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통상적으로 작위 계승식은 가족들과 가신들만 모인 자리에서 조용히 치렀다.
엘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에이든에게서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배지를 받으며 계승식이 진행되었다.
가신들 중 몇몇은 루벨린 공작인 리하르트를 경계하며 내심 탐탁지 않아 했으나, 감히 그의 앞에서 내색하지는 못했다. 대신 뒤에서 수군거렸다.
“공작 부인이 세리어트의 가주가 되다니. 이래서는 세리어트가 루벨린의 휘하에 들어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데 불운하게도, 그 이야기는 리하르트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리하르트는 서늘한 눈으로 그들의 말에 반박했다.
“나는 내 아내를 나와 동등한, 한가문의 수장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세리어트를 루벨린의 아래라고 생각하는 건 그대들이지 않나?”
“예……?”
“세리어트의 가주가 단지 내 아내라는 이유로 세리어트가 루벨린의 휘하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건, 그 대들이 은연중에 ‘아내는 남편보다 아래다’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아닌가?”
“그, 그건…….”
리하르트의 말에 말문이 막힌 세리 어트의 가신들은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리하르트는 그들의 고리타분한 관념이 탐탁지 않았으나,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엘리사가 이끌어야 할 그녀의 아랫사람들이고, 오늘은 그녀가 후작으로서 이 자리에 서는 날이었다.
그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리하르트의 기세에 눌린 세리어트의 가신들은 더 이상 입을 놀리지 못했고 계승식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무사히 끝이 났다.
계승식이 끝난 후에는 영지에서 올라온 가신들을 위한 연회가 열렸다.
밤이 깊어지고 연회의 분위기가 한 풀 꺾이자,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공작저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을 배웅하러 나온 프레드릭과 카밀라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 달에 며칠만이라도 본 저택에 머무르시면 어떨까요? 가끔은 저희도 가주님을 가까이서 모실 기회를 주십시오.”
“소공이 마음에 걸리신다면 소공도 함께 모시겠습니다.”
가주가 일만 제때 잘 처리한다면 꼭 저택에 머물러야 할 필요는 없다.
사용인들 역시 주인이 없는 쪽이 일을 하기도 편할 터였다.
그들이 엘리사를 저택에 모시고 싶어 하는 건 단순히 엘리사를 진심으로 경애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한 그들의 마음을 읽은 엘리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조만간 하네스랑 같이 올게요.”
그러자 옆에서 엘리사와 프레드릭, 카밀라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하르트의 눈썹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그 옆에서 듣고 있던 톰슨과 아가 일의 표정 역시 설핏 일그러졌다.
엘리사는 그들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 마차에 올랐다.
엘리사와 리하르트가 탄 마차는 한 적한 밤거리를 빠르게 달려 공작저에 도착했다.
집사 그레이슨이 그들을 맞이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마님. 각하.”
엘리사가 마차에서 내려 저택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톰슨이 슬쩍 말을 꺼냈다.
“마님, 저희가 마님을 많이 경애하는 거 아시죠?”
“음?”
“우리 마님이 무려 후작님 같은 대단한 분이 되셔서 좋은데, 그래도 세리어트보다는 루벨린에 더 오래 머무셔야 합니다. 예?”
갑자기 뭔 소리야?
엘리사가 톰슨의 말에 어리둥절하던 그때, 뒤에서 아가일이 불쑥 끼어들었다.
“저는 그냥 마님이 어딜 가시는 마님을 따르겠습니다. 마님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 말은 곧, 엘리사가 꼭 루벨린에 있지 않더라도 자신이 따라갈 테니 어디에 있든 상관없다는 의미였다.
아가일이 같이 엘리사를 붙잡아 줄거라 기대했던 톰슨은 발끈해서 소리쳤다.
“이 배신자 같으니!”
“배신은 뭐가 배신입니까? 제 생각은 그렇다는 거죠.”
톰슨과 아가일은 언제나 그랬듯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다투는 이유를 한 박자 늦게 눈치챈 엘리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세리어트와 루벨린, 둘 다 사랑해요. 그러니 두 사람 다 괜한 걱정하지 말아요.”
리하르트와 하네스가 있는 루벨린과, 에이든이 있는 세리어트.
엘리사에겐 두 가문 다 하나의 가족이었다.
