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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15화 (115/164)

115화

며칠 후, 엘리사는 모처럼 신전을 찾았다.

그동안 몸조리를 하느라 중단했었던 에이든과의 신성력 수련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별관 옆 정화의 샘이 있는 곳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그럼 시작할게요.”

엘리사는 샘으로 다가가 손바닥을 얹었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이윽고 그녀의 손바닥에서 새어 나온 물이 샘을 중심으로 얇은 방어막을 형성했다.

어느 정도 만들어지다 무너지던 예전과 달리, 이번엔 아직 모양새가 엉성하긴 해도 방어막의 형태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이든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새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짬짬이 시간 날 때마다 연습했거든요. 늦게 힘을 다루기 시작했으니까,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아서요.”

“아직 몸도 성치 않아서 쉽지 않았을 텐데 고생 많았구나.”

그의 칭찬에 엘리사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그에게 물었다.

“이제 조만간 리하르트의 기운을 정화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엘리사가 혼자서 틈틈이 힘을 다루는 법을 연습한 이유는 당연히 그 때문이었다.

리하르트가 더 이상 통증을 느낀 적도, 케인의 습격 이후 그 힘을 사용한 적도 없지만, 엘리사는 그 검은 기운이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이 내내 찜찜했다.

어서 그를 그 위험한 기운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그런 엘리사의 바람과 달리, 에이 든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니, 아직은 안 된다. 위험해.”

“위험하다니요? 리하르트가요?”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든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엘리사의 표정을 보고서야 엘리사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 부분에 대해선 설명을 안했었나 보구나.”

에이든은 구멍이 생기도록 왼손을 동그랗게 말았다.

흡사 원통과 같은 모양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배수관에 물이 흐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에이든은 왼손이 만든 구멍 사이로 오른손에서 나온 물줄기를 흘려보냈다.

약한 물줄기가 손가락 사이를 통과해 샘으로 쪼르륵 떨어지기 시작했다.

“통과하는 물의 양이 적을 땐 아무런 문제가 없지.”

에이든은 서서히 통과하는 물의 양을 늘렸다.

낙하하는 물의 양이 늘어나며 샘의 수면을 때리는 물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하지만 물의 양이 많아지고, 물살이 거세지기 시작하면 슬슬 문제가 생길 거다. 배수관이 터질 것처럼.

그러다 결국엔……….”

물의 양이 차츰 더 늘어나더니, 이 내 에이든 왼손 손가락 틈새로 물이 새어 나오다 못해 넘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샘으로 떨어지는 물소리도 점점 커져, 급기야는 에이든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거세게 수면을 때리는 물은 엘리사의 눈에도 튀었다.

에이든은 마침내 동그랗게 말았던 손을 꽉 펼치며 손바닥 배수관을 해체했다.

“터지겠지.”

배수관이 사라지자, 에이든의 손에선 물이 무자비하게 흘러나와 샘을 채우기 시작했다.

“배수관이 터지면 물은 형태를 잃고 무질서하게 흘러나온단다. 만약 물의 양이 한정적이라면, 빠른 속도로 물이 흘러나와서 결국엔 물이 오래가지 못하고 말라 버릴 거다.”

에이든은 물을 내뿜던 손을 거두었다.

물소리로 가득하던 수련실은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우리의 힘도 마찬가지지. 우리가 가진 힘은 물, 우리의 육신은 배수관이라고 생각하면 돼.”

“물과 배수관……….”

“한계를 넘어선 과도한 힘을 쓰면 육신이 버티지 못해. 결국 터져 버릴 거다.”

에이든의 무시무시한 말에 엘리사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박자 늦게 그 기색을 알아챈에이든은 조금 전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물론 몸이 정말로 터진다는 건 아니고, 터져 나오는 힘을 버티지 못해 죽는다는 뜻이란다. 배수관에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아하……. 그렇군요.”

“초대 가주 아리에 님이 협곡을 봉인하고 숨을 거두신 이유도 한계를 넘어선 과도한 힘을 사용했기 때문이고.”

엘리사는 건국제 때 봤던 연극과, 세리어트 후작저에서 보았던 인물화를 떠올렸다.

아리엔 세리어트.

마왕을 무찌르고, 자신을 희생하여 오염된 땅으로 통하는 협곡을 봉인 했다던 아렌시아의 영웅.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니 너무 서두르지 말렴. 꾸준히 수련하다 보면 네 힘의 한계가 늘 거다.”

“한계가 늘어나요?”

“우리의 몸은 배수관과는 달라서, 천천히 늘리면 한계치가 점점 늘어 나거든. 그럼 머지않아 각하의 기운도 정화할 수 있게 될 테지.”

에이든은 엘리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격려했다.

그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사는 문득 눈앞의 샘을 쳐다보았다.

에이든은 이 샘을 열다섯 살 때

‘시험 삼아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신전 입구에 있는 샘과 외곽 지역에 분포된 샘 4개를 더하면 현재 총 6개의 거대한 샘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었다.

엘리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 얼굴로 물었다.

“아빠는 어떻게 그렇게 한계를 늘 리신 거예요?”

