄떡대다 맞았다고.”

“이, 이 건방진………!”

“정신 똑바로 박힌 부모라면 부끄러운 줄 알겠지.”

설령 황제가 제 아들이 맞았다는 걸 알고 분개하더라도, 리하르트에게 책임을 묻진 못할 것이다.

그러려면 크리스티안이 리하르트에게 난데없이 왜 맞아야 했는지 설명해야 할 테니까.

크리스티안은 씩씩거리면서도 리하르트의 살기에 눌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와 하네스를 감싸 안고 그대로 접견실을 나가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크리스티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공작부인. 난 저 포악한 놈이랑은 달라.

내가 겉으론 나쁜 남자 같아도 침실에선 꽤 신사적인 남자라고?”

엘리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비웃고는, 크리스티안에게 다가서려는 리하르트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크리스티안에게 다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전하께선 수많은 여성들을 만나시고도 아직 모르시나 봐요?”

크리스티안은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하지만 그 얼굴과 달리, 그 예쁜 입술에선 그의 감상을 깨 버리는 말이 흘러나왔다.

“침실에서도 신사적이기만 한 남자는 매력 없답니다.”

자신을 그저 아이를 낳는 도구로 취급하며 자신을 모욕한 크리스티안에게, 똑같이 모욕적인 말을 갚아준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웃고 있던 엘리사의 눈이 이내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눈으로 돌변했다.

엘리사는 얼빠진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크리스티안을 흘겨보고는, 다시 리하르트의 곁으로 돌아갔다.

‘저 여자가…!’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크리스티안의 얼굴이 한 박자 늦게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대로 엘리사를 보내면 자신은 그녀에게 구애했다가 차인 것이 된다.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크리스티안은 접견실을 나서는 엘리사의 등에 대고 다급히 소리쳤다.

“나라고 그대가 좋아서 찾아온 줄 아나? 혹시라도 착각하지 마. 그저 그대가 가진 그 힘이 탐났던 것뿐이니까!”

엘리사는 접견실을 나서며 크리스티안을 슬쩍 돌아보았다.

크리스티안의 눈엔 그 모습마저 예뻤다.

하지만 저가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마뜩잖았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그녀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자신이 조금도 아쉽지 않다는 것을 피력하기로 했다.

“그대보다 예쁜 계집은 세상천지에”

그러나 크리스티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접견실의 문이 달칵 닫혔다.

그와 동시에 크리스티안의 얼굴이 모욕감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저, 저 시건방진!”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그들을 쫓아 나가지 못했다.

그들을 쫓아가 소리쳤다간, 이곳에서 있었던 치욕스러운 일을 밖에서 대기 중인 자신의 기사들에게 들킬테니까.

“가만 안 둬…….”

크리스티안은 닫힌 문을 보며 이를 으드득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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