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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17화 (117/164)

117화

리하르트는 그 길로 로하스 자작이 알려 준 레이모어의 별장을 습격했다.

엘리사와 리하르트의 예상대로, 그곳에 ‘그 여자’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리하르트의 계획이었다.

달아난 별장의 사용인은 레이모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루, 루벨린 공작이 그 여자의 존재를 눈치챈 듯합니다. 각하!’

레이모어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죽이라 명한 황궁의 하녀를 데리고 있었던 이유는 그 하녀가 황제의 약점이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만약을 대비한 카드 중 하나.

하지만 리하르트가 하녀의 존재를 알아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약 하녀의 존재가 리하르트를 통해 황제에게 알려지면, 만약을 대비한 카드는커녕 자신을 향한 황제의 신임을 잃게 될 터.

레이모어는 하녀를 살려 데리고 있는 것에서 얻는 이점보다, 하녀를 리하르트에게 빼앗겨 잃을 손실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그 계집을 죽여라.’

하녀를 숨기는 것보다는, 죽이는 것이 빨랐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레이모어는 하녀가 있는 별장에 그녀를 죽이라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리하르트는 그의 그런 판단까지 간파하고 있었다.

펠리스 후작저 상공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하르트는 서신을 가지고 또다른 별장으로 향하는 레이모어의 수하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그 결과, 레이모어의 숨겨 둔 카드는 엘리사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엘리사는 크게 동요하는 황제의 눈을 꼿꼿하게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레이모어 펠리스를 얼마나 믿으십니까?”

그 말은 곧, 이 하녀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둔 사람이 레이모어라는 뜻이었다.

레이모어가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된 황제의 눈빛에 노기가 어렸다.

눈앞에 없는 레이모어를 향한 분노는 눈앞의 엘리사에게 튀었다.

‘새파랗게 어린 계집이 제법이구나. 나를 협박하다니.’

저 하녀의 존재가 제국에 밝혀진다고 해서 자신의 황위에 위협이 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암암리에 돌던 ‘황제가 선황제인 이복형을 독살하고, 또 다른 이복형에게 그 죄를 씌워 죽인 폭군’이라는 소문이 더 이상 소문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정당한 황제인가 의심받고, 절대적으로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에 분란이 생길 것이다.

정당하지 않은 황제.

그 오명은 결국 황권을 약화시킬 발단이 될 터였다.

엘리사는 그것을 알고 독대를 청해온 것이다.

그가 자신의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도록.

황제는 비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되바라진 계집 같으니……. 그래,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지? 네 어미의 신분 회복인가?”

“폐하께서 나서 주시지 않으신다면, 자식 된 도리로 제가 나서서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엘리사는 정중하게 말했으나, 사실 상 황제를 향한 협박이었다.

그에 황제는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나 엘리사는 주눅 드는 기색 없이 담담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진실을 밝히신다 해도 폐하께선 잃을 것이 없으십니다.”

“이십 년 전, 잘못된 판단을 바로 잡아 현군이 되실 테고.”

물론, 다른 귀족들에 한해서만.

엘리사에겐 여전히 어머니를 죄인으로 몰아 죽인 원수였다.

“언젠가 주인을 찌를지도 모를 검을 솎아 내시겠죠.”

엘리사는 그렇게 말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로 황제는 레이모어를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견고하던 그들의 동맹에 금이 생긴 것이다.

그 금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벌어 지다, 종내에는 두 사람을 완전히 갈라서게 할 터.

그렇게 되면 사실상 황제에겐 가장 큰 손실이지만, 배신감에 사로잡힌 황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레이모어를 경계하며 멀리할 것이다.

엘리사가 바라던 그림이었다.

엘리사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황제는 마침내, 엘리사가 원하던 대답을 내놓았다.

“…전대 후작 부인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겠다.”

*

귀족들의 앞에서 정식으로 율리아의 신분을 회복시키고 돌아온 엘리 사는 온실을 찾았다.

온실에 선황제의 독살에 가담했던 그 하녀가 있었다.

‘이름이…… 레나였지.’

엘리사는 하네스를 안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때, 제 고사리 같은 손을 쭙쭙빨고 있던 하네스가 엘리사를 향해 손을 바동거리며 소리쳤다.

“따아!”

꽃향기를 맡고 있던 레나는 그 소리를 듣고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잠시 놀란 듯하던 그녀는 이내 엘리사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엘리사는 하네스를 다시 안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꽃을 좋아하나요?”

“으뱌뱌.”

하네스가 엘리사의 입 모양을 따라 하듯 입술을 오물거리며 옹알이를 했다.

그 소리에 레나의 시선이 자연히 하네스에게로 향했다.

“우옹.”

하네스는 옹알이를 하며 팔다리를 바둥거리다 다시 제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꼬물꼬물 순진무구한 기운을 뿜어내는 작은 아이를 보자, 무미건조하던 레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풀어졌다.

레나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조금 전 엘리사의 물음에 대답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엘리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와의 만남에 하네스를 데려온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무방비한 상태의 순수한 아기는 상대방의 경계심을 해제시키고, 삭막하게 흩어진 분위기를 한 곳으로 모아 준다.