“음,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다 보니 어느 순간 늘어 있더구나.”

에이든은 웃는 얼굴로 말했지만,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엘리사는 에이든보다 힘의 한계치가 높은 한 사람이 떠올랐다.

‘리하르트.’

단신으로 파이란 왕궁을 초토화시킨 전쟁 영웅.

그 이면에 얼마나 많은 죽음의 고비들이 있었을까.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가 넘어왔을 수많은 죽음의 고비들을 떠올리자 또 한 번 마음이 아려 왔다.

늘 보는 얼굴인데도,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마주하고 있던 얼굴인데도 애틋해졌다.

그가 보고 싶었다. 새삼스럽게도.

“그렇다고 무모한 일은 하지 말고.”

에이든이 노파심에 엘리사에게 주의를 주던 그때, 수련실의 낡은 문이 끼익-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엘리사와 에이든의 시선이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엘리사가 그리워하던 그가 서 있었다.

“엘리사.”

리하르트는 아침에 입었던 외출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황궁에서 곧장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엘리사는 성큼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그의 온기와 체향을, 그리고 거세게 고동치는 심장을 느꼈다.

그는 살아 있다. 제 눈앞에.

그 사실이 새삼 감사했다.

“무슨 일 있었어?”

에이든에게 인사하려던 리하르트는 갑작스러운 엘리사의 포옹에 흠칫 놀라며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엘리사는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보고 싶었어.”

뜻밖의 고백에 멍해 있던 리하르트는 이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엘리사의 입술에 입을 맞추려다, 에이든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도.”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에이든이 짐짓 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직 수련이 안 끝난 거 같은데….”

“아! 죄송해요.”

엘리사는 그제야 수련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에이든의 곁으로 들어왔다.

에이든은 피식 웃으며 엘리사에게 힘을 다루는 법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하르트도 수련에 합세했다.

서로 다른 힘을 사용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힘을 사용하는 법은 같기에 그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럼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할까.”

세 사람은 해 질 녘까지 수련을 하다가 별관으로 돌아왔다.

막 별관으로 들어서는데, 마침 신전 중앙 쪽에서 별관으로 오고 있던 신관과 마주쳤다.

그는 에이든에게 다가와 가져온 서신을 내밀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며칠 전, 에이든이 엘리사에게 정식으로 작위를 승계하겠다고 보낸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에이든은 황제가 보낸 편지를 꺼내 펼쳤다.

[아렌시아 제국법상 반역자는 3대를 멸하나, 세리어트와는 오랜 형제의 맹약이 있어 멸하지 아니하였다.

그대가 작위를 계승하고자 하는 엘리사 루벨린은 반역자 율리아 세리 어트의 직계 자손이니, 이 맹약에 따라 작위를 이을 수 없음이다.]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에이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가 반역자의 딸이라서 작위를 계승할 수 없다고 하나요?”

며칠 전 크리스티안과의 대화로 이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그렇게 묻는 엘리사의 목소리는 여상했다.

에이든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사는 슬그머니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무슨 의미인지 읽은 리하르트는 내키지 않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렸으나, 이내 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리하르트의 반응을 바라보던 엘리사는 씨익 웃으며 에이든에게 말했다.

“제가 독대를 청한다고 답신을 보내 주세요, 아버지.”

*

며칠 후, 엘리사는 황제와 독대하기 위해 알현실을 찾았다.

“아렌시아의 무한한 영광을 뵙습니다.”

“공작 부인이 짐에게 독대를 청하다니, 별일이군. 그래, 내게 긴히 할 이야기가 무엇인가?”

황제는 엘리사가 자신에게 독대를 청한 이유를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물었으나, 엘리사를 ‘공작 부인’ 이라 칭하는 행동에서 이미 그가 엘리사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엘리사를 세리어트의 가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된 호칭이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담담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전에, 다시 한번 폐하와의 독대를 윤허해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청하는 엘리사의 시선이 그의 뒤에 선 기사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다시 한번 독대를 청한다는 건, 황제의 주위에 있는 기사들까지 물려 달라는 의미였다.

황제는 그런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등 뒤의 기사들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기사들이 조용히 물러나고, 알현실에 황제와 엘리사, 그리고 엘리사가 데려온 하녀 하나만이 남겨졌다.

황제는 엘리사의 뒤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하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그대야말로 짐과의 독대에 응할 생각이 없는 건가?”

“아, 이 사람이 오늘 제가 폐하께 독대를 청한 이유라서요.”

“……이유?”

“이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하녀는 조용히 엘리사의 옆으로 나와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삼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귀부인의 곁에 두기엔 나이가 꽤 있는 여자였다.

평범한 여자였으나, 마주한 눈빛만은 평범하지 않았다.

파헤쳐져 공허해진 눈동자에 증오와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

어쩐지 기분 나쁜 눈빛이었다.

황제는 시큰둥한 눈으로 하녀를 보았으나, 딱히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짐이 기억해야 하는 얼굴인가?”

“음, 기억 못 하시는 게 당연하겠네요. 폐하겐 그저 일회용 패였을 테니까.”

‘일회용 패’라는 말에 황제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엘리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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