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다음 날, 황제는 황궁으로 귀족들을 소집했다. 그 자리엔 크리스티안도 참석했다.
황태자궁에서 알현실이 있는 카이 로트 궁에 도착한 크리스티안은 앞서가고 있는 익숙한 뒤태를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리하르트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공작 부인? 저 계집이 왜 따라온 거지?’
리하르트의 옆에 선 엘리사를 본 크리스티안은 인상을 구겼다.
엄연히 각 가문의 가주들 혹은 작위를 받은 귀족들만이 모이는 자리다.
그런데 그 자리에 공작 부인이 나타나다니.
‘반역자의 딸이 가주가 됐을 리는 없고.’
어제 엘리사가 부제를 독대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독대의 목적은 보나 마나 작위 승계에 관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제국법상으로도, 사적인 감정으로도 부제가 엘리사에게 작위가 승계되는 것을 허락했을 리 없었다.
‘막무가내로 귀족 회의에 참석하려는 건가.’
크리스티안은 엘리사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러게, 내 말에 순응했으면 아버지께서도 숙고해 보셨을 텐데.’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저를 단칼에 거절하던 엘리사가 결국 절박하게 가주의 자리를 찾으려 하는 모습에 흡족했다.
크리스티안은 며칠 전 엘리사의 어리석음을 비웃기 위해 두 사람의 뒤로 성큼 다가갔다.
그 순간, 그의 인기척을 느낀 리하르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열 걸음보다 먼 거리인데도 인기척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귀신같은 놈…….’
크리스티안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태연한 척 다가섰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크리스티안을 보고도 못 본 척, 시선을 엘리사에게로 돌려 버렸다. 그러고는 엘리사를 보호하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대놓고 저를 무시하는 행동에 크리스티안의 표정이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애써 분노를 삭였다.
엘리사에겐 동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티안은 가까이 다가서 큼큼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엘리사가 그를 돌아보았다.
설핏 미간을 찡그렸던 엘리사는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인사를 건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공작 부인이 이곳엔 웬일이지?”
“폐하께서 귀족들을 소집하셨다고 하셔서요.”
“거길 공작 부인이 왜 참가하나?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해. 막무가 내로 가주 행세를 하려고 해 봤자 꼴불견이 될 뿐이라고?”
크리스티안은 기다렸다는 듯 훈계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정작 엘리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훈계를 늘어놓는 그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티안은 엘리사의 여유로움에 외려 자신이 조바심을 느끼며 덧붙였다.
“이제 와 국법을 바꿀 순 없잖아.
반역자의 딸임에도 같이 처벌하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겨야지. 물론, 지금이라도 내게 빌고 애원하면 -”
“국법은 바꿀 수 없어도, 거짓은 바꿀 수 있겠죠.”
엘리사는 크리스티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자르고 대꾸했다.
그를 올려다보는 엘리사의 눈은 웃고 있었으나, 묘하게 서늘했다.
크리스티안은 그 기세에 흠칫 놀라 물러났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데리고 알현실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크리스티안은 한 박자 늦게 엘리사의 말을 곱씹었다.
‘거짓을 바꿔………?
그때, 귀족들이 하나둘 알현실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크리스티안은 일반 출입문이 아닌, 황제와 황태자의 출입문을 통해 알현실로 들어섰다.
알현실 안은 먼저 도착한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당연히 엘리사에게로 향해 있었다.
작위가 없는 공작 부인이 이곳에 등장한 것이 의아한 눈치였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크리스티안은 당연히 보여야 할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
‘장인어른은 오지 않으셨나?’
그때였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귀족들이 거의 다 모였을 즈음, 황제가 알현실로 들어섰다.
귀족들과 크리스티안은 그에게 묵례를 하며 예를 갖췄다.
황제는 황좌에 앉아 귀족들을 내려다보았다.
‘한 마디 하시려나?’
크리스티안은 부제가 엘리사를 보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줄 것이라 기대했으나, 황제는 미간을 좁히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데.’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짐이 오늘 그대들을 이 자리에 부른 것은, 이십 년 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이의 누명을 벗기기 위함이다.”
귀족들은 예상치 못한 황제의 이야기에 의아한 얼굴로 웅성거렸다.
황제는 잠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십 년 전, 선황 폐하를 독살한 반역도 무리에 이름을 올렸던 율리아 세리어트는 반역자가 아니다.”
“율리아 세리어트….…?”
귀족들이 율리아의 이름을 몰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던 그때, 한 명이 생각난 듯 소리쳤다.
“전 세리어트 후작 부인이 아닌가?”
이십 년 만에 떠오른 그 이름에 귀족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안 역시 믿기지 않는 눈으로 부제를 바라보았다.
엘리사의 모친인 율리아가 반역자가 아니라면, 엘리사는 정식으로 세리어트의 가주가 될 수 있다.
부제가 율리아의 누명을 벗겨 준다는 건, 엘리사가 세리어트의 가주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었다.
‘말도 안 돼. 아버지가 그러실 리가….’
루벨린과 세리어트가 손을 잡고 세력을 키우는 것을 그토록 우려하던 부제가 엘리사가 가주가 되는 것을 허락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 처사였다.
‘도대체 어제 독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크리스티안은 입술을 짓씹으며 엘리사와 리하르트를 내려다보았다.
혼란에 빠진 귀족들 틈에서, 크리스티안을 쳐다보는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마주한 두 사람의 눈은 담담했다.
마치,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는 듯이.
하루 전, 황제 로암을 대면한 엘리 사는 그에게 데려온 하녀를 소개했다.