엘리사는 자꾸만 손가락을 빠는 하네스의 입에서 손을 꺼내며 말했다.

“덕분에 어머니의 누명을 벗을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레나는 고마울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치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수첩과 펜이었다.

이십 년 전, 레이모어에게 잡힌 그녀는 혀를 잘렸기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레나는 수첩에 질문을 써 엘리사에게 보였다.

[왜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밝히지 않으셨나요?]

이십 년 전, 황제궁의 하녀였던 레나는 우연히 자신의 친구인 황제궁의 하녀가 로암의 부하로부터 황제를 독살하라는 명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할까 생각했으나, 평민 출신의 일개 하녀에겐 힘이 없었다.

결국 그녀의 친구는 반역에 가담한 죄로 죽음을 맞이했다.

여론은 죄 없는 2황자를 독살범이라 확신했다.

레나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막 오염된 땅의 협곡에서 돌아온 레이모어를 찾아갔다.

황후의 동생인 그라면, 당연히 황제의 억울한 죽음을 파헤쳐 진실을 밝혀 줄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그 당시의 레나는 몰랐다.

황후의 동생인 레이모어가 자신의 조카를 버리고 로암의 편에 설 줄은.

정의를 위한 그녀의 큰 결심은 그녀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죽음도 삶도 스스로 택할 수 없으며, 가족들도 평생 만날 수 없는.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모는 행방불명이 된 그녀를 평생 찾으며 그리워하다 죽었다.

그때 진실을 외면하고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갔더라면, 어머니는 딸의 눈앞에서 평안히 눈을 감았을까.

레나는 평생 레이모어의 별장에 갇혀 살며 그날을 자책하고 후회했다.

엘리사 역시 황제의 손에 엄마를 잃었고, 이십 년간 아버지를 모른 채 살아왔다고 들었다.

레나는 엘리사가 당연히 모든 귀족들의 앞에서 진실을 밝혀 황제에게 큰 타격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진실을 밝히기 보다는, 황제를 협박하길 선택했다.

엘리사는 그녀의 물음에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과 내가 고생한 세월이 이렇게 긴데, 겨우 한 방으로 끝내기엔 너무 아깝잖아요?”

상대가 언제, 어떻게 나를 공격까 매일 두려워하도록.

손톱 밑의 가시처럼 계속 신경 쓰이도록.

꿈속에서도,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결코 행복할 수 없기를.

“카드 게임을 할 땐, 좋은 카드일수록 마지막까지 들고 있어야 하는 법이거든요.”

엘리사의 말을 잠자코 듣던 레나는 한 수 앞을 내다본 엘리사의 생각에 내심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자신을 이렇게 만든 황제의 여생을 편히 지내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엘리사는 부드러운 어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십 년을 무사히 버텨 줘서 고마워요. 나는 루벨린과 세리어트의 이름을 걸고 당신을 보호할 거고, 당신은 이 저택에서 안전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

“혹시 좋아하는 일이 있나요? 아니면 잘하는 일이라거나.”

“……?”

“지금 당장 일을 시작하라는 건 아니에요. 당분간은 몸을 추스르면서 쉬다가, 일상이 무료하게 느껴질 때 그때 시작해도 괜찮으니까.”

엘리사의 물음에 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이 저택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주려 하고 있었다.

레나는 잠시 고민하다, 눈앞의 이름 모를 이국의 꽃을 바라보았다.

이십여 년간 방 안에 갇힌 그녀가 잊고 살아야만 했던 아름다움이었다.

그녀의 시선 끝에서 그녀의 대답을 들은 엘리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온실에 꽃과 나무들이 더 울창해 지겠네요.”

*

율리아의 누명이 벗겨지고, 신분이 회복되면서 엘리사는 정식으로 세리 어트의 작위를 이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세리어트 후작저에서 작위계승식이 있는 날이었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고 세리어트 후작저로 향했다.

나무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선 길을 지나 얼마간 가자, 어느덧 창밖으로 세리어트 후작저의 전경이 보였다.

엘리사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사이, 마차가 세리어트 후작저로 들어섰다.

마차가 멈추기 전, 엘리사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리하르트에게 물었다.

“아내의 작위 승계식에 오게 된 소감이 어떤가요, 후작 부군?”

엘리사의 물음에 리하르트는 피식 웃으며 엘리사의 손을 끌어와 그녀의 새하얀 손등에 입을 맞췄다.

“가문에 길이 남을 영광이죠.”

항상 어여쁘던 그녀의 모습이 오늘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제 오늘부터 그녀는 ‘엘리사 루벨린’이 아닌, ‘엘리사 세리어트’ 로살아간다.

한 가문의 가주가 된 그녀의 모습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어쩐지 씁쓸했다.

‘하지만, 네가 어떤 이름을 하고 있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니까.’

빛나는 나의 연인, 나의 아내.

나는 네가 내 옆에 있어서가 아니라, 너의 존재 자체로 빛나길 바라.

너는 그 존귀함과 우러름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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