하지만 톰슨은 이미 아가일이 루벨린을 배신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엘리사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엘리사는 계속해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엘리사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빛이 묘하게 심통이 나 있었으나, 엘리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
목욕을 마친 엘리사는 하네스의 방으로 향했다.
시도 때도 없이 잠에서 깨 젖을 찾으며 보채던 아이들도 50일을 넘어서면 어느 정도 길게 자기 시작했다.
부모들은 그것을 ‘50일의 기적’이라고 부르곤 했다.
하네스 역시 생후 50일을 넘기고부터 한 번 잠들면 네다섯 시간 정도 꽤 긴 잠을 자고 있었다.
그쯤부터 엘리사는 하네스를 독립된 방에 재우기 시작했고, 하네스역시 제 방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자고 있겠지.’
엘리사는 하네스의 잠든 모습이라도 볼 생각으로 조용히 아이의 방에 들어섰다.
“리하르트?”
방 안에 먼저 온 리하르트가 하네 스를 보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예상대로 하네스는 단잠에 빠져 있었는데, 꿈속에서 뭔가를 먹기라도 하는 건지 엄지를 쭙쭙 빨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엘리사와 리하르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잘 자, 하네스.”
두 사람은 아이가 깰세라 조용히 속삭인 후, 이불을 살포시 덮어 주고 침실로 돌아왔다.
엘리사는 하품을 하며 고단한 몸을 침대에 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안아 주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 시선을 눈치챈 엘리사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잠시 뜸을 들이던 리하르트가 물었다.
“정말 후작저에서 지낼 거야?”
그가 무슨 얘길 하는지 몰라 멀뚱히 바라보던 엘리사는 오늘 후작저를 나서기 전, 프레드릭이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아, 응. 프레드릭의 말대로 가주인 내가 너무 저택에 없는 것도 좀 그러니까. 한 달에 며칠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럼 나는?”
“응?”
“나는, 여기 두고 갈 거야?”
그렇게 묻는 리하르트의 표정이 어쩐지 절박해 보였다.
그 질문의 의미를 몰라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는 그제야 그가 왜 그걸 묻는지 알아챘다.
‘나랑 떨어져 지내야 할까 봐 그러는 거구나.’
이제는 세리어트 가문까지 질투하는 그가 귀여웠지만 한편으로는, 내 심 심술이 났다.
‘같이 있어 봤자 아무것도 안 할 거면서….’
출산 후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지금은 임신 전과 다를 바 없어졌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키스는 해도, 그 이상으로 진도를 나가지는 않았다.
출산한 아내에게 여자로서의 매력을 못 느끼는 경우도 있다더니, 그도 그런 건가 싶어 서운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엘리사는 내심 모르는 척 대꾸했다.
“그야 당연히 루벨린의 가주께선 루벨린에 있어야지.”
엘리사의 대답에 리하르트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엘리사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도 모른 척 한술 더 떴다.
“어차피 잠만 자는데, 며칠 정도 떨어져 있어도 상관없잖”
엘리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하르트가 몸을 틀어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엘리사는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를 품에 가둔 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어느새 짙은 욕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먹잇감을 둔 짐승의 그것처럼.
그는 엘리사의 도주로를 차단하듯, 커다란 손을 그녀의 자그마한 손 사이사이에 얽었다.
“잠만 자는 게 아니면, 상관있겠네.”
금방이라도 저를 씹어 삼킬 듯한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엘리사는 깨달았다.
그간 그가 자신의 욕망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참아 왔는지를.
먼저 그를 도발해 놓고는, 막상 그의 욕망을 마주하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겁먹은 눈으로, 그러나 제 시선을 피하지 않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낮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후회하지 마.”
못 멈출 것 같으니까.
그 말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평소의 부드럽고 조심스럽던 키스와는 전혀 다른 키스였다.
그는 그녀를 온통 거칠게 헤집어 놓았다.
“으응….”
엘리사가 뱉어 내는 달뜬 숨결 한 자락조차 아쉽다는 듯 모조리 집어삼켰다.
그러고도 모자라다는 듯 그녀를 뜨겁게 갈구하고 갈망했다.
그 아슬아슬한 감각에 엘리사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저를 얽어 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정신없이 저를 몰아세우는 그에게 휩쓸린 엘리사의 의식이 몽롱해질 즈음, 리하르트의 입술이 떨어졌다.
“하아……. 리하르트…….”
엘리사는 가쁜 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눈으로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흐트러진 그녀의 눈이 그의 욕망에 부채질했다.