“이 사람은 이십 년 전, 선황 폐하독살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엘리사의 말에, 그전까지 시큰둥하던 황제의 눈빛이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던 엘리사가 덧붙였다.
“정확히는, 폐하께서 황궁의 하녀에게 선황 폐하를 독살하라 명하는 장면을 목격한 또 다른 하녀.”
황좌의 팔걸이를 움켜쥔 황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외적으로 로암의 이복형인 2황자 알폰스가 선황제를 독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각에서는 황좌를 차지한 로암을 범인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의혹을 공론화하지 않았다.
진실이 무엇이든, 현 황제는 로암이었기에.
살아남은 이들은 황제가 의심스러워도 대놓고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눈앞의 새파랗게 어린 계집이 묻어 두었던 과거를 캐내었다.
로암의 심기가 뒤틀렸다.
“……공작 부인, 그대가 감히 짐을 능멸하는가? 저 계집이 그 당시 황궁의 하녀였다는 증거가 어디 있으며, 내가 선황 폐하를 독살하라 사주했다는 증거는 또 어디 있지?”
“폐하께서 가장 가까이 두시고 수족으로 부리는 현 기사단장, 그의 죽은 쌍둥이 형이 이 여인의 친우에게 폐하의 명을 전했다고 하더군요.”
“……..”
“죽은 그 남자, 콧잔등에 칼자국이 있었다죠?”
로암은 대답하지 못했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당시라면 그가 자신의 명을 하녀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엘리사는 그 하녀가 아닐 거라는 로암의 부정에 못을 박았다.
“폐하. 이 여인은 단 한 순간도 그날 일을 잊은 적이 없답니다.”
그러나 로암은 순간적으로 동요한 감정을 재빠르게 갈무리하고 반박했다.
“거짓말 마라. 만약 내가 형님을 죽이라 사주했다면, 그에 연루된 자들을 살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껏 무사히 살아 있을 리 없어.”
“네, 폐하라면 그러셨겠죠. 살아 있다면 폐하께 치명적인 약점이 될 테니까요.”
“…….”
“하지만 폐하의 약점을 쥐고 싶은 이가 있었답니다.”
내게는 정말이지 다행스럽게도.
엘리사는 며칠 전, 세리어트 후작저로 찾아왔던 크리스티안이 돌아간 후 고민에 빠졌다.
‘반역자의 딸’이라는 율리아의 누명을 들먹이며 저를 세리어트의 가주로 인정해 주지 않으려는 황제의 속셈은 알았다.
그에 반박하려면 율리아의 누명을 벗겨야 했다.
그러나 무려 이십 년 전의 일이다.
‘증거가 여태 남아 있을 리 없고, 독살에 가담했던 사람들 역시 전부 죽임을 당했을 텐데.”
에이든 역시 율리아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기 위해 증거를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일이 있을 당시 에이든은 협곡에서 습격을 받고 의식불명 상태였다.
겨우 의식을 되찾고 아카로아로 돌아왔을 땐, 증거를 인멸하기에 충분 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예상대로 증거는 인멸된 상태였고, 독살 사건에 조금이라도 연루되었던 자들 역시 모두 죽임을 당한 후였다.
레이모어를 비롯한 황제의 측근들의 뒤를 파헤치려 했으나, 반역자가 나온 세리어트에 협력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루벨린과 지금의 세리어트가 힘을 합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힘을 합친 두 가문의 영향력은 가히 황제라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정도의 힘이라면, 진실 혹은 그 실마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최측근을 차례차례 훑어볼 생각이었다.
‘그럼 최측근 중 누구부터 털어 볼까.’
황제의 최측근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레이모어 펠리스.
‘그자를 어떻게, 어디서부터 털어야 단서가 나오려나.’
고민하던 그때, 리하르트가 말을 꺼냈다.
‘로하스 자작. 그자에게 물어보는 게 어떨까?’
‘로하스 자작이라면……..’
레이모어의 명을 받고 협곡에서 악마의 영혼석을 가져와 루벨린 근처의 몬스터들에게 주입한 자였다.
그 이후 리하르트에게 꼬리를 잡혔으나, 레이모어에게 죽임당하려던 것을 엘리사가 살려 주며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현재는 리하르트의 승인하에 발광석 사업을 조금씩 하고 있었다.
그자는 평민으로 살다가, 그 비슷한 시기에 펠리스 후작에게 자작 위를 받았다고 했어. 그쯤 뭔가 중요한 일을 처리했을 확률이 있지.’
그리고 그 시기의 중요한 일이라면, 높은 확률로 선황제의 독살과 연관이 있으리라.
두 사람은 곧장 로하스 자작을 불러 이십 년 전의 일에 대해 물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한 번에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아냈다.
‘이십 년 전이라면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아!
웬 젊은 여자를 산골 마을 별장에 데려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자?’
‘예. 정신적으로 좀 불안해 보이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레이모어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하는 자가 아니다.
그러니 만약을 대비해 황제의 약점을 쥐고자 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 여자가 황제의 약점일확률이 높았다. 수상했다.
‘자작, 그 여자를 데려다준 별장이 어디인지 기억하나?’
‘네, 기억하지요. 한데, 그 여자가 아직까지 거기에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여자가 살아 있는 건 둘째 치고, 자작의 말대로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여자가 그곳에 살고 있을지 의문이었다.
‘흐음, 만약 그 별장에 여자가 없다면 어떻게 찾지……….’
엘리사는 생각에 잠겼다.
그때, 잠자코 있던 리하르트가 여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다람쥐가 어디에 도토리를 숨겼는지는,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줘 보면 알게 되겠지.’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로하스 자작에게 고갯짓했다.
안내하지, 그 별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